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으로부터 이어진 ‘공감의 다리’…아픔을 기억하는 ‘관문’이 되길[인스피아]

김지원 기자 2024. 11. 4.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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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신드롬 넘어‘노벨 문학상 읽기’
지난 10월16일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시민들이 노벨 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작품들을 둘러보고 있다. 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한강 수상에 재조명된 5·18과 4·3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등
혼란의 시대와 ‘연결고리’ 찾아
역대 노벨상 수상자들 작품에도
‘고통의 역사 경험하는 글’ 많아
알렉시예비치의 ‘아연 소년들’ 등
진실을 더 알고 싶게 하는 욕망 자극
잊혀가는 기억에 새 생명력 부여
‘몰랐던 이웃들의 역사’ 정독하기
독서의 계절에 도전해보면 어떨까

그간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으로 떠들썩했습니다. 며칠 새 100만권 가까이 팔리며, 오프라인 서점에도 한강 작가의 책을 구입하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서는 신기한 풍경이 벌어지기도 했죠.

저는 인터넷에서 노벨 문학상과 관련된 이런저런 기사를 보다가 우연히 역대 노벨 문학상 수상자 목록을 보게 되었는데요. 낯선 이름들이 절반을 훌쩍 넘어가는 수상자 목록을 곰곰 쳐다보다 보니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마주한 영광이 워낙 커서 깜빡 간과하기 쉬운 부분인데, 실은 노벨 문학상 수상작은 어쩌면 우리가 늘 봐오던 매대의 친숙한 문학 베스트셀러들, 고전 목록에 비교해 가장 ‘엉뚱하고 낯선’ 것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입니다.

왜냐면 노벨 문학상은 기본적으로 영미권 등 주요 선진국만이 아닌 ‘전 세계’ 작가를 대상으로 하며, 대중성만 기준으로 선정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보다도 생존 작가들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죠. 이를테면, 끊임없이 재번역본이 나와 잔뜩 팔리며 인기 순위 상위권을 차지해 우리에게도 친숙한 다자이 오사무나 프란츠 카프카, 호메로스 같은 작가들이 노벨 문학상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이번에 한 출판사에선 편집자들이 예상 후보로 앤 카슨, 찬쉐, 다와다 요코를 꼽았는데 - 평소 해외 문학에 꾸준히 관심을 가져온 독자가 아니라면 이름조차 생소할 가능성이 크고요. 심지어 2020년(루이스 글릭·미국)과 2021년(압둘라자크 구르나·탄자니아)에는 2년 연속으로 노벨 문학상 수상자의 작품 중 국내 번역된 작품이 ‘0권’이라 “어떤 출판사도 노벨 문학상 특수를 누리지 못하는” 웃픈 일이 벌어지기도 했죠.

‘노벨 문학상이 생각보다 별것 아니네’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의외의 낯섦에 주목해보는 것이 흥미롭지 않을까? 한 거죠.

우리는 노벨 문학상을 통해 우리가 죽을 때까지 단신 기사 아니면 전혀 관심이 없었을지도 모르는 낯선 나라의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고통을 당했고, 어떤 혼란을 겪어왔으며 또 그 고통이 우리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지구 반대편의 어떤 나라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전혀 관심도 없었을 나라지만, 그리고 그게 당연하지만 - 이번 한강 작가의 수상을 통해 공감의 다리가 놓이게 되었다고 볼 수 있고요.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을 계기로 실제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작가들 가운데, 다소 우리에겐 생소할 수 있는 나라의 작품을 직접 읽으며 ‘전혀 다른 사람들의 삶을, 슬쩍 상상해보기’에 대해 해찰해볼까 합니다.

압둘라자크 구르나(탄자니아·2021년 수상)의 <낙원>, 나기브 마푸즈(이집트·1988년 수상)의 <미라마르>,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벨라루스·2015년 수상)의 <아연 소년들> 등을 펼쳐보았습니다.

이집트·탄자니아의 역사: 모르는 채로 읽기

이집트에서 발생한 1952년 혁명에 대해 잘 아시나요? 혹은 잔지바르 1964년 혁명 당시 아랍, 인도계 민간인 수천명이 무참히 살해, 추방당한 사건에 대해 알고 계시나요? 아마도 해당 국가, 역사에 특별한 관심이 있지 않은 이상 잘 모르는 게 당연할 텐데요. 우리는 소설을 통해 한 사람의 시선에서 복잡한 고통과 삶을 느끼고 체험해볼 수 있습니다. 마치 그의 ‘몸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처럼 생생하게’요.

잔지바르 출신의 작가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낙원>, 그리고 이집트 작가 나기브 마푸즈의 <미라마르>는 다른 시기의, 다른 배경을 바탕으로 한 소설인데요.

우선 이 작품들을 모르시는 분들이 많으실 테니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낙원>은 19세기 동아프리카 지역을 배경으로 한 이야긴데요. 주인공 소년 ‘유수프’가 어릴 적 상단에 노예로 팔려 가면서 겪고, 본 일을 담담하게 그린 소설입니다. 아이의 시선으로 원주민, 노예 문제 등을 냉철하고 입체적으로 그려냈다는 평을 듣고 있는 작품이죠.

<미라마르>는 이집트의 한 펜션 이름인데요. 이곳을 배경으로 다섯명의 다양한 배경을 가진 숙박객들이 머무르는 동안의 일을 다섯명의 시선으로 그린 소설입니다.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1952년 혁명 이후 이집트의 정치 상황을 둘러싼 시선들이 폭넓게 드러납니다.

이 두 작품은 두 가지 느슨한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요. 자신이 처한 사회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를, ‘구호’가 아닌 ‘예술’로 승화해냈다는 점이죠.

일단 저의 독서 경험에 대해 말하자면, 저는 이 작품들을 몰입해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레터를 써야지’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머리를 붙잡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이 처한 구체적인 사회적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를 썼다는 건, 즉 이집트와 탄자니아의 단순한 정치 상황뿐 아니라 수백년에 걸친 오랜 통치 역사, 문화, 경제, 국제 관계, 계급, 사회적 정황을 입체적으로 촘촘하게 그려낸 이야기를 썼다는 뜻이고요. 이어 ‘구호’가 아닌 ‘예술’로 승화해냈다는 건, 곧 ‘한 줄 요약’ 불가능한 방식으로 모호하고 밀도 높게 그려냈다는 뜻이니까요. 이런 소설들은 아마도 ‘소설 할아버지’가 와도 쉽고 명쾌하게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할 겁니다. 특히나 짧은 레터에서는 소설의 줄거리뿐 아니라 각 국가의 상황 및 배경지식을 충분히 다루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걸 달리 생각해보면, 저는 ‘각 국가의 상황이나 배경지식’을 모르는 채로도 이 소설들을 읽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소설 속 인물들의 감정에 깊게 공감도 해볼 수 있었죠. 소설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낙원>은 작가인 압둘라자크 구르나가 살았던 시점보다 1세기 정도 이전의 시대적 배경을 가진 이야긴데요. 그렇다고 해서 저자와 완전히 관련 없는 이야기라고 할 순 없습니다.

실제 작가의 고향인 진자바르 지역은 수백년 동안 여러 외세의 침입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다양한 인종이 공존하며 살았지만 그만큼 갈등의 골도 깊었죠. 저자는 그곳에서 태어났지만 1964년 학살로 16세에 영국으로 도피해 거의 평생을 망명객으로 살아왔습니다. <낙원>은 어찌보면 1964년 학살의 근원을 추적해가려는 노력입니다. 과거 저자는 말했죠. “수천명이 학살당하고 모든 공동체가 축출되고 수백명이 감옥에 갇혔다. 이어진 유혈극과 박해 속에서 징벌적인 테러가 삶을 지배했다. 나는 그곳에서 떠나왔지만 마음속에서는 그곳에 산다….”

비록 이런 자세한 역사나 정황을 모르더라도, 자유에 대한 미련 자체를 잃고 그저 ‘소시민’으로서 비겁하고 무력하게 살아가는 동포들을 볼 때 주인공이 느낀 절망감은 ‘같은 인간’인 저에게도 사무쳤습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제가 이 책을 읽고 나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책 뒤에 실린 탄자니아 역사, 정치적 배경에 대한 해제를 꼼꼼하게 읽고 지금까지는 별 관심이 없던 탄자니아 역사에 대한 글을 인터넷에서 잔뜩 찾아보고 유튜브에서 다큐멘터리를 찾아보는 등 ‘더 알고 싶은 욕망’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름조차 잘 몰랐던 나라에 살던 사람의 이야기에 푹 빠져들어보고 - 또 그 나라의 고난에 대해 관심이 생기는 일은 좀처럼 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닌데 말이죠.

1952년 이집트 혁명 이후의 풍경을 그린 나기브 마푸즈의 <미라마르> 역시, 독자가 할 일은 그저 사람들의 이야기를 궁금해하고 따라가면서 ‘일단’ 읽는 것입니다. 이 작품 역시 직접적으로 이집트 혁명, 정치의 극적인 장면이나 학살, 고함, 아비규환의 현장을 그대로 드러내진 않습니다. 단지 복잡한 것을 복잡하게 다룰 뿐이죠. 하지만 우리는 극적인 폭력 장면이나 고발이 없더라도 맥락 속에서 자연스럽게 소설 속 인물들의 입장에 이입해, 그들의 복잡한 고민과 심정에 치밀하게 공감해볼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면 작중 한 인물은 국가 기관에 근무하면서 동료에게서 물건을 몰래 빼돌려 불법적으로 돈을 벌자는 권유를 받는데요. 동료는 그를 꼬드기며 말하죠. “합법적으로 성공하겠다는 건 헛된 생각이야. 가끔 승진을 하거나 보너스가 나오기도 하겠지. 하지만 그게 뭐야! 그걸론 아무것도 살 수 없어. 달걀 하나가 얼마지? […] 물가는 계속 오르는데 월급은 계속 줄어들고 있어. 그리고 인생은 흘러가고 있지….”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이야길 듣고서 혹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물론 저자가 이런 의견을 옹호하는 건 아닙니다. 저자는 소설 속 인물들 중 누구도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에게 보여줄 뿐입니다. 그들은 단지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요.

‘고통’을 다루는 복잡하고도 명료한 방법

소설에는 단지 ‘배경지식 없이도 쉽게 타인의 고통을 알 수 있다’는 차원의 의미만 있는 걸까요?

그보다도 ‘한 사람의 모습’이 오롯이 드러나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복잡한 현실을 ‘편들기’와 왜곡 없이 그대로 느껴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통상 어떤 기사를 읽을 때 ‘누구 편’인지, ‘제목(핵심 요약)’이 무엇인지 등을 생각하곤 하는데요. 기사에서 대체로 어떤 사람은 ‘파렴치한 민폐’거나 ‘범죄자’거나 ‘영웅’ ‘불쌍한 사람’이거나… 그렇죠. 우리는 우리가 짜맞추어놓은 틀에 맞춰 효율적으로 재빠르게 분노하거나 공감하거나 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선 대체로 사람은 복잡합니다.

영웅인 것 같았던 사람이 실제로는 사기꾼이기도 하고, 살인자이지만 동물을 사랑하고, 무례한 사람이지만 친절한 말 한마디에 자기를 희생할 정도로 남을 위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엔 대체 어디까지가 범죄인지 판단하기 어려워지기도 합니다. 좋은 소설은 ‘효율적인’ 판단을 유보하고 ‘한 사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죠. 이를 통해 현실을 제대로 보게 되고요.

독특하게도 저널리스트로서 2015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벨라루스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목소리-소설’이라는 장르를 개척한 사람으로 유명한데요. 어떤 문제에 연루된 수백명의 목소리를 그저 귀 기울여 듣고 그들의 ‘진짜’ 이야기를 끌어내는 방식의 조각보 같은 글쓰기죠. 그의 글이 구술 채록집과 다른 점은 그가 적극적으로 상대의 이야기를 끌어내고, 편집한다는 점입니다.

그의 작품에선, 항상 작은 사람들이 주인공입니다. 그는 “나는 흔적을 남기지 않은 사람들의 발자취를 좇는 역사가”라며 “역사를 사람의 크기로 작게 만드는 일”에만 매달린다고 말했죠. 제가 오늘 편지에서 마지막으로 함께 읽으려고 가져와 본 책은 그가 쓴 <아연 소년들>입니다.

이 책은 ‘거대한 실패’이자 ‘소련 몰락의 결정적 계기’로 꼽히는 소련-아프간 전쟁(1979~1989)에 참전했던 소련의 귀환 병사, 전사한 아들을 둔 어머니들의 짤막한 이야기를 나열한 책인데요. ‘아연 소년들’은 전사자들이 아연으로 된 관에 담겨 귀국했으며, 참전자 중 상당수가 앳된 소년병이었기 때문에 붙은 제목입니다.

저자가 이 책에서 듣는 것은, 전쟁에서 동료와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슬픔뿐 아니라 어떻게 해서 어린 소년들이 전쟁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파리 한 마리 못 잡던 사람이 전장에서는 ‘살인 기계’로 돌변하게 되는지, 전장에서 어떻게 치약으로 새해 축하 인사를 적고, 낙타에게 별 이유 없이 총을 갈기는지, 귀환한 병사들이 어떤 극심한 소외감, 박탈감을 느끼는지, 무엇보다도 왜 이런 살인이 계속 반복되는지… 등입니다.

아프간 전쟁에 참전했다가 두 다리를 잃은 박격포병은 “우정을 기대하며 그곳(아프간)으로 떠났”지만 “거기서 신병은 한낱 물건에 지나지 않았”다고 분통을 터뜨립니다. 하지만 그는 만약 아프간에 다시 가라면 또 가겠느냐는 물음에 “가겠다”고 단언하죠. 당시 소련 사회에서 병사들은 철저히 소외되었습니다. 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한 어머니는 꿈에서 자신의 아들을 닮은 아프간 소년병이 관에 담겨 있는 모습을 보고 잠시 망설이다가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춥니다. 처음엔 그 병사가 내 아들을 죽였다고 생각했지만 “이 아이”도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한 거잖아…라고 생각하면서요.

이런 이야기들은 분명히,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신문에서도 반대로 전쟁을 ‘영웅화’하는 목소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낯설고, 헷갈리고, 비효율적이고, 기분이 찝찝해지고 슬픈 이야기들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진실을 보여주는 작은 사람들의 이야기들인 것입니다.

맺음말

기억이 계속되기 위해선, 기억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새로’ 생겨야 합니다.

한강 작가는 이전에 5·18을 다룬 <소년이 온다>와 관련한 한 강연에서 “이 소설을 젊은 세대 어린 학생들이 읽어서 광주로 들어가는 관문이 될 수 있다면 ‘아 너무 좋겠다’(라고 생각했다). 꿈같은 일이지만…”이라고 말했었는데요.

여기서의 젊은 세대, 어린 학생이란 곧 5·18 이후에 태어나 직간접적인 경험이 전혀 없는 세대를 말하는 것이겠고요. 이처럼 어떤 일을 직접 겪거나 듣지 않아도, 새로 그 사건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야 그 역사는 딱딱한 기록에 갇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기억꾼’들에 의해 생명력을 얻어갑니다.

이는 꼭 같은 나라 사람들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이번 노벨 문학상 수상의 의의로, 5·18민주화운동과 4·3사건이 우리나라에 대해 전혀 몰랐던 사람들에게도 알려지고 역사가 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꼽힙니다. 실제로 각종 외신에서는 한강 작가의 수상 소식을 알리며 5·18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수록하기도 했고요.

요는, 어떤 역사적 사실이 대중적으로 널리 강렬하게 기억되는 데는 소설이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거죠.

이번 의미 있는 수상이 우리 사회에서도 ‘국뽕’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더 많은 이야기들이 꺼내어지고 이야기되는 기회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앞으로 세계의 사려 깊은 독자들이 한강의 작품을 통해 5·18과 4·3을 자신의 고통으로 감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타국의 고통에 더 신경을 쓰고 연대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한강 작가의 말처럼,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현재진행형의 고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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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원 기자 deepdeep@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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