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클럽] 판결문의 '그러나'

곽아람 기자 2024. 11. 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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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지옥판사/박신혜/SBS

SBS 드라마 ‘지옥에서 온 판사’가 지난 2일 종영했습니다.

최종회 시청률이 전국 11.9%를 기록했죠.

잘못을 저지른 벌로 인간 세상으로 온 지옥의 악마 재판관 유스티티아가

판사 강빛나의 몸에 들어가,

살인을 저지르고 피해자 유족에게 용서받지 못한 죄인에게 가벼운 형을 내려 풀어준 후,

피해자가 당한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죽여서 직접 지옥으로 보낸다는 이야기.

법관은 정의를 잃고, 사적 제재가 오히려 정의를 발휘하는 이야기에 대중이 열광한 건

그만큼 그간 사법부의 솜방망이 판결, 기계적인 양형에 국민들이 신물이 나 있다는 방증이겠죠.

피해자와 피해 유가족이 용서하지 않은 죄는 법 또한 용서하지 않습니다.

라는 강빛나 판사(배우 박신혜)의 대사가,

결국 이 드라마의 대주제이며 시청자들이 이 드라마에 빠져든 이유일 겁니다.

피고인의 ‘진지한 반성’이 양형 조건 중 감형 요소로 되어 있는데,

이를 토대로 피고인이 법원에 반성문을 내면

피해자 동의 없이 감형해 주는 일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판사는 신(神)이 아니라 인간일진대,

한낱 인간이 어찌 다른 인간이 진심으로 반성하였는지, 아니면 반성하는 척 하고 있는지를 가늠하겠습니까.

이는 부산돌려차기 피해자 김진주씨가 지난해 국감에 출석해 한 말과도 겹칩니다.

피해자가 용서하지 않겠다는데, 왜 판사가 마음대로 용서를 하겠다고 하는 겁니까. 재판부가 독심술사도 아닌데, 재판과 아무 관련 없는 (가해자의) 반성과 인정, 가난한 불우환경이 재판의 양형기준이 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피해자의 용서’라는 대주제는 강빛나가 연쇄살인범에게 하는 또 다른 말,

“사과는 의무지만 용서는 의무가 아니야”로 이어집니다.

이 드라마 뿐 아니라 ‘더 글로리’ 등 사적제재를 주제로 한 콘텐츠가 영화, 드라마 등에서 잇달아 나오는데

출판에서도 역시나 같은 현상이 감지된 것에 아이디어를 얻어 지난주 문학 특집을 마련했습니다.

공권력이나 법에 의지하지 않고 개인이 가해자 응징에 나서는 ‘사적 제재’를 소재로 한 소설이 연이어 나온다. 복수극이라는 익숙한 소재를 어떻게 비트느냐가 관건. 기시감이 느껴져도 이런 소설이 읽히는 이유는 현실에서 느끼는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일러스트=김성규

가해자는 내가 심판한다… 죄를 모르는 괴물에게 칼날을 겨누다

“판결문에서 ‘그러나’가 사안의 심각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다니…”

“정말요. ‘그러나’라는 말 뒤에 그런 내용이 따라올 날이 왔다니요.”

10월의 마지막날 밤, 반(反)성착취 활동가 원은지 ‘추적단 불꽃’ 대표의 인스타그램 라이브 방송 중

시청자들이 남긴 댓글입니다.

이날 원 대표는 ‘서울대 딥페이크’ 사건 주범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한 1심 재판부 판결문을 낭독했습니다.

2년간 텔레그램에 잠복하며 주범 검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원 대표는

전날 공판에 참석해 재판장이 읊는 판결문을 일일이 받아적었다고 합니다.

물론 낭독회에서는 피고인 개인 정보와 피해자가 입은 자세한 피해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판결문 내용을 들은 시청자들이

‘그러나’가 피해자 아닌 피고인에 유리한 양형사유를 배척하는 용도로 사용됐다는 사실에 놀라워한 건

피고인에게 기울어진 운동장인 형사 사법체계에 대한 우리 사회의 불신이 뿌리깊다는 방증이겠죠.

검찰이 10년을 구형했지만 피해자들은

“한국에서 (형량이) 얼마나 나오겠어…. 적게 나와도 실망하지 말자”며 서로를 다독였다고요.

이번 판결은 대중의 법감정과 법원의 판단이 드물게 일치한 사례입니다.

법감정은 군중심리일 뿐이라 사법부가 이에 영향받아선 안 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만,

과연 그렇기만 할까요?

박주영 에세이 '어떤 양형 이유'./모로

현직 판사 박주영의 에세이집 ‘어떤 양형 이유’(모로) 중 한 구절을 옮겨 봅니다.

사적제재를 키워드로 한 지난주 Books 문학특집과 함께 읽어보시길요.

‘힘 없는 정의는 무력하고,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다. 정의와 힘은 동시에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정의가 강해지거나 강한 것이 정의가 되어야 한다. 정의는 시비의 대상이 되기 쉬우나, 힘은 시비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정의는 강해지기 힘들다. 결국 강한 것이 정의가 되었다’는 파스칼의 말을 빌리면, 우리가 철석같이 믿는 법적 정의도 결국 강한 힘에 불과할 뿐이다. (…) 법감정은 단순히 격앙된 감정상태가 아니라, 힘이 약한 정의일 가능성이 높다. 들끓는 법감정은 곧 강해질 정의 아닐까?

곽아람 Books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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