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면서 연기한 ‘최승희’ 나처럼 예인이자 엄마… 아픈 인생 달래주더라
“의상 바구니가 요람이고 무대가 놀이터였어요. 어머니는 저를 배 속에 갖고도 무대에 오르셨다니 그 판에서 노는 게 태교였던 셈이에요.”
여성 국극 드라마 ‘정년이’가 인기다. 배우 김성녀(74)는 “아무리 돈 많이 들여도 따라하기 어려울 만치, 말도 못 할 만큼 화려했던” 바로 그 국극의 전성기 한가운데서 나고 자랐다. 최근 서울 성북구 자택에서 만난 그는 “노래나 춤을 따로 배운 적도 없이, 그저 듣고 본 걸로 다섯 살 때부터 어머니의 아역으로 함께 무대에 섰다”고 했다. 그의 부친은 국극 연출가 김향(1921~1999), 모친은 50년대 ‘비극의 여왕’으로 불린 국극 수퍼스타 박옥진(1935~2004)이다.
아버지는 천생 예술가였으나 가정엔 무관심했다. 국극으로 번 돈은 영화를 만들다 다 잃었고, 국극의 시대가 저물자 어머니는 병을 앓았다. 6남매집 맏딸은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 고교 졸업 뒤 “평생 멀티 플레이어 인생”을 시작했다. “생계 때문에 뜨개질 공장을 2년 다녔어요. 그 덕에 나중에 손뜨개 책도 냈다니까.” 배삼식 작가가 쓰고 남편 손진책이 연출해 국립극단 대표 레퍼토리가 된 연극 ‘3월의 눈’의 주인공 실향민 할아버지가 입는 털실 카디건도 김성녀가 그때 실력으로 직접 뜬 것이다.
◇두 독신주의자의 첫 만남 ‘한네의 승천’ 대본
1970년대 초 동생 김성애(72)와 함께 민요 ‘까투리 사냥’을 히트시킨 ‘비둘기 자매’로도 활동했던 그는 1976년 음악극 ‘한네의 승천’에서 덜컥 주연을 맡았다. “말 몇 마디 시켜보지도 않고 대본을 주면서 주인공을 하라는 거예요. 처음엔 사이비 극단인가 했다니까.” 훗날 국립극장장을 지내는 연출가 허규(1933~2000)가 대표로 있던 극단 ‘민예’의 작품. 젊은 연출가 손진책(77)의 데뷔작이었다.
“둘 다 독신주의였어요. 난 아버지 때문에 결혼은 지긋지긋했고, 손 연출은 연극과 결혼한 사람이었으니까. 근데 ‘큰 안목이 있어야 좋은 배우가 된다. 인접 예술을 이해해야 한다’면서 발레도 보여주고 박물관도 데려가더라고요. 여자 마음을 기막히게 알았던 아버지와 정반대였어요. 무심하고 배려할 줄도 모르길래 마음을 놨지. 근데 늘 군용 외투에 가방 하나뿐인 뒷모습이 그렇게 외로워보이더라고.”
6남매집 맏딸과 8남매집 장남은 만난 지 1년도 안 돼 결혼했고, 평생의 ‘공연 동지’가 됐다. 맏며느리 김성녀는 1년이면 12번씩 제사도 챙겼다. ‘멀티 플레이어’ 김성녀의 특기 목록에 음식 솜씨도 추가됐다.
◇모노드라마 ‘벽 속의 요정’ 20년 전 무대 의상
여전히 많은 사람이 김성녀를 마당놀이의 대모(代母)로 친근하게 기억하지만, 그가 걸어온 길은 그리 간단치 않다. 국립창극단(1978~1980)과 국립극단(1981~1984)에서 모두 단원으로 활동한 유일한 배우이자 소리꾼. 30대 중반에 시작한 공부로 교수 생활을 시작해 중앙대 국악대 학장(2007~2011)까지 지낸 예술 교육자이자, 국립창극단 예술감독(2012~2019)으로 지금 가장 뜨거운 공연 장르가 되기까지 ‘창극 르네상스’를 이끈 일등 공신이다. 최근 연극 ‘햄릿’의 왕비 거트루드 역할에 이어, 10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뮤지컬 모노드라마 ‘벽 속의 요정’(연출 손진책, 극본 배삼식) 20년 기념 공연을 진행 중이다.(건강상 이유로 5, 6일 공연은 취소) 김성녀는 2005년 초연 때의 날근날근한 의상을 반듯이 다려 간직하고 있다. 20년간 400회 가까이 공연하면서도 “한 번도 똑같은 무대가 없었다”고 할 만큼 애착이 큰 작품이다.
“돌아보면 한순간도 한 가지 일만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내가 ‘멀티 플레이어’가 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는지도 몰라요.” 이 무대 위에서 김성녀는 2시간 10분간 홀로 다섯 살 소녀부터 일흔 노인까지 남녀노소 1인 32역을 소화하며 12곡의 노래를 부른다. 그를 배우로서 반석에 올려준 ‘벽 속의 요정’은 어쩌면 김성녀 그 자체다.
◇전설의 무용가처럼… 뮤지컬 ‘최승희’ 사진
남편 손진책은 1986년 극단 미추를 만들었다. 전통극과 현대극, 뮤지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우리 민족적 정서를 다양한 형태의 극으로 표현하기 위한 작업이 이어졌다. 널리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마당놀이도 그런 미추의 작업 중 하나였다.
극단 미추는 2003년 일제강점기 전설적 무용가 최승희(1911~1969)의 이야기를 ‘뮤지컬 최승희’로 만들었다. 주인공 최승희 역할을 맡은 김성녀는 “참 많이 울면서 했던 작품”이라고 했다. “난 늘 자식들에게 미안한 엄마였거든요. 최승희에게도 딸이 있었어요. 무대 서는 엄마의 아픈 마음이 내 인생과 맞닿는 것 같았어요.”
최승희의 춤을 재현하기 위해 몸무게를 7㎏ 빼며 춤 연습에 매진했다. 그런데 남편 손진책 연출이 춤 장면을 빼겠다고 했다. “엄청 싸웠지. 그때 한국에 와 있던 독일 연출가가 1주일간 서로 말을 안 하는 걸 보고 ‘롱 타임 앵그리’ 하더라고, 하하.” 김성녀가 남편의 고집을 꺾었다. 당시 최승희로 분장한 김성녀의 사진은 지금도 집 안 잘 보이는 곳에 걸려 있다.
◇”엄마는 내게 DNA만 물려줬지만 딸에겐 자수장을”
박귀희, 김소희, 성창순, 오정숙, 한농선 등 전설적 판소리 명창과 명인들이 모두 그의 스승이었다. 김성녀는 “내 몸속에 흐르는 엄마 피 덕에 ‘딴 사람 10년 걸릴 것을 넌 3년이면 배운다’는 칭찬을 받았다”고 했다. “판소리 다섯 바탕을 다 인간문화재 분들께 배웠어요. 그 덕에 국악 교수를 하고, 부족하지만 창극단 감독도 해냈던 것 같아요.”
그의 집 현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자수장은 “어머니는 내게 DNA만 주셨지만, 나는 딸에게 뭔가 다른 걸 물려주고 싶어서” 직접 한땀 한땀 수놓아 만든 것이다. “2020년 여자 파우스트 역할로 국립극단 연극 ‘파우스트 엔딩’을 올리기 전, 연습하다 넘어져 어깨가 빠지고 팔이 부러졌어요. 시골에서 요양하는데 동네에 자수를 아주 잘 놓는 분이 있는 거야. 가만 있질 못하고 어깨와 팔에 고정대를 하고선 자수를 배웠지, 하하.”
돌이켜 보면 김성녀가 걸어온 길은, 척박한 땅에 꽃피운 우리 공연 예술의 역사가 그랬듯 무모한 도전의 연속이었다. “연극판에서도 국악계에서도 외면받던 마당놀이가 과분할 만큼 큰 사랑을 받게 됐죠. 극단 대표 마누라여서 못 하던 ‘벽 속의 요정’은 송승환씨가 제작을 맡아줘 내 작품이 됐고요. 국립창극단에선 동서양의 실험적 작품을 계속 올렸는데, 새롭게 젊은 관객이 몰리면서 매진 행렬이 시작됐어요.” 김성녀는 “닫힌 문을 끊임없이 두드렸고, 정성을 다하면 그때마다 늘 활짝 열렸던 것 같다”며 웃었다. “고생하고 노력하면 꽃이 피었고, 마무리가 늘 시작보다 더 좋았어요. 도전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줄곧 관객의 응원 덕이었고, 난 복받은 행운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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