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의 대유행, 각자도생 시대를 살아가는 방식 [EDITOR's LETTER]
우리 몸에 있는 세포는 수십조 개에 달합니다. 세포들은 죽고 새로 나며 활발한 교체를 반복합니다. 다른 세포와 달리 교체가 활발하지 않은 세포가 뇌세포입니다.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떨어지는 이유는 죽는 세포가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후배들에게 식당 이름을 물었습니다. “그 거기 있잖어. 누구지 걔들이랑 같이 갔던 시내 음식점 거기 말이야.” 음식점 이름은 생각나지 않고 말은 해야겠고. 10년 전에 그들도 총명했습니다.
“그 이혼당하고 제주도 가서 사는 영화”라고 했을 때 “아 건축학개론”이라고 알아듣던 녀석들. 이번엔 달랐습니다. “형 그게 노화의 증거래, ‘거시기할 때 거시기했던 그 거시기지?’란 표현하고 똑같잖어.”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싸가지 없는 $$, 답답한 건 난데. 너는 안 늙을 줄 아냐?’
노화의 증거와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현상. 글 쓰는 사람에게 치명적이지요. 고민하던 차에 귀에 확 꽂히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달리기를 많이 하는 집단 가운데 뇌과학자들이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달리기를 하면 뇌유래신경영양인자(brain-derived neurotrophic factor, BDNF)라는 게 분비된다고 합니다. 이 물질 덕분에 새로운 해마와 뉴런의 생성과 연결이 일어나 기억력이 향상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뇌과학자들이 달리기를 하는 것은 BDNF를 얻기 위한 것”이란 말이 나온 배경입니다.
관심을 갖자 주변에서 온통 달리기 얘기만 하는 듯했습니다. 춘천마라톤에 참가한 사람을 찾기 어렵지 않았고, 좋은 연주를 위한 체력 유지가 필요해 달린다는 음악가 얘기도 들렸습니다. 한강뿐 아니라 대학가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러닝크루들을 보며 대유행의 한가운데 들어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왜 달릴까. 이번 주 한경비즈니스는 달리기 열풍에 대해 다뤘습니다. 달리기 붐에 따른 스포츠 시장의 재편, 지역경제 활성화 효과, 사회적 배경, 성숙되지 않은 문화 등도 살펴봤습니다.
“달리기가 인류를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진화학자들에 따르면 현생 인류의 선조들은 애초 생태계에서 그다지 높은 위치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자, 표범 등을 피해 낮에 주로 사냥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더위를 피하는 방향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털이 사라지게 된 것이지요.
땀 배출 시스템을 장착한 우리 선조들은 오래 달리기 능력을 갖게 됐습니다. 이는 어떤 동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어깨의 돌연변이에 따른 던지기 능력과 합쳐져 인류를 최고의 사냥꾼으로 만들어줬습니다. 사냥감이 빠르게 도망가도 그들을 쫓고 또 쫓을 지구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눈썹도 그 흔적입니다. 먹이를 찾아 뛰거나 먹이가 되지 않기 위해 뛸 때 땀이 눈에 들어가지 않도록 진화한 산물입니다.
달리기를 잘하라고 자연은 보상도 해줬습니다. 날씨 좋을 때 야외에서 뛰면 도파민이 흘러나옵니다. 이 도파민 덕에 도저히 못 뛸 것 같은 한계치까지 달리게 됩니다. 이를 뛰어넘으면 행복감마저 느낀다는 ‘러너스 하이’를 경험합니다. 엔돌핀이 혈관속으로 퍼지며 육체적 고통을 잊게 해주는 그 현상. 엔도르핀은 모르핀과 비슷한, 즉 아편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여기에 최근 연구에서는 러닝으로 아난다마이드라고하는 물질도 분비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대마초를 흡입할 때 나타나는 안정 효과를 주는 물질이라고 합니다. 이뿐 아닙니다. 동료들과 함께 뛸 때는 사회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느낌으로 인해 행복 호르몬인 옥시토신까지 나온다고 합니다. 러닝에 왜 중독되는지 충분히 이해할 만하지 않습니까.
한편으로는 한국 사회의 의료시스템 붕괴와 러닝의 대유행의 시기가 겹쳐 있는 것은 아이러니합니다. “아프면 안 된다”는 말이 공공연히 들리는 각자도생의 시대의 생존방식이랄까. 낭만적 생각을 걷어내고 보면 러닝으로 인해 분비되는 호르몬들의 목표는 단 하나, 생존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왠지 앞뒤가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달리기 붐이 마냥 반갑지는 않은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러닝크루들 사이에는 “사연 없는 러너는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주변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친구는 “머리가 복잡해서 다 잊을 뭔가가 필요해 달리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달리기 예찬론자가 된 다른 후배는 직장 내 괴롭힘으로 정신과를 다니다 치료의 한 방법으로 뛰기 시작했습니다. 달리기 열풍은 어쩌면 초경쟁으로 뇌의 체력이 고갈된 한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능동적이고 긍정적 치유 방식의 확산은 반가운 일입니다. 앞으로 ‘사연 없는 러너’가 훨씬 많아지기를 바라 봅니다.
김용준 한경비즈니스 편집국장 juny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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