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정치인 말·약속의 무게
총리되자 유불리 따지며 말 바꿔
총선 패배에 놀라 ‘뒤늦은 반성’
정권사수 의지 속 가시밭길 예고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총리를 일본 정치권의 꼭대기에 올려놓은 건 대중적 인기다. 정치인 누구나 그렇지만 그가 일본 집권 여당 자민당 내 주류세력의 거부감이 강했던 비주류 대표인지라 더욱 그렇다.
그러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지난달 1일 이시바 정권 출범 후 한 달도 안 돼 27일 치른 총선에서 자민당은 참패했다. 자민·공명 연립여당이 과반수에 미치지 못한 것은 15년 만이었다. 국민은 어째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이었던 이시바 총리에게서 싸늘하게 등을 돌린 걸까.
이해타산에 얽매이지 않고 할 말은 하는 우직함이 인기비결이었다. 오랜 세월 일본 정계의 ‘절대강자’였던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에게 공공연히 맞선 것이 이런 면모를 잘 보여준다. 아베 전 총리 후원회인 ‘벚꽃을 보는 모임’이 후원금 스캔들에 휩싸일 때 철저한 조사를 요구한 것이 그였다.
하지만 집권 후 이시바 총리의 모습은 사뭇 달랐다. 정치적 유불리를 따져 말을 바꿨다.
총선 실시부터가 그렇다. 총재 선거운동 기간 중에는 국민이 판단할 수 있는 시간을 두고 총선 실시 시기를 신중하게 판단하겠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총재 선거에서 이기고 총리에 공식 취임도 하기 전에 역대급 스피드로 중의원(하원) 해산, 조기 총선 일정을 못 박았다. 자민당에 대한 여론이 워낙 좋지 않던 상황이라 새로운 정권에 대한 국민의 기대에 따라 생기는 ‘허니문 효과’를 표로 연결하겠다는 계산이었다.
자민당을 수렁에 빠뜨린 파벌 비자금 파문에 대한 대응은 결정타였다. 파문 연루 의원에 대한 엄격한 심사를 언급하며 공천 배제 등을 시사했던 입장을 뒤집었다. 차가운 여론에 놀라 공천 배제, 비례후보 중복 입후보 금지 등의 조치를 내놓았으나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았고, 원칙 없이 우왕좌왕한다는 인상만 남겼다. 선거운동 막판 파문 연루 의원이 대표로 있는 지역구에 2000만엔(약 1억8000만원)을 지원한 것이 드러나면서 그야말로 치명타를 입었다. 이시바 총리를 비롯한 자민당 지도부는 “선거운동에 사용할 수는 없는 돈”이라는 등의 해명을 내놓았으나 국민의 눈에는 궤변으로 비칠 뿐이었다. 선거 결과가 나온 이후 아슬아슬하던 판세가 지원금 교부 사실이 드러나면서 불리하게 바뀌었다는 지적이 줄을 이었다. 일본 언론은 “비자금 파문에 대한 유권자의 분노가 예상보다 컸다”고 진단했고, 이시바 총리 스스로는 “비자금 파문으로 매우 엄격한 심판을 받았다”고 반성했다.
‘패장 이시바’는 초라한 현실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이다. 집권 한 달을 갓 넘겼지만 ‘최단명 총리’, ‘포스트 이시바’ 운운하는 소리를 듣고 있다. 자리에서 물러날 수 없다는 의지를 밝히면서 일단 정권은 이어가겠으나 가시밭길일 게 뻔하다. 원활한 국정운영을 위해서는 총선에서 28석을 얻어 정치권의 캐스팅보트로 부상한 국민민주당의 손을 빌려야 한다. 자민당 내부에서 산발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책임론, 사퇴론이 어떻게 전개될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정치인의 말, 약속의 무게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준 게 이번 일본 총선이었다.
강구열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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