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이어진 한국문학 번역의 힘

차형석 기자 2024. 11. 5. 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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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효환 시인은 한국문학 번역 현장의 산증인이다. 한국문학 해외 소개 작업을 하는 민관의 두 기관에서 일했다. 그는 번역가 양성과 한국문학 번역 생태계를 강조했다.

곽효환 시인(57)은 32년 전 어떤 만남의 기억이 생생하다. 1992년 당시 〈연합통신〉(〈연합뉴스〉의 옛 이름) 기자로 일하던 그는 대산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를 만났다. 대산 신용호는 교보문고 입구에 ‘역대 노벨상 수상자 초상화를 걸고 한국인 수상자의 자리를 비워두는데, 그 자리를 채우는 일을 하고 싶다’고 그에게 말했다. 젊은 기자 곽효환이 ‘그 일은 매우 어렵고 오래 걸리는 일’이라고 답하자, 대산은 “그래서 하고 싶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뭉클한” 문답이 그를 대산문화재단 설립 작업에 합류하게 했다.

1992년 설립된 대산문화재단은 초기부터 한국문학 번역 지원사업을 꾸준히 해왔다. 한국문학을 해외에 소개하는 정부 차원의 지원 기관이 필요하다는 문학계의 청원 등에 따라 한국문학번역금고가 설립된 게 1996년이다. ‘금고’는 2001년 한국문학번역원으로 확대·개편되었다. 민관의 두 기관을 중심으로 한국문학 번역·보급 지원사업이 펼쳐졌다. 오랫동안 대산문화재단에서 일한 곽효환 시인은 한국문학번역원장을 지냈다. 두 기관을 거친 한국문학 번역 지원사업의 산증인인 셈이다. 10월22일, 대산문화재단 회의실에서 그를 만났다.

곽효환 전 한국문학번역원장은 1992년 대산문화재단 설립 때부터 한국문학 번역 지원 업무를 해왔다. ⓒ시사IN 조남진

그동안 해외에 소개된 한국문학 작품이 대략 3000여 종(한국문학번역원 2200여 종, 대산문화재단 400여 종 등)이라고 들었는데.

출판된 숫자가 그렇고, 실제 번역 지원한 경우는 몇백 종 더 많다. 불가피한 시행착오를 겪은 것인데, 초기에는 번역 지원을 ‘공급자 중심’으로 한 측면이 있다. 상대방(해외 출판사)의 관심과 관계 없이 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작품 리스트를 정했다. 우리 뜻대로 리스트를 정하고, 그 번역 원고를 들고서 해외 출판사를 찾는 식이었다. 그런 ‘공급자 중심’ 방식이 오랫동안 유지되다가 2010년에 들어서면서 확 바뀌었다.

정책이 바뀌는 데 어떤 계기가 있었나?

2011년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 영역판이 미국의 메이저 상업 출판사 랜덤하우스 크노프에서 출판된 게 계기가 되었다. 우리 번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분기점이다. 그 작품 이전까지 한국문학은 프랑스어권에서 어느 정도 강세를 보였는데, 가장 영향력이 크고 독자가 많은 영어권에서는 한국문학에 대한 반응이 거의 없었다. 영미 출판시장에서 번역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3%가 안 되고, 그 좁은 시장에서 전 세계 문학이 경쟁한다. 한국문학의 자리가 없었다. 한국문학 영문판이 나와도 소규모 출판사이거나 주로 대학 출판사였다. 그런데 신경숙 작가의 작품이 미국 상업 출판사에서 나왔고, 베스트셀러 순위에도 진입하는 등 전례 없이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한국문학에 대한 상대방(해외 출판사)의 관심이 늘어났고, 상대방이 관심을 갖고 중요하게 여기는 작품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엄마를 부탁해〉 영문판 번역자가 김지영씨다. 3세대 번역가의 등장이라고 본다.

한국문학 번역의 세대 구분을 하자면?

한국문학을 해외에 소개하는 작업은 1968년 일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노벨문학상 수상의 영향을 받았다. 일본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나온 이후인 1974년 옛 문예진흥원에서 한국문학 번역 지원사업을 시작했다. 그 첫 결과물이 1980년 홍콩의 한 출판사에서 나온 황순원 단편소설집 〈별〉이다. 이때부터 1990년대 초까지는 외국 문학을 전공한 한국인 교수들이 번역을 많이 했다. 1세대 번역이라 할 수 있다. 2세대 번역(~2010년대)은 외국어에 능통한 한국인 번역자와 한국어·문화에 밝은 외국인 번역자의 공동 작업이 많았다. 프랑스어권의 최현무·파트리크 모리스 팀, 최미경·장노엘 주테 팀, 독일어권의 김선희·에델투르트 김 팀, 스페인어권의 고혜선·프란시스코 카란사 팀 등 공동 작업을 하는 2세대 번역가들이 등장했다. 대산문화재단에서도 공동 번역을 조건으로 번역 지원을 하기도 했다. 3세대 번역자들은 ‘도착어’로의 표현 능력이 뛰어나고 ‘출발어(한국어)’와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은 원어민 번역자 중심이라 할 수 있다. 국적을 기준으로 삼지는 않는다. 김지영씨의 경우, 어머니가 1세대 번역가라 할 수 있는 유영란씨다. 일찍부터 미국 유학을 했다. 그를 포함해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데보라 스미스, 정보라의 〈저주토끼〉를 번역한 허정범(안톤 허), 김혜순 시집을 번역한 최돈미씨 등을 3세대 번역가라고 할 수 있다.

한강 작가(오른쪽)의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데보라 스미스 (왼쪽)는 3세대 번역가에 해당한다.ⓒEPA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과 관련해 한국문학 해외 번역이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많다.

한강 작가 작품의 파괴력이 컸고, 두 번째는 번역의 승리다. 2014년쯤, 대산문화재단에서 근무할 때 재단 관계자가 영국 출장을 가 포르토벨로북스 관계자를 만났다. ‘〈채식주의자〉를 검토하고 있는데, 흥미롭지만 상업적으로 자신이 없다’고 하더란다. 그 보고를 받고 대산문화재단의 번역 출판 지원을 신청하도록 했다. 한강 작가의 경우, 2010년에 〈채식주의자〉가 베트남어로 번역된 게 처음이다. 2015년 〈채식주의자〉 영역본이 나오기 전까지는 프랑스어, 중국어, 스페인어 등으로 번역된 게 10권 정도였다. 한강 작가 작품이 28개 언어로 82건 번역되었는데,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을 수상한 이후에 72건이 번역·출간된 것이다. 2015년 세계 무대에 서게 되었는데, 9년 만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거다. 벼락같은 축복이다.

곽효환 전 한국문학번역원장이 한강 작가의 번역출간 내역을 보여주고 있다. ⓒ시사IN 조남진

번역가 양성을 강조하던데.

대산문화재단에서 일할 때, 번역원 사람들을 만나면 ‘대산과 경쟁하지 말고, 민간이 못하는 일을 해야 한다. 그게 번역가를 양성하고 키우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한국문학번역원에 번역아카데미가 있다. 2년제인데, 학생 80%가 외국에 있는 한국학과 등을 졸업하고 온 사람들이다. 이들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학위를 주는 번역대학원대학을 설립하고 싶었다. 자기 나라에 가서 교수가 되거나 문화기관에 취직하면 죽을 때까지 한국 문화로 먹고살며 알릴 거 아닌가. 교육부 인가만 나면 번역대학원대학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교수진을 강화하고 커리큘럼을 정비했다. 내가 원장으로 재임한 2022년 번역 인력 양성 예산이 41억원이었다. 계산해보니 60억원이면 번역대학원대학을 할 수 있겠더라. 그래서 국회를 설득했는데, 무산되었다. 내년 번역 인력 양성 예산이 21억원이라고 한다. 오히려 절반으로 줄여버렸다.

한국문학 해외 번역·소개 현장을 가장 잘 아는 처지에서 안타까움이 커 보인다.

문예진흥원 시절까지 합하면 한국문학 3000여 종이 해외에 소개된 것으로 추산한다. 일본의 경우 2020년대 초반 2만에서 2만5000종 사이로 추산하더라. 한국문학이 한 해 200여 종 해외에 소개되는 수준까지 왔지만, 아직 노력이 더 필요하다. 노벨문학상은 한국문학이 거쳐야 할 관문이지 목표가 아니다. 나지브 마흐푸즈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고 이집트 문학이 세계문학이 아니잖나. 데릭 월컷이 받았다고 (섬나라) 세인트루시아의 문학이 세계문학이 되는가. 한국문학을 해외에 소개하면서 내가 하려는 일은, 봄을 부르는 일이었다. 노벨문학상이라는 제비 한 마리를 부르는 일이 아니다. 봄이 오면 제비도 오고 꽃도 피고 나무도 우거지고 강물도 흐른다. 번역 한 건 지원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성과가 쌓여 하나의 생태계를 조성하는 게 중요하다. 한국문학을 소개하는 번역자들의 권리를 보장해주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까지 가는 게 목표다. 내가 번역가 양성을 중요하게 본 이유이기도 하다.

※ 참고 자료:〈‘한국문학의 세계화’에서 ‘세계문학으로서의 한국문학’으로〉, 곽효환, 〈아시아〉 2024 겨울호 게재 예정

차형석 기자 ch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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