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들의 무덤’ ‘핑크 치킨’…스토리에 기후변화 생존법 있다
“일론 마스크의 스페이스에스가 재모집하는 ‘화성 이주단’에 지원하려고 합니다. 지난번 로켓 폭발 사고는 잘 압니다. 하지만 벌어둔 돈도 없고 비정규직에 ‘이생망’인 저에게는 곧 다가올 인류 멸종과 대재앙을 피할 가장 효율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반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서울에서 사는 20대 이생망
“유언비어 현상은 근거 없는 말이 퍼져 생기지만, 그럴 만한 사회적 연유가 있어서 나타나기도 하지. 현명한 사람이라면 묵묵히 관찰해 그 연유를 파헤쳐야 하네. 그게 바로 우리 엉망진…”
“또, 폼 잡고 말하시는군요.”
장황하게 이어지는 엉망진창 행성 조사반의 홈스 반장의 말을 왓슨 요원이 끊었습니다.
집회를 구경하고 숙소로 돌아가는데, 한 남성이 핑크 닭을 품에 안고 가는 게 보였습니다. 홈스와 왓슨은 직업적 본능으로 그를 따라갔죠. 큰길에서 벗어나 골목에 들어간 남성은 시야를 살피더니 핑크닭을 골목길에 놔두었습니다. 그리곤 빠른 걸음으로 큰길로 나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화물트럭에 탔어요.
화물트럭의 짐칸에서는 닭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가림막 때문에 안 보였지만, 아마도 많은 수의 핑크 닭을 싣고 있는 것 같았어요. 예상했던 대로 남성은 다시 핑크 닭 한 마리를 꺼내더니, 다시 한적한 골목에 풀어놓았습니다.
홈스와 왓슨은 택시를 타고 남성의 뒤를 쫓았죠. 핑크 닭 뿌려놓기 작업을 다 마친 화물트럭은 다카 시내를 빠져나가 동남쪽으로 향하는 국도를 탔어요. 홈스와 왓슨도 자동차와 릭샤 그리고 소들로 어수선한 도로를 7시간 이상 달렸죠.
핑크 닭을 실어나른 화물트럭이 도착한 곳은 방글라데시 제2의 도시 치타공에 있는 ‘배들의 무덤’이었어요. 세계 각국에서 폐기한 선박을 가져와 해체한 뒤, 철골과 철제 자재는 물론 배 안에 들어가는 구명정, 가구, 냉장고, 변기까지 시장에 내다파는 곳이죠.
화물트럭은 아직 해제하지 않은 낡은 유조선에 들어갔습니다. 홈스와 왓슨도 택시에서 내려 유조선에 걸어 올라갔죠. 갑판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왓슨이 무언가 발견했다는 듯 속삭였죠.
“반장님! 저기 유류 저장고로 내려가는 사다리가 있어요.”
사다리를 내려가는데, 기름내가 아닌 노린내가 확 풍겼어요. 운동장 서너 개가 들어가고도 남음직한 넓은 빈 공간이 나타났죠. 거기에는 족히 수만 마리가 되는 핑크 닭들이 있었죠. 벽면에 세워진 작업대에는 핑크색 물감통과 붓이 보였고요.
“아이고!”
홈스가 그만 발을 헛디뎌 사다리에서 미끄러지고 말았어요.
혹등고래의 노래가 들리다
“여기에는 무슨 일로 왔죠?”
바닥에 떨어진 홈스 앞으로 핑크 닭 모양의 인형 탈을 쓴 사람이 다가왔어요. 몰래 따라오다 들킨 것에 대해 겸연쩍어하며 왓슨이 대답했어요.
“저희는 기후위기를 조사하는 엉망진창 행성 조사반입니다. 핑크색 깃털을 가진 닭을 보고 신기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엉덩방아를 세게 찧어 정신이 없었던, 홈스는 그만 이실직고하고 말았어요.
“도시에 떠도는 소문이 궁금해서 왔습니다. 기후변화를 막으려는 선진국과 모종의 조직이 육류 소비를 줄이기 위해 일부러 유전자를 조작한 핑크 닭을 퍼뜨린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사람들이 미국과 여러 나라 대사관에 모여서 항의 시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닭 인형 탈을 쓴 사람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죠.
“맞소.”
홈스가 반박했습니다.
“그런데, 유전자 조작을 통해 핑크색 깃털과 핑크색 뼈, 핑크색 단백질을 만드는 게 가능한가요? 쉽지 않을 거 같은데요.”
“그렇소.”
왓슨이 갑갑하다는 듯 물었어요.
“그러니까, 핑크 닭을 만들 수 있다는 거예요? 아니예요?”
“만들 수 있기도 하고, 만들 수 없기도 하고.”
닭 인형 탈은 선문답하듯 대답했어요. 왓슨이 푹 찔렀죠.
“핑크 닭은 가짜 맞죠? 저기 작업대에 있는 물감통과 붓은 뭡니까?”
닭 인형 탈이 말했습니다.
“핑크 닭은 진짜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진짜 이야기죠.”
“일론 마스크 취재하러 간 핫다큐와 고난도 일이야말로 정말 필요한 이야기겠군.”
왓슨이 비아냥거렸습니다. 닭 인형 탈은 아랑곳 않고 계속 말했고요.
“기후변화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항상 숫자를 내세우거나 기술이 해결해준다거나 아니면 잔뜩 공포감을 자아내는 이야기를 합니다. ‘1.5도’, ‘2050년 탄소중립’, ‘탄소 포집’, ‘인류 멸종’ 같은 단어들 말입니다. 기자와 피디, 작가들은 매너리즘에 빠져 있죠. 어느 날 갑자기 지구에 대재앙이 닥치거나 인류가 멸종한다는 이야기 아니면 기술이 우리를 구원해 줄 것이라는 근거 없이 자신감에 찬 이야기 말입니다.”
“갈수록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군요.”
왓슨이 고래를 절레절레 흔들자, 심각한 표정을 짓던 홈스가 물었습니다.
“그럼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거죠?”
“그게 정 궁금하면, 새로운 이야기의 문에 가보시오. 그 문을 열면 당신이 질문한 문제의 답이 펼쳐질 것이오.”
왓슨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새로운 이야기의 문이요? 갈수록 태산이군. 그래. 도대체 그 문이란 게 어디 있습니까?”
“그 문 뒤의 세계는 새로운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온실가스 농도와 온도 상승 시나리오로 구체적인 삶을 소거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 달 만에 빙하기가 온다는 ‘투모로우’ 같은 할리우드 영화도 아니죠. 일상의 세계이자, 구체의 세계, 각각의 삶이 펼쳐진 세계입니다.”
홈스는 조금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듯 했어요.
“우리가 지금까지 기후변화에 관해 해왔던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요?”
“테라폴리스라는 세계입니다. 삼차원이 아닌 모든 차원이 펼쳐질 수 있는 가능성 있는 세계, n-차원의 공간이죠. 거기에는 ‘크리터’라는 존재들이 삽니다. 사람, 동물, 식물이 사는 혼종의 공간이죠. 인간이 주인공이 아닙니다. 삼차원에서 은폐되었던 복수 종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곳이죠. 인간은 다른 종과 동등한 존재가 되고, 동등한 존재와 함께 이야기는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 전혀 다른 세계를 만듭니다. 그 세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바로 우리에게 닥친 거대한 위기에서 살아가는 법을 알려줍니다.”
홈스와 왓슨은 수만 마리의 핑크 닭을 뒤로 하고 갑판 위로 올라왔어요. 갑판에서 바라 본 ‘배들의 무덤’은 뿌연 미세먼지로 가득 차, 마치 흑백 SF 영화의 한 장면 같았죠.
둘은 녹슨 화물 컨테이너선에서 내려와 시내 쪽으로 걷기 시작했어요. 철골 자르는 소리, 무언가 펑 터지는 소리, 쿵 떨어지는 소리가 불규칙적으로 이어지면 귀청을 찢는 것 같았어요. 그 사이로 희미하게 혹등고래의 노래가 흘러나왔어요. 잠깐 귀를 기울이던 왓슨은 ‘잘못 들었군’ 하며 발걸음을 재촉했지요.
배들의 무덤을 빠져나온 홈스와 왓슨은 닭 인형 탈이 건넨 종이 쪽지를 펼쳤어요. 새로운 이야기의 문에 가는 방법이라고 적어 준 거였어요.
‘치타공 공항에서 오세아니아 815편, GNS(The Gate of New stories·새로운 이야기의 문) 행을 탈 것.’
치타공 공항은 2층짜리 단출한 건물이었습니다. 증축 공사를 하는지 중장비와 건설 노동자들로 어수선했어요. 하지만 운항 스케줄을 뒤져봐도, 공항 직원에게 물어봐도 오세아니아 815편은 없었어요.
왓슨은 유언비어나 퍼뜨리는 협잡꾼들에게 속았다며 분개했죠.
“닭대가리 같은 놈들, 우리도 속인 거라고요.”
한참 눈을 감고 생각하던 홈스가 무언가 발견했다는 듯 눈을 번쩍 떴어요.
“잠깐, 오세아니아 815편은 3층에서 출발하지 않을까?”
“무슨 소리예요? 반장님, 정신 차리세요. 이 공항은 2층짜리에요. 새로운 층을 만들기 위해 공사 중… 잠깐만! 1층은 퍼스트 스토리, 2층은 세컨드 스토리, 지금 공사 중인 층은 뉴 스토리!”
홈스와 왓슨은 공사를 위해 설치된 가림막을 열고, 계단을 뛰어 올라갔어요. 3층에는 회반죽이 담긴 통, 먼지를 뒤집어쓴 목재만 널브러져 있었죠. 그때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어요.
“파이널 콜, 파이널 콜! 새로운 이야기의 문에 가시는 승객들은 동편 게이트로 오시길 바랍니다.”
홈스와 왓슨은 동쪽으로 달려갔어요. 오세아니아 815편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둘은 황급히 게이트를 뛰어넘었어요.
새로운 세계에 진입하다
‘꼬끼오’
고급 호텔이 바닷가에 모여있는 미국령 괌의 투먼 비치. 잠이 깬 왓슨이 시계를 보니 아침 6시였어요. 왓슨은 옆에서 자고 있던 홈스를 깨웠습니다.
“금방 들으셨어요? 수탉 우는 소리 같은데요?”
“꿈꿨나? 이런 도시에 무슨 닭이 있다고.”
‘꼬끼오’ … ‘꼬끼오’
둘은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고 닭을 찾아 나섰어요.
*스웨덴 예술집단 ‘논휴먼 넌센스’가 인류세(인간으로 인해 지구의 물리·화학적 시스템이 바뀌어 만들어진 새로운 지질시대)를 비판하기 위해 닭을 핑크색으로 염색한 예술작품을 선보인 ‘핑크 치킨 프로젝트’를 바탕으로 했습니다.
남종영 환경저널리스트·기후변화와동물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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