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철의 나락 한 알]용산이 입을 열면 남한은 몸을 떤다
북한이 러시아에 파병했다. 러시아 하원은 북·러의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관계 조약’을 비준했다. 대북전단과 오물풍선, 대북·대남확성기 방송, 평양 상공 무인기와 차원이 다른 국면이 전개되며, 남북한의 군사적 긴장이 가파르게 고조된다. 군사적 완충장치를 모두 없앤 터라 전쟁 위기감도 스멀스멀 올라온다. 평화가 절실하다.
평화는 힘으로 지킬 수 없는 것
윤석열 대통령이 주장하는 ‘힘에 의한 평화’는 평화가 아니다. 지금 전쟁 중인, 주변국 군사력을 압도하는 이스라엘과 러시아를 보라. 평화인가? 늘 경비가 삼엄한 주한 미국대사관을 보라. 평화인가? 힘에 의한 평화는 불안과 파괴의 일상을 가져다줄 뿐이다. 윤 대통령은 평화는 구걸로 지킬 수 없다고 하지만, 힘으로만 지킬 수 없는 게 또한 평화다. 힘은 한쪽이 키우면 다른 쪽도 키운다. 평화가 아니라 불안이 자란다. 평화에 힘이 필요하다면 대화는 더 필요하다. 대화는 구걸이 아니다.
“통일, 하지 맙시다.” 최근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평화적 두 국가론’을 제안했다. 이 제안에 비판적인 반응이 많지만 제안 취지는 공감할 만하다. “두 개 국가를 선언하면서부터는 더더욱 그 나라를 의식하지도 않는다.” “대한민국을 공격할 의사가 전혀 없다.” 지난달 7일 김정은국방종합대학에서 김정은 조선노동당 총비서가 한 말이다. “자유의 가치를 북녘으로 확장”하고 북한 주민의 “정보접근권을 확대하겠다.” 지난 광복절 윤 대통령이 경축사에서 한 말이다. 대북전단 살포와 대북확성기 방송을 계속하겠다는 말로 들린다. 남한에 관심도 공격 의사도 없다는 북한에 시비 거는 꼴이다. ‘두 국가론’은 최소한 통일을 내세워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지는 말자는 취지로 볼 수 있다. 최근 엠브레인퍼블릭 등의 여론조사는 “북한을 별개의 국가로 인정해야 한다” 54%, “인정해서는 안 된다” 37%로 나왔다. ‘두 국가’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쪽이 훨씬 많다. 사실 두 국가론은 새로운 게 아니다.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은 한반도에 실재하는 ‘두 국가’ 현실의 국제적 공인이었다.
북·러 동맹은 윤 대통령이 한·미·일 가치동맹을 내세우며 ‘국익’에서 ‘이념’으로 돌아서서 중국과 러시아와 각을 세울 때 예견됐던 일이다. 이번 사태는 지금 정부가 자초한 측면이 크다. 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북한도 러시아도 국제 관계에서 국익을 추구한다. 북·러조약이 우리나라에 안보 위협이라면, 한·미 동맹은 북한에 무엇인가? 힘에 의한 평화의 필연적 모순이자 한계다.
우리 앞에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첫째, 계속 긴장과 갈등을 키운다. 둘째, 지금이라도 관계 개선에 나선다. 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 제공을 “유연하게 검토”하겠다고 나왔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매우 큰 실수가 될 것”이라고, 러시아 외교부 대변인은 “가혹하게 대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매튜 밀러 미 국무부 대변인은 무기 공급은 “궁극적으로 한국의 결정에 달린 문제”라고 선을 그었다. 무기 지원은 환영하지만, 그 결과는 한국 혼자 떠안으라는 말이다. 전쟁 당사국 우크라이나를 뺀 다른 나라는 다들 신중한데, 지금 우리 정부만 강경 일변도로 앞서 나간다.
최근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우리 국민 10명 중 8명이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윤 대통령은 국민 안위가 걸린 문제에 너무나 ‘신속, 과감’하게 반응한다. 호재를 만난 양 흥분한 느낌마저 든다. 궁지에 몰린 정치적 입지를 만회하려고 안보 위기를 조장하는가. 무릇 국가 지도자라면 말을 아껴야 한다. 난세에는 더 그렇다. 북한의 러시아 파병보다 윤 대통령의 입이 더 불안한 게 나만의 기우일까.
지난 6월 푸틴 대통령은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제공하지 않은 것을 높이 평가했다. 러시아 외교부 대변인은 경고와 함께 양국이 “훌륭한 교류와 상호 이해와 협력의 경험이 있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최근의 사태에도 러시아는 한국과 관계를 단절할 뜻이 없다는 속내가 읽힌다. 우리가 당장 할 것은 살상무기 제공 검토가 아니라 러시아는 물론 중국과 관계 개선에 나서는 일이다. 출범 2년 반 만에 지난 30년의 북방외교 성과를 결딴낸 지금 정부에 기대할 것은 없다. 정부가 의지도 능력도 없다면 국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당장 응답이 없더라도, 북한에도 가능한 한 모든 경로로 평화의 신호를 보내야 한다. ‘방 안의 코끼리’ 미국은 균형 외교로 넘어야 한다.
힘자랑하라고 쥐여준 권력 아냐
힘자랑은 원하는 사람끼리 개인적으로 만나서 하길 바란다. 농담 같지만, 진담이다. 무모한 힘자랑 하라고 대통령에게 권력을 쥐여준 게 아니다. 이제는 미국이 아니라 ‘용산이 입을 열면 남한은 몸을 떤다’. 하지만 여전히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국민은 대통령을 뽑을 권력도 있고 뽑아버릴 권력도 있다.
조현철 신부·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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