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애국 전쟁'된 미국 대선

이상은 2024. 11. 5. 00:43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미국을 구해야 해요."

2024 미국 대통령선거 유세 현장을 취재하는 동안 가장 많이 들은 문장이다.

그 선거가 조작돼 부당하게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는 서사에 동의하지 않는 트럼프 지지자는 상상하기 힘들다.

유세 과정에서 만난 사람 중에서는 트럼프 전 대통령과 그 지지 세력을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표현하는 이들이 여럿 있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상은 워싱턴 특파원

“미국을 구해야 해요.”

2024 미국 대통령선거 유세 현장을 취재하는 동안 가장 많이 들은 문장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지지자든,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의 지지자든 마찬가지였다. 양쪽 지지자들은 모두 ‘내가 지금 나서지 않으면 곧 미국은 큰 위기에 빠질 것’(혹은 이미 큰 위기에 빠져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지지자 사이에서는 2020년 대선이 ‘조작됐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로 굳어져 있다. 그 선거가 조작돼 부당하게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는 서사에 동의하지 않는 트럼프 지지자는 상상하기 힘들다. 이들은 진심으로 나라를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한다고 믿는다.

 상대 진영의 악마화

민주당 지지자에 대해서도 극단적인 언사가 난무한다. 도저히 믿을 수 없을 것 같은 음모론에 빠진 이들을 유세 현장에선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아이티 이민자가 반려동물인 개와 고양이를 잡아먹는다는 이야기는 애교 수준이다.

지난달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만난 데비 호프마스터 씨(66)는 “민주당 사람들이 아이들을 지하실에 가둬놓고 흡혈을 한다”거나 “음식에 독을 풀고 있다”고 했다. 그는 정말 다정했다. 진심으로 기자의 안위를 걱정해 주면서 나라를 구해야 하며 “트럼프 전 대통령이 그 일을 할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의견은 과도하게 극단적이었지만, 미국을 움직이는 비밀스러운 조직 ‘딥스테이트’가 활동하고 있으며 민주당이 바로 그들의 세력이라는 트럼프 지지자의 인식을 일부 엿볼 수 있었다.

민주당 지지자들도 ‘애국심’이라는 면에서는 결코 공화당에 뒤지지 않는다. 유세 과정에서 만난 사람 중에서는 트럼프 전 대통령과 그 지지 세력을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표현하는 이들이 여럿 있었다. 이들은 미국의 핵심 정체성인 자유와 민주를 해치는 세력, 독재와 파시즘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상대를 설명한다. 이들이 인식하는 트럼프 전 대통령과 주변 인물들은 세상에 해를 끼치는 악마 수준이다. 옆집에 사는 평범한 내 이웃이 트럼프 전 대통령의 지지자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런 인식은 달라지지 않는다.

 감정적 정치 양극화

투표를 결정하는 근저에 미국을 구하겠다는 애국심이 깔려 있다는 것은 다른 모든 이슈가 거기에 빨려 들어가 사라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은 최근의 정치적 양극화가 과거처럼 ‘이데올로기적 양극화’가 아니라 ‘감정적 양극화’라면서 “감정적 양극화는 정책 차이보다 정체성에 기반한 감정적 혐오를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이번 선거에서도 경제 문제나 여성 문제, 이민자 문제 등 핵심 쟁점으로 거론되는 많은 이슈가 있지만, 사실은 자신이 생각하는 지지 후보를 먼저 낙점하고 거기에 따라오는 패키지를 자신의 의제로 받아들이는 것에 더 가까워 보인다. 한국을 비롯해 다른 나라의 정치도 점점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다.

인터넷의 등장은 공론장에 대한 기대를 높이기도 했지만 결국 우리가 귀착한 곳은 각자 자신과 비슷한 사람과의 교류만을 강화하는 단절된 버블이다. 분열된 정치가 스스로 통합의 길을 찾으면 좋겠지만 쉽지 않아 보인다. 미국 대선이 남길 후유증이 벌써부터 걱정되는 이유다.

Copyright © 한국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