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 살롱] [1468] 전쟁과 신탁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은 한반도 운명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인간은 죽음 앞에 도달해서야 신을 떠올린다. 수천명, 수만명이 죽고 사는 전쟁을 앞두고는 더욱 그렇다. 김정은의 파병 결정을 보고 ‘전쟁과 신탁’이라는 주제가 떠올랐다.
서양의 고대사를 보면 국가(민족) 간의 전쟁을 앞두고는 그리스 델피의 신전에 가서 점을 치는 게 관례였다. 기원전부터 시작해서 기원후에 이르기까지 대략 2000년간 델피 신전은 고대 지중해 문명권에서 가장 영발이 센 신탁소였다. 델피에 가보면 2000m가 넘는 파르나소스 산 700m쯤 높이의 바위산 중턱에 신전이 자리 잡고 있다. 신전 뒤로는 온통 바위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어서 음산하면서 신기(神氣)가 가득찬 분위기이다. 시민의 합리적 이성을 중시했던 민주주의 발원지인 그리스 문명이 대중의 의견보다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신의 뜻을 더 궁금해하고 우선시했다는 사실은 이율배반적이기도 하다.
서양에서 ‘역사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헤로도토스. 그의 저술인 ‘역사’는 사마천의 ‘사기’와는 맛이 다르다. ‘사기’가 일관된 순서로 짜인 코스요리 같다고 한다면 ‘역사’는 푸짐하고 떡 벌어지게 큰상에 차려놓은 회갑잔치 잔치상 같다. 생선부터 육류. 젓갈, 겉절이, 나물무침, 발효음식 등등 메뉴가 다차원적이다. 그 다차원 메뉴를 관통하는 저자의 핵심적 문제의식은 신탁이다. 신의 뜻이 전쟁과 인간 삶의 결정적 순간에 관여한다는 운명론이다.
리디아의 국왕인 크로이소스가 델피 신전에서 점을 쳐보니 ‘강대국을 멸망시킨다’는 점괘가 나왔다. 이 점괘를 믿고 페르시아의 위대한 왕 퀴로스(고레스) 대왕과 전쟁을 시작했다. 결과는 패배였다. 탄탄했던 자기 왕국이 멸망당하게 된 것이다. 장작더미 위에서 화형당할 처지가 된 크로이소스는 엉터리 점괘를 알려준 아폴로 신을 원망했다. 이 대목에서 헤로도토스는 멸망당하는 쪽이 자기인지, 아니면 상대방 국가인지를 재차 델피 신전에 가서 물었어야 옳았다고 설명해 놓았다.
박정희 대통령도 월남 파병을 앞두고 고민이 많았다. 미국은 압박을 하고, 하자니 걱정되고. 당대의 선승(禪僧)으로 이름이 높았던 통도사 극락암의 경봉선사에게도 찾아가서 상의했다고 한다. 경봉선사는 주장자를 바닥에 세 번 ‘쿵쿵쿵’ 내리쳤다. 박 대통령은 천태종의 상월조사에게도 찾아갔는데, ‘젊은 사람들 피 흘린 값으로 국가는 발전할 것이다’가 대답이었다고 전해진다. 김정은은 신탁도 없이 전략적인 판단으로만 파병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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