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쌓이는 부채 885억… 연금 개혁 위해서라면 ‘삐끼삐끼 춤’도 출 수 있다

김윤덕 기자 2024. 11. 4.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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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덕이 만난 사람] 언론 54곳에 ‘개혁 읍소’ 편지 보낸 이기일 보건복지부 1차관
윤석열 정부의 최장수 차관인 이기일 보건복지부 1차관이 연금개혁안의 주요 내용을 적은 판넬을 들고 활짝 웃었다. "일이 취미고, 일이 약"이라는 그는 "국민연금 개혁을 위해서라면 삐끼삐끼 춤도 출 수 있다"고 했다. /장련성 기자

이기일 보건복지부 1차관은 명함만 12개다. 연금 개혁·난임·청년·노인·장애인 등 분야별 복지 정책의 요지를 3단짜리 명함에 깨알같이 새겨 넣어 만나는 사람마다 나눠준다. 보험 회사 영업 사원 같다고 하자, 냅다 맞장구를 쳤다. “영업 사원 맞아요. 국민께 우리 정책을 알릴 수만 있다면 ‘삐끼삐끼 춤’도 출 수 있습니다, 하하!”

최근에는 언론사 54곳의 기자와 논설위원 208명에게 ‘연금 개혁에 힘을 실어주시길 요청드립니다’란 제목의 편지를 보내 화제가 됐다. “연금 개혁이 하루 지연되면 후세대에 전가되는 부채가 매일 885억원, 연간 32조원씩 늘어납니다. 빠를수록 가장 좋은 개혁! 골든 타임인 올해 그 기회의 창이 열릴 수 있도록 힘을 모아 주십시오.”

◇올해가 골든 타임인 까닭

-편지 보낼 생각을 어떻게 했나.

“지난 9월 4일, 21년 만의 정부 단일안으로 연금 개혁안을 발표했을 땐 모든 언론의 관심이 집중됐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잊혔다. 그러다 보니 골든 타임인 올해가 두 달밖에 안 남았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용기를 냈다.”

-올해가 왜 골든 타임인가?

“연금 개혁의 핵심은 보험료 인상이다. 선거를 앞두고 개혁을 추진하기 어려운 이유다. 올해는 마침 선거(총선)가 끝나서 개혁하기 가장 좋은 때다. 내년만 가도 후년(2026년)의 지방선거를 대비해야 하고, 그다음 해(2027년)엔 대선, 또 그다음엔 총선이 이어진다. 올해 안 되면 개혁은 2028년으로 넘어가고, 부채도 매일 1000억원씩 쌓이게 된다.”

-그래서 편지에 ‘빠를수록 좋은 개혁’이라고 썼나?

“코로나 시기 중대본 1통제관으로 브리핑을 할 때 한 기자가 질문을 했다. 아스트라제네카·화이자·모더나·얀센 중 어느 것이 가장 좋은 백신이냐고. 제 답변은 ‘가장 빨리 맞는 백신이 가장 좋은 백신입니다’였다. 연금 개혁도 마찬가지다.”

-현재는 매달 소득의 9%를 보험료로 내고 소득의 40%를 연금으로 받는다.

“소득의 40%를 연금으로 받으려면 보험료를 9%가 아닌 19.7%를 내야 재정 수지 균형이 맞는다. 10.7%(19.7-9)의 부족분 때문에 현재 1147조원인 적립금이 2056년이 되면 완전히 고갈되고, 2057년부터는 우리 딸·아들, 손녀·손자들이 월급의 28%를 매달 보험료로 내야 하는 상황이 온다.”

-국민연금이 처음 만들어진 1988년에는 소득의 3%만 보험료로 내고 연금으로 70%를 돌려받았던데.

“도입 초기엔 근로소득자들을 의무 가입시키려고 적게 내고 후하게 받는 설계로 시작했다. 3%로 시작한 보험료율도 15%까지 서서히 올릴 계획이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두 차례 연금 개혁에도 효과가 없었나.

“1998년, 2007년 국민연금법 개정을 통해 소득 대체율은 현재 42%까지 낮아졌지만, 보험료율은 1998년 9%까지 올린 이후 26년째 그대로다.”

-보험료 인상에 대한 국민 저항이 큰 탓일까?

“2007년 보험료율을 12.9%까지 올리는 안을 포함해 4개의 안이 국회 표결에 부쳐졌는데, 노인에게 기초연금을 지급하는 기초노령연금법 제정안만 통과되고 모두 부결됐다. 한 신문 사설이 ‘약사발(국민연금법 개정안)은 걷어차고 사탕(기초노령연금법)만 삼키는 선택을 했다’고 개탄했을 정도다. 그만큼 보험료 인상은 단기적으로 고통스러운 쓴 약과 같아서 선뜻 먹으려 하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 때인 2018년에도 보험료율을 12~13% 올리는 정부 안이 마련됐었는데.

“정부 안을 보고받은 문 대통령이 ‘보험료만 올리는 게 맞냐,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고 반려시켜 그 뒤에 논의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이기일 보건복지부 1차관이 언론사 54곳에 보낸 편지와 자료들. 그는 '연금의 노후 소득 보장 대책'에 관한 내용으로 두 번째 편지를 준비하고 있다. /장련성 기자

◇26년간 넘지 못 한 ‘마의 10%’

-다행히 지난 21대 국회에선 여야가 보험료율 13% 인상에 합의했다.

“26년간 ‘마의 10%’를 넘지 못하고 있었는데 공론화를 거치면서 13%까지 올려야 한다는 데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됐다.”

-보험료율을 13%로 올려도 6.7%(19.7-13)의 부족분은 여전히 남는다.

“그건 기금수익률을 올려 보충할 계획이다. 현재 우리 연금 적립금은 1147조로, 2188조인 일본과 1993조인 노르웨이에 이어 세계 3대 연금이다. 이 기금의 수익률을 현재 4.5%에서 1% 포인트 더 올리면 고갈 시기를 5년 정도 늦추는 효과를 낼 수 있다.”

-문제는 소득 대체율이다. 21대 국회 막바지에 여당이 43%, 야당이 45%를 제시해 줄다리기하다가 이재명 대표가 44%를 제안하면서 타결될 뻔했는데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해 무산된 것 아닌가.

“보험료율과 소득 대체율만 바꾸면 기금 고갈 시점을 8~9년 연장시키는 데 그치는 거라 좀 더 시간을 가지고 구조 개혁까지 해보자는 게 대통령 뜻이었다.”

-연금 개혁의 공이 이재명 대표에게 돌아갈까 봐 대통령이 막판에 비토를 놨다는 얘기도 있던데.

“그렇지 않다. 대통령 말씀대로 한번 만들면 최소 70년을 끌고 가야 하는 개혁인 만큼 더 신중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보험료를 9%에서 13%로 인상하는 속도를 세대별로 차등화하는 안도 논란이다.

“청년 세대의 요구였다. 앞으로 30~40년을 더 일해야 하니 보험료율을 천천히 올려주길 원했다. 그래서 50대는 4년마다 1%포인트씩, 40대는 0.5%포인트씩 8년, 30대는 0.33%포인트씩 12년, 20대는 0.25%포인트씩 16년으로 인상 속도를 차등화한 것이다.”

-50대가 무슨 죄냐는 사람도 있다. 세대 갈등을 낳는다는 지적이다.

“현재 50~60대에 걸친 베이비부머 세대는 소득 100만원 기준으로 3만원을 보험료로 내고 70만원을 연금으로 받는 혜택을 누리는 세대다. 13만원 내고 42만원 받는 청년 세대를 배려해 줘야 하지 않을까.”

-소득 아닌 세대를 기준으로 한 연금이라, 세계 연금사에 유례가 없는 코미디라고도 비판한다.

“금년 상반기 국회 공론화위원장을 지낸 서울대 김상균 명예교수도 처음엔 우려했지만 지금은 연금 개혁사에 남을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평가한다. 정부 입장에선 모든 세대에서 일괄적으로 0.5%포인트씩 8년을 인상하는 것이 재정적으로 더 이득이다. 세대별 형평성으로 이해해 주시면 좋겠다.”

이기일 보건복지부 제1차관이 지난 9월 25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연금 개혁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세계 연금사에 유례없는 코미디?

-기금의 재정 안정을 위해 도입한다는 ‘자동 조정 장치’는 뭔가?

“물가 인상률과 가입자 수, 기대 여명에 따라 지급받는 연금액이 자동 조정되는 것이다. 현재도 국민연금은 소비자물가 변동률을 반영해 연금액을 조정한다. 금년도 물가 상승률이 3.6%면 연금 100만원을 받을 사람에게 103만6000원을 지급한다. 자동 조정 장치는 여기에 ‘3년간 국민연금 가입자 증감률’과 기대 여명의 변화도 반영한다. 만일 가입자 수가 0.3% 줄고 기대여명이 0.3% 늘었다면 물가상승률 3.6%를 반영한 금액에서 0.6%를 뺀 금액을 지급한다.”

-저출생 고령화로 가입자 수는 줄고 기대 여명은 계속해서 늘어날 텐데 사실상 연금을 깎는 ‘자동 삭감 장치’ 아닌가?

“증감률에 상관없이 본인이 낸 보험료보다 많이 받을 수 있도록 연금 인상률의 하한선(0.31%)을 설정해 놨다. 재정 안정화를 위해 OECD 38국 중 24국이 자동 조정 장치를 적용하고 있다.”

-한국처럼 노인 빈곤율이 높고 노후 소득이 보장돼 있지 않은 나라에는 적용하기 힘들다는 지적도 있다.

“그래서 정부가 저소득 지역가입자의 보험료 지원을 강화하고, 기초연금도 40만원으로 인상한다. 기업의 퇴직연금도 단계적으로 의무화하고, 수령액을 연금으로 받도록 유도하며, 수익률도 높여갈 것이다.”

-현재 연금 수령액이 평균 62만~63만원이고, 20만~40만원밖에 받지 못하는 사람도 전체의 38%라고 한다. 용돈 수준의 연금이란 비판이 있다.

“정부도 노력하겠지만, 국민 개인도 자신의 노후 재정을 다층적으로 설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민연금에 퇴직연금, 개인연금을 통해 적절한 포트폴리오를 짜야 한다. 국고로 더 많이 지원하라는 주장도 있지만, 기초연금에만 이미 GDP의 1%인 24조원이 투입되고 있다.”

지난달 30일 오후 서울 중구 조선일보 편집국에서 이기일 보건복지부 1차관이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그는 연금개혁을 필두로 청년, 노인, 장애인 정책 등 업무별로 정책의 요지를 설명한 12개의 명함을 가지고 다닌다. /장련성 기자

◇정년 연장, 노인 연령 적극 검토해야

-국민연금 의무 가입 연령도 현행 59세에서 64세로 올리더라.

“기대 수명이 증가하고 고령층의 경제 활동 참여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60세에 정년 한다 해도 수급 연령인 63~65세가 되기 전 소득 절벽 기간이 생기는데, 결국 ‘정년 연장’을 유도하려는 것인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퇴직 연령과 수급 연령이 공백 없이 이어지게 하는 것이 OECD 국가 추세이므로 정년 연장을 통해 고령층의 경제 활동을 독려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본다.”

-청년 고용을 위축시킨다는 우려도 많은데.

“일본에서 전후 단카이 세대가 260만명 퇴직할 때 이를 부양할 1980년대생 청년들은 150만명밖에 안 돼 사회적 문제가 됐고, 결국 60세에서 65세로 정년이 늘어났다. 한국도 멀지 않았다. 올해 정년을 맞는 1964년생이 100만명인데, 1994년생은 72만명이다. 물론 청년 세대의 일자리를 빼앗는 식으로 정년을 연장해서는 안 된다. 호봉과 직급을 연장하지 않는 재고용의 방식이 돼야 할 것이다.”

-이중근 대한노인회장은 노인 연령을 65세에서 75세로 올리자고 제안했다.

“올해 7월 노인 인구가 1000만명을 넘어섰고 내년에는 전체 인구의 20%를 넘는 초고령 사회가 된다. 대한노인회장께서 큰 뜻을 가지고 제안해 주신 만큼 정부도 적극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철도고를 나와 사회생활을 하다 대학에 갔더라.

“가난한 빈농 집안이라 학비도 없고 취업도 보장되는 철도고에 갔다. 2년쯤 일하다 보니 예정된 길이 아닌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동기들은 서울역장, 부산역장으로 일찌감치 출세했다(웃음)”

-복지부에서만 30년 넘게 일했더라. 연금 관련 업무도 일찍 시작했던데.

“90년대 초 농어민 연금을 홍보하러 제주도에 간 적이 있다. 보험료를 얼마 내면 은퇴 후 얼마를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더니, 어느 할머니가 묻더라. ‘총각! 내가 한 건 가입해 주면 총각은 얼마나 받어?’(웃음)”

-아내가 여성가족부 신영숙 차관이다. 집에서도 국정을 논하시나?

“남들과 다를 바 없는 ‘부부의 세계’를 살고 있다(웃음). 보호출산제처럼 복지부와 여가부가 협업하는 업무에선 도움이 된다.”

-공직에 있으면 국민 인식을 바꾸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할 것 같다.

“90년대 초반만 해도 화장률이 20%였다. 매년 여의도 면적의 5배가 묘지로 바뀐다고 해서 묘지 공화국으로 불렸다. 지금은 93%가 화장장을 치른다. 개혁은 살갗을 벗기듯 아프지만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한다.”

-연금 개혁도 성공할까.

“고지에 와 있다고 생각한다. 비스마르크가 얘기한 것처럼 ‘지금 이 순간 우리 곁을 지나가는 신(神)의 옷자락을 놓치지 않고 잡아채는 것’이 정치인과 행정인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국회가 화룡점정을 찍어주길 바란다.”

☞이기일

1965년 충남 공주 출생. 국립철도고, 건국대 행정학과를 나와 미국 오리건대에서 석사를, 인제대에서 보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3년 행정고시에 합격해 국립의료원, 식약처, 보건복지부, 대통령실에서 일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는 중앙재해대책본부 제1통제관으로 일했다. 윤석열 정부에서 2년 6개월째 보건복지부 차관으로 재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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