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555] 황금빛 숫자 5를 보았네
1920년 어느 날 밤, 미국의 시인이자 의사였던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가 뉴욕시 9번가를 걷다 소방차의 엄청난 사이렌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봤다. 어둠을 가르는 가로등 불빛 아래로 새빨간 소방차가 지나가는데, 그 속도가 워낙 빠르고 거리가 가까워 차체가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고, 다만 황금빛 차량 번호 ‘No. 5′만이 큼직하게 시야에 들어왔다가 진한 잔상을 남기며 쏜살같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서 시인은 13행의 한 문장짜리 시를 지었다: ‘비와/ 불빛 가운데/ 나는 어두운 도시를 지나가는/ 강렬하게/ 움직이며/ 아무도 듣지 않는/ 징이 쨍그렁대고/ 사이렌이 울부짖고/ 바퀴들이 요란히 굴러가는/ 빨간/ 소방차 위에/ 황금빛/ 숫자 5를 보았네.’ 윌리엄스와 절친한 사이였던 화가 찰스 디머스(Charles Demuth·1883~1935)는 이 시를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고 이를 윌리엄스의 초상화라고 했다.
디머스는 어두운 배경을 사선으로 날카롭게 가르고 곳곳에 눈부시게 밝은 가로등과 환히 불을 밝힌 상점의 쇼윈도를 그려 넣어 화려한 도심의 밤기운을 표현했다. 그 가운데서 황금빛 숫자 ‘5′ 세 개가 마치 빠른 속도로 정면을 향해 돌진하듯 점점 크게 그려져 화면을 뒤덮었다. 나팔 모양 사이렌을 매달고 있는 새빨갛고 날카로운 형태는 거대한 소방차다. 숫자는 다가오고, 차량은 멀어지는 구성은 소방차가 지나간 뒤에도 요란한 사이렌이 메아리처럼 울리는 그 순간의 긴박함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뉴욕시의 소방차는 오늘날에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귀를 찢을 듯이 크고 위협적인 사이렌을 울리며 거침없이 달린다. 물론 세계 어디든 소방차가 출동하면 재빨리 길을 터주는 게 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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