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한국증시에 행동주의 펀드가 자리잡으려면

반준환 증권부장 2024. 11. 4. 05:38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머니투데이 증권부장 /사진=임성균

회사 인근에 유명한 돈가스집이 하나 있다. 식사시간에는 30팀 이상 줄을 서고 재료가 조기소진돼 주문하지 못하는 메뉴도 예사로 생긴다. 이 식당은 독특하게도 6인용 테이블을 1~2명의 손님이 느긋하게 이용하는 풍경이 종종 보인다. 4인석에도 그런 장면이 있는 건 마찬가지다. 홀을 가득 메운 손님과 밖에서 기다리는 대기손님들이 바글바글한 터다.

이런 이질적인 모습이 나타나는 것은 이 돈가스집이 손님과 테이블 인원수를 매치하지 않고, 철저하게 도착한 순서를 지키다 보니 나타난 현상이다. 입장 순서가 된 손님이 1명인데 남은 테이블이 6인용 밖에 없다면 그 자리에 손님을 앉도록 안내해준다. 직장인과 관광객이 뒤엉켜 정신없는 점심시간의 광화문에서 보기 드문 풍경이다. 장사효율보다 원칙을 지키는 모습에 신뢰가 가니 맛도 즐겁고 자연스레 방문하는 횟수도 늘어난다.

근방에는 단골 국수집도 있는데, 음식맛은 좋지만 뒷맛이 썩 좋지 않은 집이다. 일단 빈 테이블이 많아도 홀 종업원들이 지정하는 자리에만 앉아야 한다. 음식을 서빙하기 편한 자리로 손님을 몰아넣는다. 저녁영업 마감 30분 전부터는 손님들에게 나가라고 재촉을 한다. 퇴근시간에 맞춰 나가려면 그 시간부터 청소를 해야한다는 욕심때문이다. 일하기 효율적일지는 몰라도 내가 돈벌이 수단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별로다. 단골이었던 후배도 이 때문에 맘이 상해 발길을 끊었다.

최근 한국증시에서 행동주의 펀드의 움직임이 무척 활발해지고 있다. 행동주의 펀드는 자본시장 생태계에서 대주주에 대한 견제역할을 수행하며 장기적으로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최근 한국에선 기업에 무리한 요구를 일삼아 문제가 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최근에는 소액주주들의 권익을 볼모삼아 자신들의 이익을 챙긴 후 떠나는 모습을 보이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플래시라이트 캐피털 파트너스(FCP)는 얼마전 KT&G에게 엉뚱한 제안을 던졌다가 물의를 빚었다. KT&G의 자회사이자 정관장 브랜드로 유명한 한국인삼공사(KGC인삼공사)를 자신들에게 팔아달라고 요구했다. 홍콩계 증권사 CLSA가 "FCP가 인삼사업 지분 100%를 1조9000억원에 인수하겠다고 했으나 지급할 충분한 자본이 있는지, 인수에 진정성이 있는지 불확실하다"고 혹평했다.

한진칼 경영권 분쟁에서 큰 이익을 냈던 KCGI의 경우 전체 주주들의 이익을 대변하겠다며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내세웠지만 한진칼을 비롯해 오스템임플란트와 DB하이텍 사건에서도 중요한 시점에는 명분보다는 이익을 우선하는 모습을 보였다.

에스엠엔터테인먼트(SM) 경영권 분쟁에 뛰어들어 문제가 된 카카오의 인수전 선봉에 섰던 얼라인파트너스의 뒤끝도 좋지 못하다. 얼라인은 SM에 지배구조 개선이 필요하며 소액주주들의 의결권 대리행사를 권유했고, 결국 인수경쟁을 벌이던 하이브 대신 카카오가 최대주주에 오르는데 큰 역할을 했다.

얼라인은 SM의 지배구조 재편만 성공한다만 주가가 2025년까지 30만원을 넘길것이라고 소액주주들을 설득했지만 현재 주가는 7만원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기업가치가 형편없이 떨어졌다. 김범수 카카오 경영쇄신위원장은 시세조종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얼라인의 이창환 대표는 개인법인에서 에스엠 주식을 매매해 이익을 냈다.

얼라인의 행동주의는 지금도 진행중인데 과거와 비슷한 방식이다. 올해 초에는 은행지주 7개사 이사회를 상대로 합리적인 자본배치정책 및 주주환원정책 도입을 요구했고 비교적 규모가 작은 JB금융지주에서는 지분을 14.04%까지 사들여 2대 주주에 올랐다. JB금융지주는 올초 주총에서 얼라인이 추천한 2명의 사외이사를 선임했다.

최근에는 지배구조 재편에 나선 두산그룹에도 간여하려는 모습이다. 두산밥캣 주식 1%를 기습적으로 사들인 후 회사에 주주서한을 보내 두산밥캣과 두산로보틱스 간 포괄적 주식 교환을 재추진하지 말고, 이를 위해 쓰려고 했던 1조5000억원을 특별 배당하라고 요구했다. 두산의 경우 주식교환이 문제가 아니라 합병비율이 문제가 됐던 곳인데 이 문제는 건너뛰고 기업의 준비자금을 빼달라는 것이다.

인삼공사를 요구한 FCP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얼라인이 두산그룹에게 사업구조 재편은 진행하되 소액주주들의 피해를 막을 밸류업 방안을 절충한 플랜을 제시했다면 명분과 모양새가 훨씬 좋았을 것이다.

한국증시에 행동주의 펀드의 역할이 필요한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지만 부작용이 큰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 자신들이 내세운 명분과 원칙을 결정적인 순간 뒤집고, 어떤 시기에는 그들이 비판하던 기업 오너들의 잘못된 행태를 따라하기도 한다. 행동주의 펀드의 주역이 된 최고경영자 한명은 과거 중견기업 2세들의 편법상속과 증여를 도와주는 파킹딜을 전문적으로 하면서 돈을 챙겨왔다. 그가 끼어들었던 경영권 분쟁은 항상 피해자를 양산했고 벌어들인 돈에는 개미 투자자들의 눈물이 섞여 있다.

한 식당이 단골집이 되려면 갖춰야 할 덕목이 많다. 특히 중요한 것은 신뢰다. 내가 언제, 누구와 가더라도 변치 않는 맛과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중요하다. 점심 피크시간대, 한명의 손님에게도 제대로 된 자리를 주는 돈가스집의 하루 장사는 아쉬울 수 있어도 1년 장사는 헛되지 않았을 것이다. 손님이 떨어지는 국수집은 본인들의 잘못을 모른체 언젠가 시장에서 잊혀질 것이다.

한국식 행동주의 펀드들의 선전을 기원한다. 다른 주주들을 의결권 단위로 세지 않고, 욕심을 가리기 위한 수단으로 명분을 차용하지 않았으면 한다. 주주와 기업, 나아가 한국 자본시장의 도약을 위해 행동주의 펀드가 할 일이 많은데 일찍부터 시장의 신뢰를 잃는다면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반준환 증권부장 abcd@mt.co.kr

Copyright © 머니투데이 & mt.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