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탄핵" 외쳤던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노인' 됐을 때[이승환의 노캡]

이승환 기자 2024. 11. 4.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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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1000만 시대'…태극기는 정치적 아닌 '실존적'

[편집자주] 신조어 No cap(노캡)은 '진심이야'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캡은 '거짓말'을 뜻하는 은어여서 노캡은 '거짓말이 아니다'로도 해석될 수 있겠지요. 칼럼 이름에 걸맞게 진심을 다해 쓰겠습니다.

1일 오후 서울 중구 세종대로와 광화문역 일대에서 열린 자유통일당 등 보수단체 3.1절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고 있다. 2024.3.1/뉴스1 ⓒ News1 김명섭 기자

(서울=뉴스1) 이승환 기자 = 2016년 12월부터 4개월간 토요일 오후 2시부터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태극기 집회가 열렸다. 박근혜 당시 대통령 탄핵에 반발하는 집회였다. 65세 이상 노인이 모여들었다. 대한문·서울시청·서울시의회로 이어지는 왕복 8차선 도로를 가득 채웠다. 태극기를 몸에 두르거나 성조기를 흔들었다. 좌파를 몰아내고 우파를 사수하자는 구호가 하늘을 덮을 기세였다. 2017년 3월 1일 집회 참가 인원은 주최 측 추산으로 700만 명이었다. 이 수치는 과장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수십만 명이 모인 것은 분명했다.

태극기 집회가 끝나고 사위가 어두워진 오후 6시쯤. 덕수궁 대한문에서 약 1㎞ 떨어진 광화문 광장에선 촛불집회가 한창이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촉구' 대회였다. 최대 232만 명(2016년 12월 3일·주최 측 추산)이 모였다. 2008년 6월 10일 광우병 촛불집회 규모(주최 측 추산 70만 명)의 세 배 이상 인파였다. 이들은 세종대왕 동상 아래 모여 '국정농단'을 규탄했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따라 불렀으며 "박근혜를 감옥으로 보내야 한다"고 외쳤다.

"우리는 태극기 노인들과 다르다"

촛불 집회 참가자의 다수가 20~40대였다. 유아차를 끄는 가족 단위 참가자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질서정연함'과 '평화'를 강조했다. "태극기 집회의 폭력적인 참가자들과 다르다"는 것은 이들의 집회 기조이자 자부심이었다. 태극기 노인들은 뚜벅뚜벅 나아가려는 우리 사회의 발목을 잡는 퇴행적인 존재로 전락했다. 대한문과 광화문을 취재하면서 나라가 두동강 났음을 실감했다.

그즈음, 70대로 보이는 여성 노인이 기자에게 다가왔다. 상·하의를 여러 겹 입어도 칼바람이 집요하게 빈틈을 찾아내 살갗으로 파고드는 한겨울이었다. 70대 여성은 기자의 방한 점퍼 지퍼를 끝까지 올려주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기자 양반, 이렇게 목을 드러내고 다니면 감기 걸려."

이 노인은 금요일 저녁 마산에서 출발해 서울에 도착한 뒤 이튿날 토요일 태극기 집회에 참가한다고 했다. 그는 기자에게 속내를 털어놨다.

"태극기 집회 와서 친구도 사귀고 대화도 하며 운동도 하고 그런 거지. 여기 있는 분 가운데 나 같은 사람 많을걸. 박근혜 대통령이 잘못한 거 우리도 알아요. 그런데 그렇게 나라님을 쫓아내는 게 우리 노인들에게 무슨 도움이 될지 잘 모르겠어."

뒤처짐 아닌 배려 '아날로그'

윤석열 정부는 노인연령을 75세로 상향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현 추세라면 2050년 노인 수가 2000만 명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에서다. 노인의 법정 연령인 65세에서 1년씩 단계적으로 상향해 2050년 노인 수를 1200만 명으로 유지하자는 것이 대한노인회의 제안이다. 65세 이상 노인 인구는 지난 7월 처음으로 1000만 명을 돌파했다. '75세 상향'의 취지는 노인 인구를 적정하게 유지하면서 정년 연장과 임금 피크제를 적용해 노인을 생산 가능 인구(경제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인구)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2050년이 돼도 기자는 '67세'라 이 방안이 시행될 경우 노인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생산 인구가 부족하면 잠재적 성장률이 떨어진다는 정부의 경제 논리에 당위성이 있다. 하지만 노동만이 노인 삶의 전부가 아니다. 노동과 생산과 경제의 관점이 닿지 않는 일상에서 이들의 소외는 가속화하고 있다. 병원 예약부터 호텔 예약, 항공편 예약, 택시 호출, 상품 결제 등 곳곳에 디지털 장벽이 가로막고 있다. 이웃 나라 일본만 가도 현금·승차권·도장·팩스 등 아날로그는 도처에 남아있다. 처음엔 뒤처짐이라 간주했다. 디지털에 취약한 세대를 위한 배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은 최근에야 들었다.

무엇보다 고령층을 향한 혐오나 사회적 편견의 개선 없이 생산 인구 활용이 실효성 있을지 의문이다. 노인들이 과연 산업 현장에서 환영받을 수 있을까. 늙음은 사회의 중심부에서 가장자리로 밀어내야 할 낡음이라는 인식이 굳건하다. 키오스크(무인단말기) 앞에서 쩔쩔매거나 어리둥절한 노인들은 민폐 취급받기 일쑤다. 조직의 꼰대도 대부분 중·장년층(30~64세)이다. 뒤에서 욕먹더라도 MZ세대 앞에서 일장 연설할 수 있는 존재이다. 반면 '65세 이상 노년층'은 은퇴했다면 젊은 세대들에게 말 붙일 기회조차 얻기 힘들다.

'집회가 유일한 낙' 노인의 속내

박근혜 탄핵 반대 집회 후 약 8년이 지났으나 여전히 노인들을 반기는 곳은 태극기가 휘날리는 집회 현장이다. '집회가 낙'이라는 노인이 예상보다 많다. 그런 의미에서 노인들의 '태극기'는 '정치적'이라기보다 '실존적'이다. 노인들이 존재감을 드러내는 창구가 집회 외에 없다면 '2017년 태극기 집회 퇴행'은 반복할 것이다. 그때 촛불 집회 참가자 중 누군가는 노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mrlee@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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