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모든 기적이, 인간의 마음에 공명하는 자연의 위로였음을… [박미란의 속닥이는 그림들]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정신 등의 요소
시각적 형상과 촉각적 부피로서 변환
돌·나무 등 자연물 탁본의 소재로 취해
샤먼의 의복·무구 본 따 만든 종이 가면
태양빛 영상·심장박동 닮은 북소리 운율…
그만의 주술로 인간에게 치유를 제의
낮은 조도의 공간, 곳곳의 어둑한 자리로부터 묵직한 북소리가 새어 나온다. 낡은 뼈대를 고스란히 드러낸 옛 여관의 터가 거대한 동물의 심장처럼 박동한다. 그 몸속을 헤집듯 발걸음을 내딛는 동선 가운데 불현듯 부엉이 울음소리가 포개어진다. 청아한 울림으로 시작하여 음울한 진동으로 끝맺는 신묘한 짐승의 소리, 까만 밤의 어둠을 형형하게 응시하며 내뱉는 한숨 같은 울부짖음이 거듭 귀를 물들인다.
◆종이에 스민 정령들
미술의 언어를 경유하는 작업은 때로 무형의 영혼을 유형의 신체에 담아 내기를 시도하는 영매의 의식을 닮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과 정신 등의 요소를 시각적 형상과 촉각적 부피로서 변환하는 과정 속에서 이승애는 내밀한 마음과 외연적 세상을, 또한 재료의 근원과 화면의 시공을 거듭 연결짓는다. 오랜 기간 표현의 매체로서 다루어 온 흑연과 종이, 그리고 탁본의 소재로 취하여 온 돌과 나무가 서로 같은 자연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동일한 대지의 영혼을 지닌 존재들임을 깨닫는 일과 같이 말이다. 종이 옷을 입은 정령들은 짝 지어 크고 작은 화면 위에 자리 잡는다. 몇몇은 윤곽으로부터 탈출하여 여관의 벽면 위를 탐험한다.
옛 샤먼들이 초월적 상태에 도달하기 위하여 식물의 환각작용을 활용하였던 관습은 스스로 대자연의 탁본이 되고자 한 행위였는지 모른다. 식물의 독성으로 신체를 물들이고는, 신으로 하여금 낯익은 자손의 영혼을 알아보아 주기를 간청하는 염원의 몸짓이 아니었을까.
이곳의 땅 위에 숨쉬는 존재들은 모두 같은 태양을 본다. 동일한 별의 양분을 먹고 자라나 그것의 온기에 기대어 살아가는 대지의 덧없는 생명들은, 그러므로 서로가 서로의 닮은꼴이다. 여관의 내벽이 바래고 기둥이 닳기 전 여기에 짐을 풀었을 애젊은 얼굴들 또한 지금과 꼭 같은 태양빛을 쬐었을 것이다. 경복궁을 향하여 비스듬하게 난 소박한 창으로 머리를 내어 그날의 하늘을 보았을 테다.
바로 그 창가에 이승애의 또 다른 영상작품 ‘페이퍼 드레스’(2024)가 걸렸다. 사람의 몸을 닮은 흰 종이는 샤먼의 의복이자 무구를 본떠 오린 것이며 머리가 있을 자리에는 빛이 놓였다. 지나치게 눈부시지 않도록 널찍한 나뭇잎의 탁본을 길게 난 창문 위에 포개어 두었다. 숨쉬듯 생동하는 원형의 빛은 실제로 이승애가 날마다 촬영한 태양빛을 영상에 덧댄 것이다. 아마도 그로서 가능한 가장 커다란 자연의 탁본으로서 말이다. 따뜻하고도 뜨거운, 다정하게 온화한 한편 모질도록 가혹한 초월적 존재의 빛은 살아 있는 생명과 그렇지 않은 영혼들의 시간을 자신의 차원 안으로 통합시킨다. 그 앞에서 사람의 역사는 그저 아득한 넋이 된다.
여전히, 공간을 울리는 북소리의 운율은 살아 있는 생명의 심장박동을 닮았다. 수백 가지 소리 가운데 알맞은 것을 찾아내어 서로를 접붙인다는 설명이 샤먼의 종이가면을 연상시킨다. 기약 없는 공명을 위하여, 끝없이 목소리를 바꾸며 울부짖는 애처로운 영혼들을 상상한다. 셀 수 없이 많은 나무껍질을 탁본하고 오려내는 겸허하고도 지난한 몸짓 가운데 이승애의 마음 또한 그와 다르지 않았을 테다. 이미 오랜 옛날 터부시된 미신들을 되짚어 보며 식물에 물든 샤먼의 몸이 이윽고 계시에 도달하였음을 새삼 믿는다. 다만 동시에, 그것이 어떠한 낯선 우주가 아닌 우리의 세상에서 비롯되었을 것임을 짐작하여 본다. 그 모든 기적이 다름 아닌 인간의 마음에 공명하는 자연의 위로였을 것임을.
박미란 큐레이터, 미술이론 및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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