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만세운동 이끈 사회주의자 권오설 ‘역사적 복권’을”

강성만 기자 2024. 11. 3.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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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권오설권오상기념사업회 이준식 이사장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이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 운동가인 권오설(1897~1930)·김단야(1899~1938) 선생은 6·10만세 운동의 주역입니다. 당시 조선공산당(이하 조공) 지도자인 두 분이 이 운동을 기획했고 특히 권 선생은 국내에서 이 운동의 실행 책임을 맡았죠. 하지만 이런 공적이 우리 역사에서 제대로 기억되지 못하고 있어요.”

지난 5월17일 출범한 사단법인 권오설권오상기념사업회(이하 사업회) 이사장인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이 사업회 설립 배경을 두고 한 말이다. 1926년 순종 장례일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6·10만세 운동은 3·1운동, 광주학생운동과 함께 일제 때 국내에서 일어난 3대 독립운동으로 꼽힌다.

“권오설과 김단야 선생은 2005년 서훈(독립장)을 받아 정치적 복권은 되었지만 아직도 역사적 복권은 이뤄지지 않았어요. 교과서를 봐도 6·10에서 천도교 역할은 강조하지만 두 분 이름은 나오지 않아요. 일부 교과서만 조공이 6·10운동을 계획했다는 서술이 나옵니다. 사업회 활동을 통해 우선 권오설 선생과 권 선생의 14촌 동생으로 6·10에 참여해 옥고를 치른 권오상(1900~1928) 선생의 공적을 제대로 알리려고 합니다.”

문재인 정부 시기인 2017년 말부터 3년 동안 독립기념관장을 지낸 이 이사장은 독립운동가 집안 후손이다. 외조부가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지청천 장군이며 할머니와 어머니, 외삼촌, 이모부도 독립운동 공적으로 서훈을 받았다.

지난달 23일 경기 안산시 안산중앙역 근처 카페에서 이 이사장을 만났다.

고 권오설 선생. 이준식 이사장 제공

권오설과 권오상은 6·10만세 운동 전후로 일경에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옥에서 폐병, 위장병 등을 앓은 권오설은 출옥 100여일을 앞둔 1930년 4월17일 서대문형무소 독방에서 숨을 거두었고, 권오상은 투옥 21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한 달도 못 돼 역시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두 사람 고향은 당시 사회주의 운동가가 많이 나와 ‘안동의 모스크바’로 불린 경북 안동시 풍서면 가일리이다. 권오상이 조공 계열인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해 6·10만세 운동의 실행 주역으로 활동한 데도 권오설 영향이 크다고 한다.

권오설은 3·1 운동에 참여해 6개월 옥고를 치른 뒤 고향에서 소작인 권익옹호 운동을 의욕적으로 펼치다 1924년 상경해 사회주의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이른바 ‘신의주 사건’으로 조공이 와해된 1925년 12월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로 선출되었고 이듬해 5월에는 중국에 피신해있던 조공 상해 해외부 소속 김단야를 만나 순종 장례일에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로 합의했다. 자신이 ‘고려공산청년회 6·10만세 운동 추진 총책임자’의 자리도 맡았다.

그는 만세운동을 위해 천도교 구파로 대표되는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연대하는 한편,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의 단체를 동원해 시위를 준비했고 또 격고문과 4종의 전단 문구를 직접 작성해 천도교 쪽을 통해 배포를 준비하다 만세운동 사흘 전인 6월7일 검거되었다.

“조공은 1925년 말부터 중국의 국공합작처럼 좌우를 뛰어넘는 당을 만들자는 원칙을 세웠어요. 우파의 주요한 세력인 천도교·개신교와 힘을 합쳐 대당을 만들자는 거죠. 마침 그 무렵 순종이 승하하자 이를 계기로 만세 시위를 재현해 당을 만들자는 게 조공 쪽 의도였어요.”

6·10은 이렇게 조공이 민족협동전선 수립 차원에서 천도교 구파 쪽과 치밀하게 계획했지만 이후 역사에서는 단순히 학생 차원의 운동으로 왜곡되었다는 게 이 이사장 설명이다. 실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도 전국적으로 1천여명이 체포된 이 운동을 두고 “순종 장례일을 기해 만세시위로 일어난 학생 중심의 민족독립운동”으로 개괄하고 있다.

권오설권오상기념사업회 창립총회 모습. 이준식 이사장 제공

이와 관련해 사업회는 홈페이지에서 ‘일제와 국내 기득권 세력 탓이 크다’고 설명했다. 일제가 6·10을 다루면서 조공과 학생 조직을 분리 처리해 6·10을 조직적인 항일민족운동이 아니라 학생들이 즉흥적이고 산발적으로 만세를 부른 사건으로 의미를 깎아내리려 했고 또 국내의 우파 기득권 세력도 조공이 적극적으로 관여한 이 운동의 실상을 제대로 알리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이사장은 사업회 활동에 대해 권오설과 권오상 고향인 안동 쪽에서도 관심을 보인다고 했다. “지난해 말 사업회 설립을 준비하며 안동시와 의회에 협조 요청을 하니 의회에서 독립운동기념사업 지원 근거가 되는 조례가 시에 없다며 지난 6월에 독립운동 선양사업 지원 조례를 통과시켰어요. 6·10 100년이 되는 내후년에 두 분 공적을 함께 살피는 국제학술대회를 열고 앞서 내년에는 권오설 선생의 활동을 다루는 학술회의를 열 계획입니다.”

그는 안동 지역의 호의적 반응에는 경북독립운동기념관의 운영 재단 명칭이 지난 5월 호국보훈재단으로 바뀐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봤다. 경북독립운동기념관은 2007년 안동독립운동기념관으로 처음 문을 연 뒤 2017년에 지금의 기념관으로 승격해 개관했다. “재단 명칭에서 독립이 사라져 안동 지역 사람들 불만이 큽니다. 앞으로는 독립운동가보단 6·25 참전군인 중심으로 기념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죠.”

이 이사장이 독립기념관장으로 있을 때 산하 독립운동사연구소 인원이 20명에서 50명 선으로 늘었다. 연구원 순증만 10명이나 됐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적인 의지가 뒷받침한 결과였다. 독립기념관 설립 이후 처음으로 일제 강제동원과 ‘일본군 위안부’ 전시회도 열었다.

윤석열 정부 들어 세상은 바뀌어 새 독립기념관장은 뉴라이트 성향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현 정부 역사관을 두고 이 이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가장 큰 문제는 독립운동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뉴라이트는 독립운동가들이 우리 사회 주류가 아니고 백선엽같이 친일파로 비난받는 이들이 주류라고 생각해요. 그들을 띄우려면 독립운동가를 죽여야 합니다. 그래서 김구와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라고 하고 유관순을 여자 깡패라고도 하죠. 해외 무장독립운동이나 임시정부 세력은 빨갱이이거나 빨갱이에 의해 오염되었다고 봐요. 그래서 한국광복군도 김원봉이 부사령이었다면서 인정 안 합니다. 심지어 실력양성운동을 한 안창호도 상해 임정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인정 안 해요. 일제 때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이라는 큰 목적을 위해 이념과 노선의 차이를 뛰어넘어 모두 손을 잡았어요. 이런 큰 흐름을 부정하면서 이념이나 노선으로 나눠, 남는 조그마한 거로 독립운동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외교 노선의 이승만과, 국내는 조공을 빼고 교육, 문화, 언론 운동을 한 이들만 남습니다.”

그는 보훈부에서 별도로 세운다는 제2 독립기념관을 두고 “결국 조선일보 기념관을 만들겠다는 뜻”이라고도 했다. “일제 때 국내 교육, 언론, 문화 운동 관련 기념관을 만들겠다는 거잖아요. 이게 다 겹치는 게 동아일보 설립자 김성수(친일인명사전 등재)이고 좌우합작 독립운동이었던 신간회의 최대 후원자 조선일보입니다.”

그는 “지금 뉴라이트가 윤석열 정부에서 총력전을 펼치고 있지만 뜻대로 되진 않을 것”이라고 봤다. “독립운동가들을 다 배제하려는 시도는 국민을 설득하지 못 합니다. 현 정부가 홍범도 장군을 공산당이라고 그렇게 떠들었지만, 국민 60~70%가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을 반대했어요. 한국 보수세력 지지층 중 30%는 콘크리트라고 하지만 역사 문제가 불거지면 이게 20%로 떨어집니다. 지지층에 균열이 생기는 거죠.”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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