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달랐다”면서도 공감은 커져…생각 다른 71명 ‘한국의 대화’

류이근 기자 2024. 11. 4.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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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이어 올해 두 번째 대화 실험
대화 뒤에 “생각이 확장된 것 같다”
양극화된 세상에서 대화가 더욱 필요
지난 10월26일 서울 성수동에서 열린 ’한국의 대화’ 행사에 참석자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대학에 다니는 김병수씨는 쓰레기 분리수거를 할 때 일부러 비닐봉지 손잡이를 가위로 잘라서 버린다. 비닐 쓰레기가 바다로 흘러들어 손잡이가 해양 동물의 입이나 목, 지느러미에 걸려 생명을 위태롭게 할 수 있어서다. 플라스틱병이나 비닐에 붙은 종이도 꼭 떼서 버린다. 나름 환경을 생각하지만 실천은 거기까지다. 카페에서 일회용 컵을 쓰지 못하게 하고, 플라스틱 대신 종이 빨대를 꽂아 주는 곳이 늘자 불편하다는 생각과 의구심이 커졌다. ‘이렇게 한다고 환경이 더 좋아질까’, ‘우리가 플라스틱 빨대를 안 써도 어차피 중국이나 인도에서 마구 쓰고 버리면, 무슨 의미가 있나’.

김씨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눈 40대 직장인 전세현씨는 가급적 일회용품도 덜 쓰려 한다. 식재료 구매를 줄이려 텃밭도 일군다. 비록 거대한 지구의 위기에 맞서 아주 미미한 ‘몸짓’에 불과할지라도 “지금 상황에서 아무것도 안 할 수 없다”고 말한다. 20~30년 뒤 기후가 어떻게 변화할지, 또 우리가 생존 가능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성장이나 발전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생각마저 든다고 한다.

주저 없이 지금 가장 중요한 이슈로 기후 위기를 꼽는 전씨는 “비용이 더 들더라도 친환경 에너지를 확대해야 할까”란 질문에 ‘매우 그렇다’고 답했다. 반대로 김씨는 ‘매우 그렇지 않다’는 쪽이다. 그는 친환경 에너지 확대가 기업의 생산성과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자해 행위’라고 본다.

서로 다른 은하계에서 온 듯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건물 밖, 주말을 맞은 성수동 거리는 친구와 연인 등 친분이 있는 사람끼리 두셋씩 짝지은 무리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건물 안과 밖의 공기는 너무 달랐다. 밖은 왁자지껄했고, 안은 다들 호기심 품은 진지한 표정으로 낯선 사람을 마주했다. 지난달 26일 오후 서울 성동구에 있는 케이티앤지(KT&G) 상상플래닛에서는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과 사회적기업 빠띠가 주관하는 ‘한국의 대화’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얼굴도 모르고 서로 생각도 다른 35명이 모였다. 한국의 대화는 독일 주간 ‘디 차이트’가 2017년 시작한 ‘독일이 말한다’의 한국판으로 지난해 첫 실험을 한 뒤 올해는 한겨레가 주최하는 제15회 아시아미래포럼 사후 행사의 하나로 열렸다.

사회적협동조합 빠띠 권오현 이사장이 한국의 대화 행사 시작에 앞서 설문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그 가운데 전세현씨와 김병수씨도 있었다. 이들은 증세, 민영화, 파업, 다양한 가족의 형태 등 대부분의 주제에서 생각의 결이 달랐다. 대화가 끝난 뒤 둘 다 “우리는 완전히 다 달랐다”면서도, 한목소리로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누가 이기고 지느냐가 아닌 서로의 다름을 즐긴 듯 보였다.

건물 안 또 다른 곳에서 두 명의 남자가 인공지능(AI)을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20대 윤준하씨는 자신을 인공지능 마니아라고 할 만큼 기술에 빠삭했다. 이미지를 합성할 때 부자연스러운 부분을 인공지능에 맡겨 보정할 정도다. 30대 김재환씨도 글의 구조를 짜거나 초안을 작성하는 데 생성형 인공지능으로 불리는 챗지피티를 쓴다. 둘 다 인공지능 활용에 능숙하지만, ‘인공지능 기술이 인류의 미래에 위협이 될까’란 질문에는 답이 엇갈렸다.

김씨는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을 습득하는 데 뒤처지는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기술 낙오자’를 떠올리면서 인공지능의 일자리 위협을 우려했다. 더 나아가 ‘딥 페이크’(가짜 불법 합성물)나 개인 정보 침해 등 기술의 부작용을 규제하자는 쪽이다. 윤씨는 그 반대다. 그는 되레 규제가 기술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면서 시민사회의 자정 능력을 믿고 자유롭게 놔둬야 한다는 입장이다. 생각의 차이가 큰 두 사람은 대화 뒤 공통으로 “사고가 더 확장된 것 같다”는 소감을 남겼다. 윤씨는 “발상의 차이가, 틀린 게 아니라 그냥 다른 거라는 걸 더 느끼게 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이날 대화에 참석한 이들을 가르는 가장 논쟁적인 질문은 ‘역사 문제가 해결되지 않더라도 일본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나’ 였다. ‘아니다’(’매우 아니다’ 포함)와 ‘그렇다’(’매우 그렇다’ 포함)가 거의 반반으로 갈렸다.

사흘 뒤인 10월29일 저녁 온라인으로 진행된 대화에서 유한밀씨와 박은혜씨도 그랬다. 유씨는 역사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되지 않더라도 두 나라가 함께 할 수 있는 건 우선 해야 한다는 실리적 입장을 취했다. 박씨는 일본 한테서 배울 건 배우고 민간 교류도 더 활발해야 한다면서도 정부 간 협력은 이와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고 봤다. 신중론이었다.

이들 또한 대화 뒤 유익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특히 박씨는 “생각이 풍요로워지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유씨와 박씨 포함 이날 온라인으로 이뤄진 대화에 모두 36명이 참여했다.

지난 10월26일 서울 성수동에서 열린 ’한국의 대화’ 행사에 참석자 4인이 한 팀을 이뤄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실 생각이 크게 다른 사람과의 만남은 회피하기 십상이다. 만나더라도 가급적 말은 적게 섞으려 한다. 말을 하다 보면 불편한 감정이 올라오기 일쑤다. 그런데 ‘생각이 다른 사람이 대화를 나눈다면?’, ‘대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란 궁금증에서 출발한 ‘한국의 대화’ 참여자들은 막상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다른 짝꿍과 대화를 나눈 뒤 이구동성으로 ‘즐거운 시간’이었다거나 ‘생각이 확장된 느낌’을 갖게 됐다고 말한다. 지난달 성수동에서 일대일 대화에 참석한 공무원 심아무개씨는 이렇게 말했다. “생각의 차이가 있었지만 당초 생각했던 것보다 서로 부딪히거나 (마음을) 다치지 않고 얼마든지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돼 굉장히 좋았다.”

정치와 사회가 양극화된 세상에서 편을 나누고 입맛에 맞는 정보만 취사선택되고 다른 사람과 정보는 배제되는 현실에서, 한국의 대화가 갖는 의미는 적지 않다. 어쩌면 문제는 ‘차이’가 아니라 ‘배제’인지 모른다. 참석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자신과 관점이 다른 사람과 마주해 상대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경청하다 보면 차이가 줄지 않더라도 이해와 공감은 커졌다고 말한다. 보수 정당에서 일하는 정아무개씨는 일대일 대화에 참석한 뒤 “정치는 상대를 죽여야 한다는 강박을 갖고 있다. 그러다 보니 어떤 협의나 합의도 잘 이뤄지지 않는다. 이런 대화가 정말 필요한 이유다. 이게 우리 사회 전반으로 더 퍼져나가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번 대화도 지난해 첫 번째 대화와 마찬가지로 참석자들에게 미리 10가지 질문을 주고 답변에서 차이가 나는 사람들끼리 짝을 지어줬다. 일대일 대화만이 아니라 네 명이 모여서 좀 더 긴 시간 대화를 나누는 실험도 했다. 대화는 온라인으로도 이뤄졌다. 온라인 방식으로 대화를 진행한 박은혜씨는 “물리적인 공간에서 하면 여러 가지 부담이 있는데 온라인으로 하니 먼 거리 때문에 못 오는 분들도 참여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의 대화를 처음 설계한 이봉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장은 “갈등과 차이를 인정하되 마음과 귀를 여는 대화로 오해와 혐오에서 벗어나자는 게 취지”라며 “지난해와 올해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의 대화’ 같은 노력이 내년에는 지역, 대학, 직장 등 다양한 단위로 본격 확산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류이근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ryuyigeun@hani.co.kr, 녹취 김효진∙김서연 보조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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