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SK는 왜 임원 차량에서 블랙박스 뗐나
정치권을 흔들고 있는 이른바 ‘명태균 통화 녹취’의 출처 중 한 곳이 명씨 운전기사였던 것으로 알려지면서 정·재계에서 ‘차량 보안’이 화두가 되고 있다. 앞서 과거에도 정·재계에서 운전기사발(發) 폭로가 있었지만 이번처럼 음성 녹취록이 적나라하게 나온 적은 거의 없어 정치권과 대기업들은 차량 보안에 한층 더 긴장하는 분위기다.
차량은 국회의원 등 정치권 주요 인사,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나 임원들이 이동하면서 중요한 내용의 통화를 다수 하는 ‘이동형 집무실’ 성격도 갖는다. 동시에 최근 IT의 발달로 누군가 마음만 먹으면 좁은 폐쇄 공간 내에서 녹음 등을 통해 기록마저 쉽게 할 수 있는 민감한 공간이기도 하다. 이에 정·재계는 차량의 블랙박스를 없애는 등 자체 보안을 강화하고, 자동차 업체들은 뒷좌석 대화 내용이 앞자리로 전달되지 않게 하는 등의 기술을 선보이며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대기업 차량 블랙박스 떼고, 전담 운전기사 없애기도
3일 재계에 따르면, 현재 삼성과 SK그룹은 임원 차량에 블랙박스를 달지 않고 있다. 블랙박스를 통한 반도체 사업장 등 민감 시설의 촬영을 차단한다는 이유도 있지만, 임원들의 동선뿐 아니라 차량 내 통화, 운전기사와의 대화가 녹음될 수 있다는 점도 주 이유다. 한 대기업 임원은 “비슷한 이유로 하이패스도 제거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논의가 있었는데, 톨게이트 통행 과정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그것까지 하진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운전기사 보안도 관건이다. 수행 운전기사들이 차량에서 각종 대화·통화 내용을 녹음해 폭로한 사례가 여럿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21년엔 수행 운전기사가 한 의류업체 임원의 사적 심부름 등 대화 내용을 온라인 커뮤니티에 폭로했고, 2017·2018년에도 각각 대기업 CEO와 그 배우자의 운전기사가 폭언을 당했다며 녹취를 공개해 해당 기업을 향한 소비자 불매운동이 벌어지는 등 파문이 일었다.
지난 2022년 ‘민주당 전당대회 돈봉투 살포 사건’도 돈봉투를 건넨 사업가의 수행 비서 겸 운전기사가 차량 블랙박스에 녹음된 통화 내용을 언론사에 제보하면서 검찰 수사가 시작됐다. 2002년 정계를 강타한 권력형 비리 사건인 ‘최규선 게이트’ 역시 김대중 전 대통령의 3남 김홍걸 전 의원과 함께 이권에 개입한 사업가 최규선씨의 운전기사가 실체를 폭로하면서 세간에 드러났다.
일부 대기업은 임원들의 전담 운전기사 활용 여부를 본인 판단에 맡기고 있다. 운전기사를 받지 않으면, 대리기사 사용 등의 명목으로 차량 운행 비용을 지원한다. 한 대기업 임원은 “임원 중에는 누군가 내 대화를 듣고 있는 게 싫다는 이유로 전담기사를 받지 않고, 스스로 운전하고 필요할 때마다 대리 기사를 부르는 임원들이 있다”고 했다.
본지가 취재한 대기업 임원들은, 차량 내 통화도 극도로 조심한다고 했다. 운전기사를 의식해 민감한 내용을 아예 말하지 않거나, 소곤소곤 숨죽여 말하거나, 상대방과 서로 이해할 수 있는 ‘그때 그 사건 말이야’ ‘거기에 계신 분 말이야’ 하는 식으로 돌려 말한다는 것이다. 한 대기업 임원은 “대화 내용을 유추하기 어려운 전화 통화를 하더라도, 자칫 녹취되어 앞뒤 맥락을 자른 채 공개되면 곤란한 일이 생길 수 있어 각별히 신경 쓰고 있다”며 “대기업 임원들은 다들 차량 내 기록에 대한 노이로제가 있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대기업들은 이 같은 우려 때문에 철저한 신원 조회를 거쳐서 임원 운전기사를 선발하고, 채용 과정에서 보안 서약서 등을 요구하기도 한다. 특히 사장급처럼 고위직 운전기사는 상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정규직이나 무기계약직을 채용하고, 자주 바꾸지 않고 오래 함께 일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운전기사들이 모인 온라인 카페에는 본인이 수행하는 CEO, 임원들의 대화 내용을 엿들었다는 내용이 공공연히 게시글로 올라오기도 한다. “통화하는 걸 들어보니 회사가 유망하다는데 투자를 해도 되겠느냐” “임원인데 매번 사장 욕을 적나라하게 한다” 등의 내용이다.
◇車 업계는 ‘뒷좌석 대화’ 엿듣기 차단 기술 개발
차량 보안 우려가 잇따르면서, 자동차 업계는 뒷좌석 사생활을 지키기 위한 기술 개발에 속속 착수하고 있다. 렉서스가 지난 7월 국내에 출시한 한 고급 차량(LM 500h)은 앞좌석과 뒷좌석을 격벽으로 완전 분리했다. 격벽에 흡음재가 적용돼 있어, 벽 윗부분에 달린 유리를 올리면 앞뒤 좌석 간 대화가 완전히 차단된다. 유리의 투명도를 설정해 뒷좌석이 아예 보이지 않게도 할 수 있다. 현대차도 뒷좌석 대화가 앞쪽으로 들리지 않도록 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자동차에 설치된 여러 개의 스피커가 소리의 파장을 증폭시키거나 감쇄하는 원리를 적용해, 좌석별로 방음 시설이 구비된 것과 같은 효과를 내는 것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추가 기술 개발을 통해 양산차에 적용할 계획”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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