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를 알아들어서 괴롭고 슬픈 시대 [편집국장의 편지]

변진경 편집국장 2024. 11. 4. 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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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 사이 일하면서 유난히 이어폰을 자주 귀에 꽂게 된다.

〈시사IN〉마저도 혼탁한 시대, 또 하나의 녹음 파일을 던진다.

피로해지는 귀를 견뎌내며 괴로워도 다시 한번 이어폰을 꽂아야 하는 시대다.

"제 친구들인 혁철이와 경환이를 비롯하여 모두 전사했습니다"라는, 처참하게 부상당한 한 전쟁 포로의 퉁퉁 부은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는 웅얼거리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듣다 보면 정말 알아들어버려지는, 이 한국어의 지독한 비애가 유난히 가슴 쓰린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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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시사IN〉 제작을 진두지휘하는 편집국장이 독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우리 시대를 정직하게 기록하려는 편집국장의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10월31일 더불어민주당이 공개한 윤석열 대통령과 명태균씨의 녹취 파일. ⓒ연합뉴스

최근 몇 년 사이 일하면서 유난히 이어폰을 자주 귀에 꽂게 된다. 집중해서 듣기평가에 임해야 할 때가 잦아졌다. 2022년 이른바 ‘바이든 날리면’ 발언 자막 논란은 장대한 듣기평가 여정의 서막과도 같았다. 이후에도 윤석열 정부의 치부를 뒷받침하는 온갖 녹음 파일들이 쏟아지다 급기야 10월31일 명태균씨와 대화하는 윤석열 대통령의 육성이 담긴 17초짜리 음성파일이 전 국민 앞에서 공개되기에 이르렀다.

대통령실의 일관성을 고려하자면 이번 녹음 파일에 대해서도 “허위” 혹은 “자막 조작” 따위로 주장하며 법적 대응을 예고할 줄 알았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유독 용산은 명태균발 논란 앞에서 영 ‘히마리’가 없다. “통화 내용은 특별히 기억에 남을 정도로 중요한 내용이 아니었고” “명씨가 김영선 후보 공천을 계속 이야기하니까 그저 좋게 이야기한 것뿐”이라며 별 투지 없는 입장을 내놓았다. 다만 이준석 당시 국민의힘 당대표의 최근 페이스북 게시물 내용을 잔뜩 퍼와서 입장문 뒤에 갖다 붙였다. 제기되는 의혹에 대해 남의 SNS 글을 퍼다 옮기는 반론은 웬만한 영세기업도 채택하지 않을 홍보 전략 같은데, 대통령과 용산 참모들의 의중이 무엇인지 아리송할 따름이다. 성의가 없는 건지 귀찮은 건지 혹은 정말 할 말이 없어서 그러는 건지.

〈시사IN〉마저도 혼탁한 시대, 또 하나의 녹음 파일을 던진다. 편집위원으로 돌아온 주진우 전 기자가 명태균씨와 나눈 25시간가량의 대화·통화 녹취 파일이다. 〈시사IN〉은 주 편집위원을 중심으로 협업 특별취재팀을 꾸렸다. 이제는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 ‘스모킹건’이 되어버린 명씨의 말을 통해 윤석열·김건희 부부를 둘러싼 각종 의혹들의 실마리를 하나씩 풀어볼 예정이다. 피로해지는 귀를 견뎌내며 괴로워도 다시 한번 이어폰을 꽂아야 하는 시대다.

또 하나 참담한 음성도 독자들에게 전할 수밖에 없다. 우리 귀에 익숙한 언어와 억양이,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러시아 두 국가 SNS 계정에 올라오는 영상 속에서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러시아에 파병된 북한군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음성이다. 진짜인지 온라인 심리전을 위해 연출된 것인지 진위를 파악할 순 없지만 “나오라 야” “힘들다 야”라는 ‘알아들을 수 있는’ 말소리에서 한국인들은 당혹감과 속상함을 감출 수 없다. “제 친구들인 혁철이와 경환이를 비롯하여 모두 전사했습니다”라는, 처참하게 부상당한 한 전쟁 포로의 퉁퉁 부은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는 웅얼거리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듣다 보면 정말 알아들어버려지는, 이 한국어의 지독한 비애가 유난히 가슴 쓰린 나날이다.

변진경 편집국장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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