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희 칼럼] 노벨경제학상 수상자가 설명 못하는 대한민국 경제 성공
빨치산 출신 박현채에 기반
대중 경제론 내세운 김대중 후보
중화학 공업론 내세운 박정희 후보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1970년대 대중 경제론이 통치했다면
세계적 제조업 강국 가능했을까
2012년 출간된 베스트셀러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의 저자 등이 올해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수상자들이 한결같이 ‘한국의 성공’을 거론했다. 독재자가 권력과 부를 장악한 ‘착취적 제도’의 북한, 사유 재산을 인정하고 민주주의를 이룬 ‘포용적 제도’의 한국은 제도의 차이가 국가의 성공·실패를 갈랐다는 학자들 주장에 딱 맞는 사례로 더없이 좋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들의 이론은 한국의 성공을 설명하는데 미흡한 점이 많아 보인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노벨상 수상자들의 ‘한국 칭찬’을 보면서 ‘1971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됐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일까’ 가정해보게 된다.
1971년 제7대 대선은 3선에 도전하는 박정희 대통령과 정권 교체를 내세운 신민당 김대중 후보가 맞붙었다. “논도 갈고 밭도 갈고 대통령도 갈아보자”는 김대중 후보가 돌풍을 일으켜 장충단공원 유세에 인파가 운집했다. 선거 직전 박 대통령은 “다음번 선거에 나오지 않는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했고 당선됐다. 1971년 대선은 이후 10월 유신을 비롯해 한국 현대사를 정치적 격랑으로 몰아가는 분수령이 됐지만 경제적으로는 오늘의 대한민국 번영을 가능케 한 발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선에서 두 후보의 경제 공약이 사뭇 달랐다. 박정희 대통령은 ‘중화학 공업론’을, 김대중 후보는 ‘대중 경제론’을 내세웠다.
김대중 후보의 1971년 대선 공약 ‘대중경제론’은 재야 경제학자 박현채씨가 토대를 제공했다. 박현채는 6·25전쟁 당시 빨치산에 투신했다 하산해 서울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그의 민족경제론은 한국 경제를 ‘식민지 종속형 자본주의 국가’로 규정하고 미국의 예속에서 벗어나는 자립 경제를 목표로 삼았다. 김 전 대통령은 생전에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에 오래전부터 문제의식을 가졌다. 안티테제로 주창해 온 청사진이 나의 ‘대중경제론’”이라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도 하면 된다”는 의욕과 자신감을 국민에게 불러일으킨 공로는 인정한다. 하지만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토대로 한 공업화, 수출 증대, 경제 성장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농민과 노동자의 희생 위에 대기업에 특혜를 몰아줬다. 공업과 농업, 대기업과 중소기업, 도시와 농촌의 불균형이 심화했다. 대중경제론은 이런 인식에서 비롯됐다. 대중이 주체적으로 경제 정책의 수립과 운영에 참여하고 공정한 분배를 받음으로써 ‘중산층이 튼튼한 다이아몬드형 사회’를 추구하는 구상이다.”
고루 성장하고 콩 한쪽도 나눠먹자는 이상은 근사해 보이나 현실은 나눠 먹을 콩도 별로 없는 처지였다. 1971년 4월 대선 당시 세계와 대한민국 경제 형편은 이랬다. 미·소 냉전 구도하에 GDP 1위가 미국, 2위가 소련이었다. 우리나라 1인당 GDP는 279달러로, 일본(2056달러)의 반의 반도 안 됐다. 동구권은 물론 북한보다 낮았다. 1970년 북한의 1인당 GDP는 384(UN 통계)~636달러(현대경제연구원)로 추산된다.
1961년 집권한 박 대통령이 수출주도형 산업화로 연평균 10.2%의 고성장을 이뤘지만 여전히 못사는 나라였다. 1970년에 10대 수출 품목은 섬유류, 합판, 가발 등 경공업이 대부분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북한은 1970년 발표한 6개년 계획에서 자력갱생 노선을 택했다. 이런 국내외 정세 속에 김대중 후보는 농촌과 도시의 균형 발전, 노동자가 참여하는 노사위원회, 부유세 도입 등의 대중 경제론을 폈다. 1971년 김 후보가 당선됐다면 1987년 6·29 선언보다 정치 민주화는 앞당겨졌겠지만 과연 박태준, 정주영, 이병철 같은 걸출한 기업인이 활약한 경제 기적이 가능했을까. 전 세계 바다에 떠있는 선박 절반이 ‘메이드 인 코리아’요, 반도체와 자동차 수출이 세계 선두권을 달리며, 한국 무기를 앞다투어 사가는 오늘의 강한 수출제조업 경제는 1970년대에 박 대통령이 중화학 공업 육성을 목표로 철강·비철금속·기계·조선·전자·화학 6개 분야에 집중 투자한 결과다. 1인당 GDP가 북한을 앞지른 것도 1974년(UN 통계) 내지 1976년(현대경제연구원, 김병연)이다. 1977년에 수출 100억달러와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를 앞당겨 돌파했다. 우리는 자유 무역의 확대라는 세계 흐름에 올라타 성장을 이어갔고, 자력갱생의 북한은 1970년대에 아직 머물러 있다.
김대중 후보는 대선 패배로 정치적 고초도 겪고 ‘1971년의 대중경제론’에서 벗어나 1998년 대통령이 되어서는 보다 현실적인 경제 정책을 폈다. 토대가 됐던 박현채의 민족 경제론은 80년대 대학가에 ‘운동권 경제학’으로 꽤 오랫동안 존속했지만 동구권 몰락, 한국 경제의 비약적 성공으로 설득력을 잃어갔다.
한국 경제의 성공은 단지 북한과 제도 차이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놓은 탁월한 리더십 덕에 가능했다. 노벨상 수상자들은 책에서 “포용적 정치 제도와 포용적 경제 제도는 서로 의지하며 확대되는 선순환 메커니즘이 작동한다”고 했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 경제력이나 문화적 위상은 높아지는데 포용적 정치 제도에서도 정치판은 날로 저질화되고 있다. 제도도 결국 누가 운용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나아가기도, 뒤로 후퇴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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