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나는 이봉주

박일근 2024. 11. 4.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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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그는 결국 지난달 제3회 천안이봉주마라톤대회에서 '나는 이봉주, 당신과 함께 하는 마라톤, 모두의 페이스메이커로'라는 문구의 옷을 입고 5,000여 명의 참가자들과 함께 5km를 뛰는 데 성공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해야 한다는 걸 이봉주는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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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가 지난 9월 경기 화성시 반월체육센터에서 목과 등을 꼿꼿이 편 채 포즈를 취하고 있다. 화성=박시몬 기자

원래 축구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농사를 짓는 부모님께 축구화를 사 달라고 조를 순 없다는 걸 3남2녀의 막내는 잘 알고 있었다. 가장 돈이 안 드는 달리기를 골라 천안농고 육상부로 들어갔다. 1학년 때 두각을 보이자 삽교고에서 학비 면제를 제안했다. 단 다시 1학년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고생하는 부모님을 생각하며 1년을 꿇었다. 그렇게 재입학한 삽교고였지만 갑자기 육상부가 해체되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 육상부가 있는 홍성의 광천고로 옮겼다. 3학년 때 전국체전 10㎞에서 3위에 오르며 관동대를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서울시청을 택했다. 돈도 벌고 야간대도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스무 살인 1990년 전국체전에서 처음으로 마라톤 풀코스에 나가 2위를 차지했다. 그가 바로 ‘봉달이’ 이봉주다.

□ 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땄다. 마음고생이 컸던 ‘코오롱 사태’에도 불구하고 2000년엔 도쿄마라톤에서 2시간7분20초로 한국 최고 기록(지금도 깨지지 않았다)을 세웠다. 2009년 서울국제마라톤까지 무려 41번의 풀코스를 뛰었다. 그보다 빠른 선수는 있었지만 그만큼 긴 거리를 완주한 마라토너는 없었다.

□ 너무 많이 달린 탓일까. 2020년 ‘근육긴장이상증’이라는 희소병에 걸려 목이 90도로 꺾이고 등도 펼 수 없게 됐다. 뛰긴커녕 걷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그는 주저앉지 않았다. 척추 낭종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은 뒤 걷기, 등산, 수영 등을 번갈아 하면서 재활에 힘썼다. 아내가 헌신적으로 도왔다. 그는 결국 지난달 제3회 천안이봉주마라톤대회에서 ‘나는 이봉주, 당신과 함께 하는 마라톤, 모두의 페이스메이커로’라는 문구의 옷을 입고 5,000여 명의 참가자들과 함께 5km를 뛰는 데 성공했다.

□ 우린 모두 마라톤이라는 인생을 달린다. 평탄한 길만 이어지면 좋으련만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된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해야 한다는 걸 이봉주는 보여주고 있다. 이봉주가 국민 모두의 페이스메이커로 함께 뛰는 한 두려울 것도 없다. 우린 모두 이봉주이고, 누군가의 페이스메이커가 될 수도 있다. 5,000만 명의 이봉주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박일근 논설위원 ik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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