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노동은 ‘렌털’이 아닙니다 [6411의 목소리]
전경선 | 코웨이코디코닥지부 본부장
나는 렌털가전제품 방문점검원(이하 코디)이다. 정수기나 공기청정기와 같은 가전제품을 대여 판매하고 관리까지 하는 업무를 담당한다. 나의 주 업무는 회사와 계약한 계정(각 가정마다 관리하는 제품 하나를 계정 한개로 구분한다)에 대해 2, 4, 6개월 주기에 따라 고객 가정에 직접 방문해 필터 교체를 하는 등 관리 점검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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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코디로 일을 하게 된 것은 둘째 아이가 두 돌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돈을 벌어 가계에 보탬이 돼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코디는 근무 시간이 자유롭다”는 말을 듣고 일을 시작하게 됐다. 하지만 막상 시작하고 나니 그 자유는 나의 자유가 아닌 고객의 자유에 더 가까웠다. 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고객도 있지만, 방문 약속을 잊어버려 헛걸음하거나 고객이 늦어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런 업무가 익숙해질 때쯤이면 곧이어 관절 질환이 찾아온다. 필터 교체와 노즐 교체 등 업무 특성상 손가락과 손목을 많이 쓰는 탓에 장기 근무자들은 손가락 관절염이나 손가락 변형, 손목터널증후군 하나씩은 앓고 있고, 매일 무거운 업무 장비를 어깨에 메고 다니며, 쪼그려 앉았다 섰다를 반복하며 일하다 보니 무릎 관절 통증은 필연적으로 따라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직업병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매일같이 각 가정에 방문해야 하는 일이다 보니 여러가지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맞닥뜨릴 때도 있다. 개물림 사고는 3년 이상 일한 사람들은 모두 당해본 일이라고 할 만큼 흔한 일이고, 점검 중인 코디를 뒤에서 껴안고, 가슴을 만지는 등 성추행도 다반사로 일어난다. 내 주변에도 업무 중 갑자기 돌변해 다가오는 고객을 가까스로 밀치고 뛰쳐나와 심적 트라우마로 아직 업무에 복귀하지 못하고 있는 동료가 있다.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한달 전 경기도 지역에서는 코디가 고독사 현장을 발견한 일이 있었는데, 신고 후 경찰이 출동해 상황을 정리했지만, 해당 코디는 그날의 충격으로 지금까지도 업무에 지장을 받을 정도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생각해보시라. 방문 가정의 문을 열 때마다 누가 어떤 모습으로 날 맞을지, 또 어떤 위협적이고 공포스러운 상황을 맞닥뜨리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이런 모든 상황에도 회사는 ‘30분 이상 휴식 후 업무 할 것’, ‘법적 문제에 대한 서류 발급은 가능’하며, ‘트라우마는 지역 근로자건강보호센터에서 상담받을 수 있다’는 식의 지침만 주었을 뿐 별다른 조치는 해주지 않았다.
나는 지난 17년간 단 하루도 빠짐없이 회사의 로고가 박힌 유니폼을 입고, 장비가 든 가방을 메고 출근했다. 대부분 업무가 가정을 방문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용모가 단정하도록 늘 신경을 쓰고, 매주 소속된 사무실에서 회사의 업무 방침과 매뉴얼에 대해 교육받고, 매일 단체 채팅방에서 실적 관리와 업무 관리 감독을 받으며 일을 하고 있다. 그사이 회사는 내로라하는 기업으로 성장했고, 나 또한 회사의 성장에 일조했다는 생각에 많은 보람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 보람과 보상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내가 일을 시작하고 단 한번도 오르지 않았던 관리 점검 수당은 12년 만인 2021년 겨우 한번의 인상이 있었을 뿐이다. “코디는 회사의 얼굴”이라며 수시로 교육하고 업무 하나하나까지 간섭하며 관리하고, 회사 교육과 출근을 강요하면서도 업무상 발생하는 주유비와 교통비, 업무 중 상해 비용이나 식대 등은 전혀 지급하지 않고 있고, 업무 시 필수인 유니폼도 개인 비용으로 구입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방문점검원은 직원이 아닌 특수고용직 노동자이므로 회사가 지급할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회사가 자가관리 제품을 출시하면서 점검 업무를 줄이는 바람에 코디들은 생계를 위해서 영업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됐는데도, 회사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영업에만 혈안이 되어 계속해서 새 코디 충원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우리 코디들은 노동기본권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부당한 현실에 맞서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받기 위한 소송 신청을 준비했고 지난 8월 법원에 소장 접수를 마쳤다. 상식이 통하지 않아 법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그야말로 웃기면서도 슬프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단언컨대 우리, 방문점검원의 노동은 ‘렌털’이 아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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