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황 칼럼] 과연 회색지대는 가능할까
북한군 파병 대응 놓고 극단 분열 조짐
대통령, 일방주의 대신 안보협조 얻어야
“전쟁 없이 평화를 가져왔다.” 1938년 나치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앞두고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독일 뮌헨에서 아돌프 히틀러와 협상한 뒤 평화협정 문서를 들고 다우닝가 창가에서 군중에게 외친 말이다. 실은 인류사 최악의 전쟁인 2차 세계대전의 서막이었다.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라는 1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결과에 지쳤던 영국 등 전승국은 20년의 전간기 동안 칼을 갈았던 독일의 변화를 애써 외면했다. 독일을 무장해제시킨 베르사유조약이 나치 독일의 도발적 무력화로 휴지 조각이 될 때까지 1차 대전 전승국들은 행동하지 않았다. 체코가 무혈 점령되고, 폴란드가 침공당할 때까지 그랬다. 협상으로 평화를 얻고자 했던 유화정책 실패로 거론되는 대표 사례가 히틀러와 가진 체임벌린의 평화 담판이다. 재야 시절부터 대독일 강경론을 편 윈스턴 처칠이 2차 세계대전을 ‘불필요한 전쟁’이라 불렀던 이유도 히틀러에 대한 오판과 전쟁을 피하기 위한 전승국의 대응실패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느 시대나 전쟁을 놓고 주전, 주화론으로 갈리기 마련이지만 2차 대전 전개과정은 평화협상의 한계를 드러낸다. 상대의 본질이 문제였다. 어찌 보면 민족 동질성을 이유로 체코 주데텐 양도를 협박한 히틀러가 그랬듯이 2014년 푸틴의 크림반도 점령과 합병 또한 다르지 않다. 관망하듯 했던 서방의 대응은 지금의 우크라이나 전쟁을 잉태했다고 볼 수 있다. 과연 푸틴이 요구하는 대로 현 지점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한다 한들 우크라이나 국토 20% 이상을 차지한 러시아가 만족할 것인가. "24시간 내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의 말이지만 팽창과 완충지대에 대한 집착을 갖고 있는 러시아 제국의 본질을 감안한다면 어설픈 평화의 위험성은 크다.
물론 트럼프가 당선된다 하더라도 그의 호언장담이 쉽게 이뤄질지 미지수다. 항공모함을 쾌속정 다루듯 할 수 없는 것처럼 2년 넘게 이어진 서방의 우크라이나 지원 방향을 180도 돌리는 건 무리다. 이번 전쟁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탓이라는 인식에 비춰 러시아 쪽에 기울 수밖에 없는 그의 평화 제안은 미국 내외의 격렬한 반발과 국제적 혼란을 부를 수밖에 없다.
여기에 신냉전에 편승한 김정은의 북한군 파병 도박은 미 대선 결과와 상관없이 우크라이나 전쟁 양상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러시아를 겨냥한 장거리미사일 지원 배제 등 제한적 전쟁의 틀에서 우크라이나를 지원했던 나토로선 전략을 재검토할 수 있는 사정 변화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올 초부터 지상군 파견을 주장해왔던 터다. 간접적 국제전을 치르는 상황에서 북한군 참전으로 판도라 상자가 열렸다. 특수부대를 필두로 한 북한군이 기고만장해질지, 초라한 전투역량을 드러낼지 향후 전황은 예측불허다.
문제는 러시아의 북한에 대한 첨단군사기술 전수 등 직접적 안보 위협에 직면한 우리다. 미 대선 결과나 북한군 참전 양상에 따라 더 많은 역할을 요구하는 서방 압력도 높아질 것이다. 외신은 북한군 파병을 두고 유럽과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아우르는 글로벌 분쟁 확대 위험을 우려하는 지경이다. 과연 우리에게 회색지대가 가능하기는 할까.
해외파병, 조약 비준 등 일부를 제외하곤 국회 간섭을 벗어난 대통령의 외치 재량권이 폭넓다고는 하나, 일방주의와 불통주의는 위태롭다. 북러를 향한 섣부른 견제구 대신 절제된 대응이 요구된다. 정부의 전황분석팀 파견 검토 등에 '남의 나라 전쟁' 등 날 선 반응을 던지는 야당 자세만 봐도 극단적 분열 조짐이 농후하다. 안보 위기 파고 앞에 야당에 협조를 구하고, 국론을 모으는 지혜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허약한 정권이라면 더 그래야 한다.
정진황 논설위원 jhch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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