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로 쫓겨날까, 돈벼락 맞을까…‘그린벨트 해제’에 울고 웃는 주민들
“자식 물려준다”는 소유주, “갈 데 없다”는 임차인…이행강제금 내며 버티기도
(시사저널=강윤서·정윤경 기자)
"서울 한복판에 이만한 경관이 어딨어요. 새 소리부터 다르잖아요. 여기 그린벨트가 해제되면 저희 같은 임차인들은 갈 데가 없죠. 이미 세곡동에서도 농사짓다가 한 번 쫓겨났는데…."
서울 강남구 내곡동에서 10여 년째 농사를 지어온 한 부부는 농지가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 해제 구역에 포함될지 모른다는 소식에 참담함을 드러냈다. 부부의 생계가 달렸다는 내곡동 일대는 정부의 8·8 부동산 대책에 따라 유력한 그린벨트 해제 지역으로 꼽힌다. 이곳은 서울이라곤 믿기 힘든 풍경과 깨끗한 공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산으로 둘러싸인 초록빛 농지 주변엔 건축물이라곤 비닐하우스밖에 보이지 않았다.
시사저널은 오는 11월 그린벨트 해제 지역 발표를 앞두고 10월25~27일 서초구 내곡동과 강남구 세곡동 일대를 돌며 토지 소유주와 임차인 등 주민들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특히 내곡동·세곡동 전체에서 2000년대 이후 매매된 개인 소유지 중 면적과 공시지가가 높은 상위 10곳을 각각 찾았다. 단 아파트 등이 있거나 건축이 가능한 대지(垈地·지목이 '대'인 토지)와 산지는 제외했다.
언젠가 개발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땅을 매입한 이들은 벼락부자를 꿈꾸고 있었다. 그린벨트 지역에 불법으로 건축물을 세우는 등의 정황도 포착됐다. 소유주와는 달리 한순간에 일터에서 쫓겨날 처지에 놓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임차인들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과태료 내도 땅 지켜야"…이유는 '집값'
소유주들은 자식에게 유산을 물려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들떠 있었다. 내곡동 서초포레스타 아파트 단지 건너편 일대 농지를 소유한 박아무개씨(60)는 "그린벨트가 하루빨리 해제됐으면 좋겠지"라며 반색했다. 박씨는 "여기 땅 소유주들은 부모한테 유산으로 받았거나 수익을 노리고 투자한 사람 등 각양각색"이라며 "만약 (그린벨트 해제로) 땅이 수용되면 그 돈을 받아 좋은 아파트로 갈 수도 있고, 자녀들한테 물려줄 현금도 생기니까 다들 기대 중"이라고 말했다.
과태료를 내면서까지 그린벨트 지역을 지키는 이들도 있었다. 현행법상 그린벨트 지역에 허가나 신고 없이 건축을 하면 이행강제금 부과 또는 고발 등의 조치가 이뤄진다. 40년째 대대손손 세곡동의 한 주택 부지를 물려받아온 김재호씨(가명·40대)는 부엌 확장을 위해 그린벨트 약 7평을 이용했다고 한다. 김씨 어머니는 "부엌을 늘리고 나서부턴 1년에 150만원씩 이행강제금을 낸 게 한 5년쯤 됐을 것"이라며 "세금은 세금대로 내고 과태료도 내니까 완전 골칫거리"라고 볼멘소리를 했다.
그럼에도 땅을 팔지 않는 이유는 그린벨트가 해제됐을 때 누릴 수 있는 막대한 시세차익 때문이라고 한다. 김씨 어머니는 "(그린벨트가 풀리면) 여태 물던 과태료 더 안 내도 되잖아. 또 집 층수를 4층으로 높이거나, 평수를 넓힐 수도 있으니 너무 좋겠지"라면서 "집값도 오를 텐데 아예 이 땅을 팔고 다른 곳에 건물을 짓는 생각도 해볼 수 있겠네"라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반면 임차인들은 하루아침에 쫓겨날 수 있다며 불안해했다. 세곡동 일대 비닐하우스에서 13년간 근조화환을 만들어온 정호일씨(가명·50대)는 "여기서 오래 일한 사람은 40년도 넘게 있었지"라며 "여기가 삶의 터전인데 쫓겨나면 더 갈 데도 없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바로 옆 서울공항 때문에 소음도 심하고 고도 제한도 있어서 (그린벨트가) 안 풀릴 것 같긴 한데 집주인들은 자녀들한테 물려주고 싶을 테니 내심 기대하는 모양"이라고 덧붙였다.
박물관도 위기…"최소한의 시설 허용해야"
정권 때마다 반복되는 그린벨트 해제 소식에 지친 기색을 드러내는 주민들도 있었다. 특히 서울공항과 붙어있는 세곡동 일대는 수십 년 전부터 그린벨트 해제 소문만 돌다 끝나면서 이번에도 '남의일'이라는 분위기다.
토지 전문 공인중개사무소를 운영하는 유아무개씨(63)는 '최근 들어 땅을 보러 오는 사람이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살 사람은 이미 다 샀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곤 퉁명스럽게 이렇게 말했다. "그린벨트가 해제된다 해도 내곡동이나 염곡동, 서초동이 해당되겠지. 세곡동은 공항 때문에 마땅히 해제할 곳이 없어요. 이명박(정부) 때부터 공항 이전한다는 얘기 나왔는데 아직까지도 제자리걸음인걸 뭐. 정권 바뀔 때마다 개발된다, 해제된다 하는데 이젠 다들 지쳤지."
그린벨트를 해제하면 서울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자연경관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세곡동 일대에서 주말농장을 운영한다는 유아무개씨(68)는 "강남권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공기도 좋고, 경관도 이렇게나 아름다운데 그린벨트 해제 안 됐으면 좋겠죠"라며 "나이 먹고 나서는 땅 파서 하루하루 농사짓는 재미로 살아요. 유치원에서 체험학습 나오는 애들도 흙을 만지면서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라며 씁쓸해했다.
내곡동 일대에서 6000㎡ 상당의 분재 박물관을 운영하는 관장 김재인씨(75)는 "여기서 보존하고 있는 나무는 적게는 50년, 많게는 500년짜리"라며 "전 세계에서 관광하러 오거나 분재 수업을 받으러 찾아온다"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김씨는 "지금껏 지켜온 분재 문화를 이어갈 이만한 장소를 서울에서 또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라며 아쉬워했다.
그린벨트를 해제하지 않더라도 정부가 관리·감독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50년 넘게 토양과 나무를 연구해 왔다는 김씨는 "숲을 무조건 가둬둔다고 해서 나무가 보존되는 건 아니다. 그린벨트로 지정된 숲에는 죽은 나무도 매우 많다"며 "만약 그린벨트를 풀지 않을 거면 정부가 더 전문적으로 토지를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가장 좋은 방법은 그린벨트를 풀기보단 개발 제한 규정을 완화해 최소한의 편의 시설을 설치할 수 있도록 허용해 주는 것"이라며 "현재로선 관광객이 오면 불편한 게 한둘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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