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류업” 구호만 외치는 국장…대주주 이익 앞에 개미는 없다
주주 이익 고려 없는 결정에 식어가는 K-증시
(시사저널=허인회 기자)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증시 저평가) 해소를 위해 정부가 시작한 밸류업 프로그램이 좀처럼 기지개를 펴지 못하고 있다. 잇단 밸류업 공시에도 국내 증시는 답보 상태에 빠져 있는 상황이다. 국내 증시가 반등하지 못하는 이유에는 두산, 고려아연 등 일부 기업들이 개인투자자들에게 불리한 불공정한 조치들을 잇달아 꺼내들며 자본시장의 신뢰가 쌓이지 않는 데에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4일 금융권에 따르면, 이날 서울 여의도 콘래드 그랜드블룸에서 열린 '코리아 캐피탈 마켓 콘퍼런스 2024'에 축사자로 나선 김병환 금융위원장은 "국내 증시의 부진에 정책을 담당하는 한 사람으로서 안타깝고 마음도 무겁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국내 증시의 성과가 해외에 비해 부진한 평가를 받고 있다"며 "국내 투자자들의 해외 주식시장 직접 투자 비중이 확대되는 상황"이라며 안타까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실제로 한국거래소가 지난 9월30일 발표한 밸류업 지수는 지난 1일 980.86을 기록하는 등 1000선 안팎에 등락을 거듭하고 있다. 지수 발표 첫날 시가인 1023.16에 좀처럼 다가서지 못하는 모습이다. 밸류업 지수는 자본 효율성, 주주가치 제고 성과 등 우수 밸류업 기업 100개사를 선정해 마련한 지수다.
정부의 독려 속에서 기업들의 밸류업 공시가 이어지고 있지만 국내 증시가 살아나지 못하는 이유에는 개인투자자들의 이익을 저해하는 기업들의 결정에 대해 실망감이 누적된 결과라는 지적이다.
MBK파트너스-영풍 연합(MBK-연합)과 경영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고려아연은 지난달 30일 전격적으로 2조5000억원 규모의 대규모 유상증자를 발표했다. MBK-영풍 측의 지분율을 희석시키기 위한 조치로 해석되지만 시장에 안긴 충격은 컸다. 유증 발표 이후 주가는 하한가로 직행했고, 이튿날 주가는 고점(154만 3000원) 대비 35.53% 급락했다.
방식도 논란이다. 일반공모 증자를 실시한다고 밝힌 고려아연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일반공모 유상증자를 통해 '국민기업'으로 도약을 추진할 것"이라며 "소액주주와 기관투자자, 일반 국민 등 다양한 투자자가 주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소유 분산을 통한 기업 경영의 투명성을 강화하겠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주주 배정이 아닌 유증 방식에 기존 주주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주주배정 방식은 기존 주주들에게 보유지분에 비례한 우선청약권을 준다. 유증 참여 계획이 없는 기존 주주들은 신주인수권증서를 매각해 현금을 받을 수도 있다. 반면 일반공모 방식의 경우 기존주주들에게 우선권이 주어지지 않는다. 기존 주주들의 주식가치 훼손이 큰 편이다. 이에 시장에선 MBK-영풍 측의 지분율 희석에만 집중해 기존 주주들의 이익을 도외시한 결정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한국기업 부정적 인식 키울 것"
발행가액도 논란이다. 자사주 공개매수가(89만원)보다도 24% 가량 저렴한 주당 67만원을 신주 발행가액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통상 유증 신주 발행가액이 낮은 경우, 기업의 자금 조달 불확실성의 신호로 읽혀 주가엔 악재로 작용한다. 아울러 증자로 조달하는 2조5000억원 중 2조3000억원(92%)을 채무상환에 쓰겠다고 밝힌 것과 관련해서도 주주들 돈으로 빚을 갚는 증자라는 비난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차입을 통해 89만원에 자사주를 매입하고, 유상증자를 통해 67만원에 주식을 발행하는 행위는 자해 전략"이라며 "회사의 주인이 전체 주주라고 생각한다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발상"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국제금융시장에서 한국기업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키울 것이라는 걱정이 앞선다"고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두산그룹은 지난 7월 투자자들의 반발을 사는 사업구조 개편안을 발표한 바 있다. 1조원 이상의 영업이익을 올리는 두산밥캣의 가치를 낮게 평가해 대주주만을 위한 개편이라는 지적이 나왔기 때문이다. 개미의 반발에 금융당국까지 제동을 걸고 나서자 합병을 연기했던 두산은 지난달 21일 합병비율을 상향 조정하며 재추진에 나선 상황이다.
기존 주주들의 이익 극대화가 아닌 대주주의 경영권과 지분율 확대에 열을 올리는 동안 국내 증시에 대한 관심은 식어가고 있다. 증시 대기성 자금인 투자자 예탁금은 지난달 30일 기준 49조5973억원으로 집계됐다. 투자자 예탁금이 50조원 아래로 떨어진 것은 지난 1월26일(49조649억원) 이후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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