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의 근미래의 풍경] AI 집사가 도와드립니다… 반반 결혼·엑셀 이혼

장강명 소설가 2024. 11. 4. 23:59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5회 #인공지능 집사
일러스트=이철원

기술이 인간의 삶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STS(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과학기술과 사회 연구) SF’라는 이름으로 소설을 써온 장강명 작가가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가 보게 될지도 모를 기묘한 풍경을 픽션으로 전달합니다.

‘반반 결혼’ ‘엑셀 이혼’이라는 말이 등장한 것은 2020년대 중반이었다. 부부 어느 한쪽이 자기 혼자 쓰려고 산 물건 값은 그 사람이 내자, 집안일도 누가 얼마나 더 많이 했는지 정확히 기록하자는 인식이 젊은 부부들 사이에 그즈음 퍼졌다. 소비, 가사, 육아까지 서로 부담한 부분을 엑셀에 기입하고 이혼할 때 그 자료를 근거 삼아 재산 분할을 했다. 이 새로운 풍습은 처음에는 싸늘한 비판을 받았지만 얼마 지나 상식이 되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한국의 대기업 네카팡은 재빠르게 자신들의 홈오토메이션 시스템인 ‘김집사’에 관련 기능을 도입했다. 그 가정의 구매 내역을 분석해 남편과 아내 중 어느 쪽이 더 많이 쓰는 물건인지 계량해서 수치화하는 기능이었다. 면도용 크림이나 생리대 같은 제품을 다른 부부는 공동 계좌에 있는 돈으로 샀는지 아니면 실제 쓰는 사람의 사비로 처리했는지 살필 수도 있었다. 이 기능 덕분에 김집사 이용자들 사이에서는 금세 ‘표준’이 만들어졌다. 그걸 집단 지성 또는 사회적 합의라고 부르는 이도 있었다. 김집사는 오래지 않아 지능형 자동차 운영 시스템과도 연결되었다. 명절 때 시댁에 가느라 쓴 휘발유 가격과 차량 감가상각비는 남편이, 처가에 가느라 든 비용은 아내 몫으로 분리할 수 있었다. 서로 얼굴 붉히며 펜을 들고 대차대조표를 작성할 필요가 없었다. 지능형 자동차에는 운전자가 누구인지 감지하는 센서가 있었으므로, 여행을 갈 때에는 운전을 맡은 사람의 노동 비용을 김집사가 자동으로 계산했다. 가전제품들이 사물인터넷과 연결되면서 자동차뿐 아니라 청소기, 싱크대, 주방, 화장실을 누가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김집사가 파악할 수 있게 됐다. 청소와 설거지, 요리를 누가 하는지, 얼마나 오랜 시간 그 일을 어떤 성의로 하는지도 김집사가 평가할 수 있게 됐다. 김집사는 집안일과 육아에 남편과 아내가 각각 얼마나 기여하는지도 계산할 수 있었다. 김집사는 한 달에 한 번 보고서를 만들었는데, 잘못 작성된 항목을 이용자가 지적하면 그걸 학습해서 이후의 정산에 반영했다. 네카팡에서는 김집사의 리포트를 읽고 토론하는 시간이 부부 관계를 더 건강하게 만든다는 내용으로 보도 자료도 만들고 광고도 내보냈다. 네카팡은 사회학자와 심리학자들의 연구도 후원했는데, 공교롭게도 그들의 연구에서는 김집사의 정산 기능을 사용하는 부부가 결혼 생활 만족도가 높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런 연구 결과와 이용자의 피드백을 모아 네카팡은 김집사에 부부 관계 조언 기능을 도입했다. 정작 김집사는 서로 싸우는 부부에게 더 유용한 도구인 듯했다. 그즈음부터 인터넷 게시판들에 김집사 보고서를 캡처한 이미지들이 올라왔다. ‘전업주부의 가사 기여도가 58%밖에 안 되는 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이렇게 육아를 안 하는 남자, 정상인가요?’ 같은 고발과 함께. 결혼 전에 가사 기여도를 숫자로 정해놓는 커플도 늘어났다. 급기야는 김집사가 서울시장 선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일어났다. 여당 후보의 딸이 ‘아버지가 밖에서는 페미니스트인 척하지만 집에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어머니를 부린다’고 폭로했다. 그러면서 부모 집의 김집사 리포트를 공개했는데 그 후보의 가사 기여도는 충격적이게도 2.1%였다. 사람들은 ‘재활용 쓰레기만 잘 버려도 저 정도는 나온다’며 혀를 내둘렀다. 이를 계기로 소셜미디어에 자기 집의 김집사 리포트를 올리는 정치인들이 생겨났다. 얼마 뒤 김집사 리포트 공개는 오피니언 리더 그룹에서 유행이 되었다. 네카팡은 김집사 리포트를 소셜미디어에 쉽게 올릴 수 있는 기능을 얼른 도입했다. 김집사 리포트를 시댁이나 처가에 매달 자동으로 보내는 기능도 함께. 김집사 리포트 공개를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가 무섭다며 투덜대는 사람도 있기는 했다. 그들은 그렇게 불평할 때 ‘가사 분담이 싫다는 게 절대 아니다’라는 변명을 덧붙여야 했다. 김집사는 시장에 나온 지 10년도 안 돼 수많은 가정의 풍경을 바꿨다. “세탁기 이후로 주부의 삶을 가장 크게 바꾼 발명품”이라는 찬사를 하는 이도 있었다. ‘기계한테 24시간 감시받으며 사는 것 같다’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할 때 김집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달 말까지 아이와 놀아주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지셔야겠어요”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네카팡 이메리 의장은 한 사회 포럼에서 ‘김집사가 바꾼 세상’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며 업무 평가 시스템 ‘김팀장’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사람들은 자율적으로 일하고 싶어 하는데, 회사는 ‘월급 루팡’이 생길 걸 걱정하죠. 김팀장은 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겁니다. 직원이 업무에 집중하는 시간과 그렇지 않은 시간을 정확히 파악해 줄 테니까요. 인사 고과나 연봉 협상에도 당연히 활용될 수 있고요. 김집사에 이어 김팀장이 세상을 한 번 더 바꿀 겁니다.”

△매일 조선일보에 실린 칼럼 5개가 담긴 뉴스레터를 받아보세요. 세상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91170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