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헌법이 말하지 않는다 해서
지난 10월23일 대법원에서는 소매점에 이동식 경사로 등 편의시설을 설치하여 장애인들의 접근성을 확보할 의무를 법률이 규정하고 있는데도 정부가 시행령을 느슨하게 규정하여 20년 넘게 접근권이 침해되었음을 다투는 소송의 공개변론이 열렸다. 정부는 장애인들에게 온라인 구매 등 대체수단이 있다고 주장하다가 한 대법관에게 “장애인에게 집에만 있으라는 것이냐”고 지적당했다.
현대 입헌주의 국가에서 인간은 헌법에 의해 기본권을 보장받는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선언하는 헌법 제10조의 행복추구권이 가장 유명하지만, 헌법은 좀 더 특별한 고려를 할 가치 혹은 국가적 의무가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제한적으로 열거해 왔다.
제헌 헌법에는 현행 헌법 제10조에 해당하는 조문이 없는 가운데, ‘여자’와 ‘소년’을 특별히 보호받아야 할 근로자로 언급했다(제17조). 제19조는 “노령, 질병 기타 근로능력의 상실로 인하여 생활유지의 능력이 없는 자는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고 규정했다.
제3공화국 헌법은 ‘노령, 질병’이라는 예시를 삭제하고 국가가 보호할 대상을 “생활능력이 없는 국민”으로 뭉뚱그렸다(제30조 3항). 언뜻 보호 대상을 넓힌 듯 보이기도 하지만 구체성이 사라졌다. 게다가 국가의 보호를 받으려면 ‘생활능력이 없다’는 평가를 수용해야 했다. 자애로운 듯 보이는 조문 이면에 한국 복지정책의 역사에서 국민은 ‘가난의 증명’이라는 말이 가리키듯 행정 부담과 모멸감을 안은 채 지원의 필요성을 스스로 입증하고, 자력갱생의 노력으로 생활무능력 상태를 속히 벗어나야 했다. 헌법의 언어는 4공화국과 5공화국 헌법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지다가, 현행 제6공화국 헌법에 이르러서 제34조 5항이 등장하면서 갑자기 장애인이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신체장애자’ 및 질병·노령 기타의 사유로 생활능력이 없는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40년 전 제헌 헌법으로 돌아가면서 ‘신체장애자’를 하나 얹은 형태다.
해당 조문이 여러 사회복지법을 이끌어내긴 했지만, 장애인들은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공적 지원을 요청할 때 특별히 장애인에 대한 지원 의무를 규정한 이 조문을 인용하기보다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제10조 행복추구권을 자주 인용한다. 왜 그럴까. 단적으로 말해, 제34조 5항에서는 인권에 걸맞은 언어의 숭고함과 아름다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한때 쓰이던 ‘불구’라는 표현보다는 낫지만, ‘장애자’라는 표현은 한국 장애운동의 역사에서 이미 거부된 용어다. 우리는 신체장애뿐 아니라 발달장애인과 정신장애인의 고투에 대해서도 알아가고 있다. 대부분의 장애인들이 시설이나 집 밖을 나서지 못하던 시절, 그나마 눈에 보였던 이들이 신체장애인들이어서였을까. 1987년 헌법이 굳이 ‘신체’장애자라고 쓴 것은 그 시대의 편견이 남긴 헌법의 흉터이다.
이뿐만 아니다. 해석이 갈리긴 하지만 문구로만 보면 신체장애자 역시 ‘생활능력이 없는 국민’의 한 범주로 읽힌다. 장애인의 생활능력은 적절한 지원에 의해 충분히 확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생활능력이 없는 것이 장애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제 안다. 장애인들도 근로의 기회를 원하지만 2023년 하반기 전체 인구 고용률이 63.3%일 때, 장애인 고용률은 34.0%였다. 민간기업들은 아직 법정 장애인 의무고용률 3.1%를 맞추지 못하고 있으며, 정부조직인 교육청의 장애인 고용률은 2.51%에 불과하다. 국가는 헌법의 언어가 지닌 추상성과 무덤덤함 뒤에서 소상공인 보호, 예산의 한계, 온라인 쇼핑 가능 등 수단적 논리로 그 삶을 지원할 의무를 미루고 희석시킬 근거를 찾는다.
현행 헌법에는 인권을 위한 아름다운 조문이 하나 더 있다: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아니한다(제37조 1항).” 거의 잊혀진 이 조문은 후대의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듯하다. “우리 시대가 미처 인식하지 못해서 미안해. 무시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어. 헌법은 열려 있어. 너희의 시대를 만들어가렴.” 그렇게 한국 사회는 지난 40년간 장애인의 권리도, 참사 피해자의 권리도, 난민의 권리도, 자연의 권리도 알아가고 있다. 더 많은 존재들의 이름을 부르고 더 구체적인 권리를 아는 생동하는 헌법을 그려가고 있다. 기록되지 않았다고 경시되지 아니한다.
최태현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단독] 명태균씨 지인 가족 창원산단 부지 ‘사전 매입’
- 명태균 만남 의혹에 동선기록 공개한 이준석···“그때 대구 안 가”
- [스경X이슈] 민경훈, 오늘 ‘아형’ PD와 결혼...강호동·이수근 총출동
- 최민희 “비명계 움직이면 당원들과 함께 죽일 것”
- ‘IPO 혹한기’ 깬 백종원 더본코리아… 지난달 주식 발행액 5배 껑충
- “김치도 못먹겠네”… 4인 가족 김장비용 지난해보다 10%↑
- 말로는 탈북자 위한다며…‘북 가족 송금’은 수사해놓고 왜 나 몰라라
- 경기 안산 6층 상가 건물서 화재…모텔 투숙객 등 52명 구조
- [산업이지] 한국에서 이런 게임이? 지스타에서 읽은 트렌드
- [주간경향이 만난 초선] (10)“이재명 방탄? 민주당은 항상 민생이 최우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