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무 속 나뿌끼던 황금빛 억세밭... 가을 영남알프스를 달리다

김지산 기자 2024. 11. 4. 09:5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영남알프스 일대에서 매년 10월 진행되는 UTNP(울주 나인피크) 대회 현장. 올해 대회 사진 업로드가 늦어져 2023년 것을 참조했다./사진=UTNP


수납장 한쪽에 오래된 운동용품 보관 상자에서 트레일러닝 조끼를 꺼낸 건 지난달 초였다. 경남 울주 트레일러닝 대회 '울주나인피크(UTNP)' 40km 부문 신청을 막 마친 뒤였다. 동네에서 틈틈이 10km 달리는 걸로 러너로서 모양 치레만 하던 중 뭐라도 해야겠다는 결심의 산물이었다. 단, 결연한 각오 없이 참가할 수 없는 대회여야 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UTNP 시리즈가 국내 트레일 러닝에서 힘든 순위 최상위라는 글을 보고 '이거다' 싶어 부랴부랴 참가 신청을 한 터였다.

태백산맥 아랫단에 위치한 영남 알프스를 무대로 해발 고도 1000m를 가뿐히 넘나드는 봉우리들을 뛰어넘는 대회다. 말이 1000m지 보통 등산객들은 이런 산 하나 타는 게 만만한 일이 아니다. 대회 끝판왕격인 나인피크(9 PEAK)는 무려 9개 봉우리를 넘어야 한다. 여러 참가 조건을 따진 끝에 한시적으로 열린 40km짜리를 신청했다. 봉우리 4개를 넘는 코스였다.

주인 잘못 만나 구석에서 수명을 다해가던 트레일러닝 조끼는 2015년 일본에서 산 것이었다. 프랑스 S사 제품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이 브랜드는 한국에 매장 하나 없었다. 말하자면 바다 건너온 선진 문물이었는데 대회 한 번 나가지 못하고 집에서 먼지만 쌓여가고 있었다. 2018년 칠레 아타카마 사막 레이스를 끝으로 코로나와 2년간 특파원 근무가 겹치면서 5, 6년간 이렇다 할 대회를 한 번 나가지 못했다.

아무튼 질렀으니 남은 건 고강도 훈련. 마음가짐은 거의 태릉선수촌 입소 수준이다. 대회일 기준 2주 전 불수사도북(불암산 수락산 사패산 도봉산 북한산 정상을 하루에 찍는 것)을 완주하고 그로부터 5일 뒤에는 30km 러닝을 마쳤다. 다시 4일 뒤 20km 러닝으로 컨디션을 끌어올렸다.

드디어 운명의 25일 오전 9시 영남알프스 복합웰컴센터. 이순걸 울주군수가 활기찬 목소리로 몇 마디 축사를 마치자 5, 4, 3, 2, 1 출발 신호가 떨어졌다. 500명 넘는 인원이 '와~' 함성과 함께 스타트라인을 뛰쳐나갔다. 지자체장 눈에 이렇게 찬란한 그림이 또 있을까. 영남알프스를 무대로 3일간 8개 코스별로 수십~수백명씩 대회에 참가하니 숙박이며 식당이며 지역경제에 미치는 효과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등산로 초입까지 3km 정도 되는 도로를 주자들은 마구 달렸다. 프로들인가. 다들 속도가 엄청나다. 본격 산행에서도 속도는 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길이 좁아 일렬로 갈 수밖에 없던 탓에 한숨이라도 돌릴라 치면 나 때문에 뒷사람들에게 욕먹을 것 같고, 길을 내주자니 기록 조바심이 나 눈 뜨고 코베이는 심정으로 오버페이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남알프스 일대에서 매년 10월 진행되는 UTNP(울주 나인피크) 대회 현장. 올해 대회 사진 업로드가 늦어져 2023년 것을 참조했다./사진=UTNP

첫 번째 CP(체크포인트)까지 거리가 8.8km였는데 난이도에 비해 체력 소모가 많았다. 해발 200m에서 1000m 약간 안되는 높이 정상을 찍는 코스였다. 초반 오버페이스 영향이 컸다.

바나나 몇 개 집어먹고는 다시 주로에 들어섰다. 거리가 좀 길어서(13.4km) 그렇지, 오르막 경사가 완만해 수월했다. 초반 '비자발적' 오버페이스로 혼이 나간 주자들을 위한 선물 같은 코스다.

트레일러닝 대회 성공 여부의 8할은 코스 설계 묘미다. 주최측과 선수 사이 밀당 같은 거다. 죽을 만큼 힘들게 하고는 쉴 틈을 주는가 싶다가도 혼이 빠지게 고통을 선사하는 게 관건이다. 그러다 막판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하겠다는 듯 지옥문을 열어주는 게 핵심이다.

2010년부터 2018년까지 각각 250km 거리의 사막마라톤에 3번 참가해 완주해본 몸의 기억이 UTNP 40에서 되살아났다. 코스 기승전결이 딱 서바이벌 오지레이스의 축소판이었다. 기막힌 풍경과 오르막, 평지가 뒤섞인 영남알프스야말로 설계자들에겐 더없이 좋은 환경이다.

찬란했던 천황재 억새숲이 눈에 들어오는 게 제법 훈련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기진맥진 상태에서는 천하제일 절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법이다. 기세는 CP2를 지나서도 이어졌다. 달리다 익숙한 얼굴도 마주했다. 트레일러닝 전문 유튜브채널 '체체체가 달린다' 주인장 김자영씨였다. 이 채널에서 다양한 정보를 얻고 있다.

"채널 잘 보고 있습니다. 도움도 많이 받고 있습니다" "5343(기자 참가번호)님 화이팅"

수고로움을 최소화하면서 이런 대회를 준비할 수 있는 건 전문 유튜버들 덕분이다. 제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와중에 카메라 들고 뛰랴, 순간 순간 각본에 없는 대사 읊으랴, 보통 일은 아닐 것이다. 대회가 끝나면 영상 편집과의 전쟁이 기다린다.

구독자 수로 봐서는 수고 대비 유의미한 수익이 발생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사명감 같은 게 없다면 꾸준히 영상을 게시하고 관리할 수 없을 것이다. 저변 인구와 시장 확대 측면에서 협회 등 관련 단체들은 이런 채널들에 큰절이라도 해야 한다.

어쨌거나 '구독과 좋아요' 클릭 두어번에 고급 정보와 지식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니, 시대를 잘 타고나고 볼 일이다.

영남알프스 일대에서 매년 10월 진행되는 UTNP(울주 나인피크) 대회 현장. 올해 대회 사진 업로드가 늦어져 2023년 것을 참조했다./사진=UTNP

20km 넘는 산길을 가뿐히 오르고 달리면서 '오늘 사고 좀 치겠는데' 싶을 무렵, 진짜 사고를 쳤다.

주최측이 대놓고 달리라고 설계한 평평한 오솔길에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가속이 붙었던 지라 제대로 붕 떴다 자빠졌다. 팔꿈치 아래 양쪽 팔 여기저기가 쓸려 피와 흙이 뒤엉겼다. 돌부리를 걷어찬 왼쪽 엄지발가락은 감각이 사라졌다. 대회가 끝나고 보니 발가락 전체가 잘 익은 자두처럼 검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충격에 발톱이 뒤로 밀린 모양이었다. 대회 전에 손톱 발톱 자르는 게 기본이었거늘, '이 화상아...' 욕이 절로 나왔다.

넋이 나간 듯 몇 분을 주저앉아 있었다. 주자 열댓 명이 쏜살같이 추월해갔다. 발가락 통증에 공포가 더해지니 마음껏 뛸 엄두가 안 났다. 시간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닐 터. 스틱 덕에 4개 다리로 걸은 걸로 상각하자. '퉁치기' 긍정 마인드가 샘솟았다.

얼마 안 가 이번엔 왼쪽 허벅지 안쪽에 쥐가 났다. 그 자리에 또 멈춰섰다. 스트레칭을 해도 뒤틀리는 근육의 힘이 더 셌다.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는지 귀인이 나타났다. 뒤따라오던 여성 러너가 멈춰섰다. 영어로 빨리 말하는데 못 알아들었다. 외국인이네. cramp라는 단어를 몰라서였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근육경련이었다.

달리다 말고 다리 어딘가를 주무르며 멈춰섰으면 쥐난 거 말고 뭐가 있겠냐는 생각에 "that's right"이라고 했다. 그러자 귀인은 젤 하나를 건넸다. 눈 딱 감고 꿀꺽 삼키라는 몸짓과 함께.

간장에 한약재, 까나리액젓을 섞은 듯한 저세상 맛이 퍼졌다. 좋은 약은 입에 쓰다더니 놀랍게도 1~2분 만에 효과가 나타났다. CP3에서 다시 만난 외국인 러너에 허리 숙여 인사했다.

마지막 CP도 찍었겠다 이제 결승선까지 10.6km만 가면 된다. 그까짓 거 굴러서도 갈 거리. 호기롭게 자리를 뜨려 하자 내공이 상당해 보이는 러너 한 분이 "서두르지 말고 뜨끈한 국물에 주먹밥 충분히 들고 가시라"며 멈춰 세웠다. "여기 이 사람들(비슷한 시간대에 CP3에 몰려든 러너들) 보통 잘 달리는 사람들 아니에요. 다들 7시간대에 완주할 사람들"이라고. "먹은 만큼 달린다"라고도 했다.

군말 없이 따랐다. 몸과 마음이 지쳐 식욕이 완전히 사라졌지만, 음식을 어떻게든 뱃속으로 밀어 넣었다. 다시 생각해봐도 내공 고수의 충고를 따른 건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 다시 코스에서 만난 고수에게 "선배님 말씀 듣길 잘했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했다.

달리는 사람들은 척 봐서 자기보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 이들에게 '선배님'이라고 한다. 공용어다. 예의를 다하면서도 가깝게 느껴지니 이보다 좋은 호칭이 없다. '혹사 스포츠'에 뛰어든 같은 종족의 사람들이어서 가능한 일이다. 기록 경쟁에서 선뜻 약을 건넨 외국인 귀인 행동 역시 종족애의 발로일 것이다.

영남알프스 일대에서 매년 10월 진행되는 UTNP(울주 나인피크) 대회 현장. 올해 대회 사진 업로드가 늦어져 2023년 것을 참조했다./사진=UTNP

UTNP가 최강 난이도인 이유는 곧 밝혀졌다. 해발 고도 1159m 신불산 정상 등반이다. '신령이 불도를 닦는 산'이라서인가, 상층부를 진하게 둘러싼 운무가 신비로움을 더했다. 그런데 오르막이 장난이 아니다. 신령도 도를 닦는 곳이라는 데 보통 산이겠나.

사실 30년 전 울주에서 군 생활을 한 탓에 영남알프스는 익숙한 곳이었다. 내가 속한 부대가 영남알프스를 커버했다. 춥지 않다 뿐이지 산으로 치면 어지간한 강원도 군부대 뺨친다. 봄가을이 되면 해발 고도 1200m 안팎의 산들을 오르내리며 헬기장을 새로 짓거나 보수했다. 군장에 보도블록 하나씩 넣고 총 대신 삽을 들고 누비던 곳. 그땐 명산이고 뭐고 지긋지긋했고 울주 쪽으로 오줌도 안 누겠다고 다짐했더랬다. 신불산 정상을 뒤덮은 황금빛 억세밭이 세상 아름답다는 사실을 30년 만에 알았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정상을 찍고 나니 이젠 내리막과의 전쟁이다. 다리 상태 혹은 숙련도에 따라 성적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거리다. 역시 사람들 내려가는 기세가 대단하다. 딱히 요령이 없는 데다 넘어진 이후 두려움 때문에 새색시 마냥 조신하게 발을 옮겼다.

꾸역꾸역 결승선을 통과했다. 총거리 41.2km, 누적 고도 2780m, 7시간44분50초. 생각보다 기록이 좋았다. 전체 참가자 523명 중 137등, 상위 26%다. 참가자의 10%(52명)가 DNF(Do Not Finish, 중도 포기) 했다.

넘어지지만 않았어도, 발가락만 멀쩡했어도... 못난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꼭 이런 식이다. 10여년 전쯤 어느 마라톤 대회에서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 국민체육진흥공단 감독이 개회 축사에서 나 같은 종류의 인간들에 남긴 명언이 떠올렸다.

"저는 올림픽에서 금메달 따 연금이라도 받지. 상금 주는 거 아닌 대회에서 목숨 걸지 마시라"

다치지 않을 만큼만, 그래도 후회하지 말고 달려보자고. 주변에 폐 안 끼치고 오래오래 재밌게 살아보자고. 서둘러 목욕을 마치고 올라탄 서울 가는 기차간에서 자기 최면을 걸었다.

사족.

총거리 25.9km로 입문자 코스라고 할 수 있는 UTNP 2peaks 대회에서 참가자들이 10명 중 6명꼴(61.2%)로 무더기 탈락한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됐다. 총거리 128km인 저세상 난이도 9peaks(탈락률 47.1%)야 그렇다 쳐도 최하 난이도에서 이 정도 탈락률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유튜브와 블로그를 통해 해당 코스에서 본격 등반 초입, 엄청난 병목 현상 때문에 그곳에서만 1시간 이상을 버렸다는 내용을 접했다. 산길에서도 추월이 불가능할 만큼 좁아 느림보 행진을 해야 했단다. cp마다 제한 시간이 있는데 순전히 병목현상 때문에 늦은 걸 사정 봐주지 않고 탈락시켰다는 것이다.

코스가 소화하기 어려울만큼 참가 인원이 많았거나 코스 설계가 미흡했거나 둘 중 하나다. 입문 코스에서 이 정도 탈락률은 초보 트레일러너들을 유치하는 데 결코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을 것이다. UTNP의 성공을 바라는 마음에서 드리는 말씀이다.

영남알프스 일대에서 매년 10월 진행되는 UTNP(울주 나인피크) 대회 현장. 올해 대회 사진 업로드가 늦어져 2023년 것을 참조했다./사진=UTNP


김지산 기자 san@mt.co.kr

Copyright © 머니투데이 & mt.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