노벨 경제학상이 알려주는 것 [세상읽기]

한겨레 2024. 11. 5.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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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4일(현지시각) 스웨덴 스톡홀름 왕립고등과학원에서 올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가 발표되고 있다. 스톡홀름/EPA 연합뉴스

이철희 |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국가미래전략원 인구클러스터장

좋은 제도가 경제 발전에 이롭다는 주장은 그리 새롭지 않다. 굳이 애덤 스미스까지 소환하지 않더라도 1993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더글러스 노스 교수의 연구를 통해 제도의 중요성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특정한 제도가 경제 발전에 미치는 인과적인 효과를 실증적으로 규명하기란 쉽지 않다. 예컨대 민주주의의 발달과 경제 성장 사이에 양(+)의 관계가 발견되었다고 해도 이것이 민주주의가 경제 발전에 이로운 제도라는 확실한 증거가 되기는 어렵다. 경제가 발전할수록 국민이 민주주의를 더 강하게 원해서 나타난 현상일 수도 있고, 문화나 종교처럼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 모두에 영향을 미치는 제3의 요인이 작용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스웨덴 노벨위원회는 이러한 방법상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제도가 국가의 부와 빈곤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게 해준 공로를 인정하여 다론 아제모을루, 사이먼 존슨, 제임스 로빈슨 교수(이하 수상자들)를 2024년 경제학상 수상자로 선정하였다. 이들은 우연적인 요인에 의해 제도의 차이가 발생했던 실험적인 역사적 사례를 발굴하고 이를 엄밀하게 분석함으로써 제도가 경제 발전에 미친 인과적인 영향을 연구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어떤 성격의 제도가 경제 발전에 유리하게 작용했는지를 밝혔다. 세 수상자의 주요 공동연구를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수상자들의 대표적인 업적은 과거 유럽 제국의 식민지에서 자연조건의 차이에 따라 서로 다른 성격의 제도가 출현했던 사례를 이용한 연구이다. 신대륙의 중남미 식민지는 풍부한 자원과 고수익 상업 작물 덕에 모국에 막대한 부를 안겼지만, 열악한 질병 환경으로 인해 영구 정착지로서의 매력은 떨어졌다. 반면 북미 지역은 상대적으로 낮은 경제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유럽과 유사한 기후·환경에 힘입어 백인 이주민의 주요 정착지가 되었다. 이러한 사정은 제도의 차이로 이어졌다. 정착 유인이 낮았던 중남미 식민지에서는 단기간에 현지의 인적·물적 자원을 최대한 약탈하는 데 적합한 제도가 형성되었던 반면, 북미 정착지에서는 거주민과 그 후손의 안전과 번영의 토대가 될 제도가 만들어졌다. 수상자들의 계량적인 분석 결과는 이러한 제도의 차이가 이후 장기적인 경제 성장의 격차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다른 연구는 15세기 신대륙 발견과 인도 항로 개척이 가져온 대서양 무역의 확대가 유럽 국가들의 제도와 경제 발전에 미친 영향을 들여다본다. 이 시기 대서양 무역에 참여했던 서유럽 국가들은 중부와 동부 유럽 국가에 비해 더 빠른 도시화와 소득 증가를 경험하였다. 수상자들은 무역의 직접적인 이득뿐만 아니라 상인들의 영향력 확대에 힘입은 제도 개혁이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었음을 지적하였다. 또한 무역의 이득이 왕실에 독점되었던 절대왕정 국가에 비해 왕권에 대한 적절한 견제가 이루어졌던 국가에서 제도 개혁을 통한 장기적인 경제 발전 효과가 더 뚜렷하게 나타났음을 보였다.

나폴레옹 전쟁의 사례를 이용한 연구도 있다. 19세기 초 나폴레옹 군은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프로이센) 군대를 연파하며 독일의 여러 지역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그때까지 봉건적 체제가 유지되고 있던 점령지에서 프랑스 민법과 상법 도입, 길드(동업조합) 폐지, 농노제 철폐 등을 골자로 하는 제도 개혁을 단행하였다. 수상자들의 실증분석 결과는 나폴레옹 군 점령 지역이 독일의 다른 지역에 비해 19세기 중엽 이후 더 빠르게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수상자들의 연구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개별 국가의 역사를 깊게 이해하지 못한 채 결과를 과도하게 일반화했다는 주장도 있고, 제시된 실증적 증거가 결론을 탄탄하게 뒷받침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다. 서구의 경제 발전이 식민지에서 자행된 ‘약탈’의 결과였을 가능성을 간과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이러한 비판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법치를 존중하고 국민을 약탈하지 않는 제도가 장기적으로 경제 발전에 이롭다는 수상자들의 주된 결론을 부정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여전히 힘을 가진 소수에 의한 ‘약탈’ 사례가 빈번하게 드러나고, 공적인 시스템을 무시한 사적 지배의 관행이 만연해 있는 상황에서, 올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의 연구 결과는 풍요롭고 행복한 국민의 삶을 위해 우리의 다양한 공식·비공식 제도들을 더 공정하고 포용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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