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뿐인 정의에 지쳤나… ‘악한 영웅’에 빠진 2030

김광진 기자 2024. 11. 5.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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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惡 내세우는 무협 장르 인기
웹툰 ‘괴력난신’(왼쪽)과 ‘나노마신’의 표지. ‘악인’이 주인공인 두 작품은 한중월야 작가의 웹소설을 원작으로 그렸다. /네이버웹툰

시끌벅적한 중국의 한 저잣거리, 17세 소년이 손발이 묶인 채 관군들에게 호송되고 있다. “저놈이 낫 하나로 몇 사람이나 죽였는지 알면 깜짝 놀랄걸? 저놈 별명이 겸살귀(鎌殺鬼)야, 겸살귀.” 소년의 이름은 ‘정(正)’. 고아인 자신을 거둬준 할아버지가 바르게 살라는 의미로 지어줬지만, 본성은 본디 악(惡)이다. 할아버지가 괴한에게 피살당하자 이성의 끈을 놓은 채 낫 하나로 인근 마을의 관련 없는 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이 연쇄살인마 주인공의 등장이 인기 무협 만화 ‘괴력난신’의 시작이다. 같은 제목의 무협지(저자 한중월야)를 원작으로 했다.

성품이 뒤틀린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무협지가 주목받고 있다. 서사를 통해 서서히 악인으로 변하는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악한 본성을 갖고 태어나 인물의 주인공으로 내세워 인기를 끌고 있다. 정파(正派)에 속한 주인공들이 강호의 도리를 지키기 위해 중원을 평정하는 줄거리를 지닌 과거 정통 무협지와 전혀 다른 양상이다.

‘괴력난신’의 주인공 ‘목경운’이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며 상냥한(?) 표정으로 복수를 다짐하고 있다. /네이버웹툰

지난 3월 네이버웹툰에서 연재를 시작한 괴력난신은 연쇄살인마 주인공 ‘정’이 자신의 모습과 똑같은 귀족 가문의 공자 ‘목경운’을 죽이고, 그 이름으로 대신 살며 사악한 마신을 숭배하는 마교(魔敎)의 초대 교주로 성장하는 이야기. 괴력을 타고난 주인공은 살인에 즐거움을 느끼며 온갖 귀신을 부린다. 순정 만화 주인공 같은 외모를 갖췄지만, 사람 목을 아무렇지도 않게 꺾어버리는 ‘살인귀’다. 매주 화요일 새 작품이 올라올 때마다 “믿고 보는 살인귀” “앞으론 권악징선이다” 등의 댓글이 달리고 있다. 연재 7개월 만에 전체 화요 웹툰 중 3위, 무협 장르에서 1위를 기록했다. 네이버웹툰 자료에 따르면 20~30대 독자가 전체 연령의 63%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노마신’에서 주인공 ‘천여운’이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한 귀족 가문의 사람들을 모두 죽이라고 지시하는 장면. /네이버웹툰

같은 필자가 앞서 낸 무협지 ‘나노마신’에는 ‘천여운’이라는 악인이 나온다. 괴력난신의 목경운이 세운 마교의 후대 교주가 되기 위해 정적들을 제거하며 고군분투하는 내용. 목경운의 주특기가 목을 꺾는 것이었다면 여긴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의 팔을 자르는 것이 특기다. 2020년 연재를 시작해 작년 4월 시즌 2에 들어선 이 작품은 목요 웹툰 부문 2위, 무협 장르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이 작품 역시 2030 독자 비율이 64%에 달한다. 2021년부터 연재된 ‘광마회귀’는 제목 그대로 ‘미친 자’가 주인공으로 나와 말투가 마음에 안 든다고 사람의 입을 봉합시키는 등의 기행을 일삼는다.

누적 조회수 2억5000만회가 넘는 카카오페이지 웹소설 ‘무당기협’ 표지. /카카오엔터

누적 조회 수 2억5000만회가 넘는 카카오페이지 웹소설 ‘무당기협’(2020)과 ‘흑백무제’(2021), 네이버웹소설 ‘천마하라고 누가 칼 들고 협박함’(2023), 노벨피아 ‘이 무림의 미친X은 나야’(2023) 등 네이버웹툰 외 다른 플랫폼에서도 ‘악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무협 웹툰과 웹소설이 쏟아지고 있다. 이 작품들의 주인공은 잔인한 것뿐만 아니라 선악의 개념을 전복시켜, 음모와 모략을 통해 타인을 괴롭히는 악의 기질을 마음껏 보여준다.

‘강호의 도리’를 주창하던 무협 웹툰이나 웹소설에서 ‘일그러진 영웅’들이 주목받는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2030이 소비하는 웹툰·웹소설에서 기존과 다른 새로운 감수성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강호의 도리라는 추상적인 선(善)을 추구하기 위해 개인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전통적 사고방식이 젊은 세대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것. 웹툰 감상평으로 등장하는 “뻔한 정의는 이제 질린다”라든지, “참으면 호구 된다” 등의 댓글이 이를 대변한다. 하재근 대중문화 평론가는 “권선징악을 내세운 정통 무협지의 세계와 달리 생존을 위해 과감하게 악을 택하는 주인공들이 오히려 2030 독자들에게 공감을 일으키고 있다”며 “실제 현실에서는 충족할 수 없는 감수성을 영화나 드라마보다 표현이 자유로운 웹툰이나 웹소설을 통해 소비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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