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 더 내게 해달라는 부자들 “기부만으로 세상 못 바꿔 ”
코로나19 팬데믹은 막대한 인명 피해를 초래했을 뿐 아니라 불평등도 심화시켰다. 팬데믹 극복 과정에서 각국 정부는 천문학적 규모의 자금을 풀었고, 그 부작용으로 물가 상승과 자산가격 급등 현상이 나타났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공급망 충격을 불러와 물가를 더욱 끌어올렸다.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고 소득이 줄어들 때, 이런 물가와 자산가격 급등에 따라 저소득층과 고소득·자산가 계층 간 부의 간극은 아득할 정도로 멀어졌다. 지난달 24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 회의에서 ‘초부자(ultra-high-net-worth individuals)에 대한 과세(부유세) 협력’이 공동성명서에 포함되며, 글로벌 의제로서 첫발을 뗀 배경이다.
미국의 부유세 찬성 여론을 이끄는 모리스 펄 역시 이런 흐름에 공감한다. “더 일하지 않아도 될 만큼은 벌었다”는 그는 ‘부자 과세’를 주장하는 비영리 단체 ‘애국적 백만장자들’을 이끌고 있다. 2010년 출범한 이 단체 회원이 되려면 연간 소득이 100만달러 이상이거나 500만달러 이상의 자산을 보유해야 한다. 여야 합의로 어렵게 도입한 금융투자소득세를 투자자들 반발에 밀려 시행조차 못 하는 한국의 현실에 비춰, 이들의 목소리에 담긴 의미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펄 의장과의 서면 인터뷰를 통해 스스로 세금을 더 내겠다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캐나다 국경 인근 버몬트주의 한 시골 마을에서 작은 잡화점을 운영하는 가정에서 자랐다는 그는 미국의 사회·경제 시스템 덕분에 자신이 성공할 수 있었다는 점을 여러번 강조했다. “부유한 도시 사람들이 내는 세금을 재원으로 지은 학교에서 교육받았어요. 부모님이 운영하던 잡화점의 주요 고객도 세금으로 급여를 받는 공공 근로자들이었죠.” 그의 성장을 뒷받침한 많은 것들이 사회 시스템과 공공성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는 설명이었다.
그는 월스트리트에서 오랜 경력을 쌓은 뒤 세계적인 투자회사 블랙록 임원을 지내고 은퇴했다. 그는 “월가에서 더는 일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부를 쌓는 행운을 누렸다. (나를 포함한) 부자들이야말로 그 누구보다 미국 시스템이 주는 혜택을 많이 누렸다”고 말했다.
기부가 부유세의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펄 의장은 “기부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백만장자들이 누구를 도울지 선택하도록 하는 대신, 그들이 세금을 공정하게 내고 있는지 확인하고 민주적 절차를 통해 자원을 어디에 투입할지 함께 결정해야 한다”며 “자신의 이름을 새긴 미술관을 짓는 데는 돈이 많이 모이지만, 가난한 지역에 학교나 하수처리장을 짓는 데는 (기부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애국적 백만장자들은 현 세금 제도가 미국 내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핵심이라고 본다. “제가 보유한 주식을 팔아 40만달러 수익을 내면 약 5만달러를 세금으로 냅니다. 직장인이 40만달러 연봉을 받아 내는 세금보다도 훨씬 적은 수준이죠.” 이는 근로소득보다 자산소득에 붙는 세율이 크게 낮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부자들은 세금 회피 수단을 활용해 거의 세금을 내지 않는다”고도 말했다. 미국 비영리 탐사보도 매체 ‘프로퍼블리카’는 2021년 미국 국세청 자료를 입수해, 미국의 최상위 부자 25명의 보유세 실효세율이 3.4%에 불과하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 단체는 적극적인 로비활동도 펼친다. 일부 성과도 있었다고 한다. 이 단체의 체이스 하딘 대변인은 추가 서면 인터뷰에서 “우리의 가장 큰 성과는 민주당이 ‘부자에게 세금을’(Tax the Rich)이라는 정책 제안을 수용하도록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단체는 민주당과 함께 일정 수준 이상의 소득과 자산에 추가 과세하는 미국안정법안(American Stability Act) 등을 발의했다.
모리스 펄은 부유세가 경제 성장에도 기여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부자들은 조세 정책에 따라 조금 더 부자가 되거나 조금 덜 부자가 될 뿐이지만, 부자들이 세금을 더 부담하면 생계가 빠듯한 사람들의 소비가 늘어나며 경제가 성장한다”고 했다. 재분배 정책이 소비를 확대하고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얘기다. 이 단체가 2009년 이후 동결된 미국 연방 최저임금(시간당 7.25달러)의 인상을 요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과도한 세금이 성장 의지를 꺾는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납득할 수 없다”고 그는 일축했다. “세금은 투자에서 발생한 순이익에만 부과되거든요. 수익을 낼 기회가 있다면 투자를 통해 이익을 얻고 그 일부를 세금으로 납부하는 게 정상이죠. 돈을 벌 수 있는데 세금 때문에 투자하지 않는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모리스 펄은 “미국 부의 대부분은 교사, 간호사, 소방관 등 수백만명이 저축한 결과다. 소수의 부자가 점점 더 부자가 되는 모습을 보며 많은 미국인들은 낙담하고 있다”며 “세금은 공평하게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태호 기자 eco@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한동훈 또 패싱…추경호 “4일 대통령실 가서 순방 전 담화 건의”
- 9살 손잡고 “떨어지면 편입 칠 것”…‘대치동 그 학원’ 1800명 북새통
- 합참 “북 단거리 탄도미사일 여러발 발사”…미 대선 전 무력시위
- 색깔론 들고 나온 추경호 “민주, 현안마다 북한과 한 세트”
- 세월호 갇힌 이들 구하다 상한 몸, 한국에서 받아주지 않았다니…
- 공멸 위기감 속 윤에 “대국민 사과” 직격탄 쏜 한동훈…특검은 침묵
- 윤, ‘경고음’에 담화 7일로 앞당겨…“모든 사안 소상히 설명”
- 젤렌스키 “쿠르스크에 북한군 1만1000명 이미 주둔 중”
- ‘대통령 회견’ 앞두고…국힘 내부서도 “자화자찬 그만, 사과해야”
- 엄마, 삭발하고 구치소 간다…“26년 소송, 양육비 270만원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