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함과 무모함 [이주은의 유리창 너머]

한겨레 2024. 11. 3.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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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은, ‘실내온도 높이기’, 2023, 피그먼트 프린트, 75×100㎝. 코리아나미술관 ‘불안 해방 일지’전

이주은 | 미술사학자·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이른 아침, 고속 기차역으로 가는 중에 전화기에 문제가 생긴 걸 알아차렸다. 화면이 간헐적으로 번쩍거리기에, 기차 안에서 끄고 켜기를 반복하며 바로잡으려 애쓰다가 그만, 그것의 최후를 지켜봤다. 담당자 연락처부터 목적지 주변 검색, 가는 길 안내, 비상시 송금이나 결제까지 스마트폰 하나에 전부 의존하고 있었다. 국내라서 의사소통까지 휴대폰 번역에 기대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사실 완전히 갑작스럽지는 않았다. 오래된 모델이라 최신 기기에 깔도록 설계된 앱들을 가동하기에는 힘에 부치는 중이었고, 역량이 안 되면서도 임무를 수행하느라 낑낑대고 있었다. 과열되어 화면까지 부르르 떨리는 전조를 몇번이나 봤으면서도 나는 아무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심지어 일주일 전에는 동네 산책 도중에 그걸 바닥에 떨어뜨려 큰 충격을 입히기도 했다. 멍든 몸으로 쉬지 않고 업무를 처리하고도, 칭찬은커녕 조만간 새것으로 교체해야겠다는 불만의 소리까지 견뎌야 했던 내 스마트폰은 마침내 낯선 기차역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이제 아무것도 뜨지 않게 된 까만 거울 위로 20세기 후반형 구식 모델 하나가 비쳐 보였다. 그건 사람 얼굴이었고, 나였다.

언제부터였던가, 나도 고장 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뭐라도 제대로 해내려면, 가령 글 한 편이라도 야무지게 완성하려면, 글자판에 온 신경을 모아야 한다. 만만한 일은 세상에 없는 것 같다. 고통스레 언덕길을 오르다가 몹시 숨찬 고개턱을 적어도 한번은 넘어야 완성품이 탄생한다는 걸 지금껏 살아온 경험으로 안다. 하지만, 요즘엔 고비에 이르기 전에 서둘러 마무리하려 한다. 무리하다가 방전되어 버리면 쉽게 회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중년들이 몸을 사리는, 즉 자신을 다 쏟아붓지 않고 에너지를 비축해 두는 태도를 우리는 현명함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현명함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답은 지금 소개하는 작품에 있다.

‘불안 해방 일지’라는 제목의 전시에 걸린 ‘실내 온도 높이기’는 이예은(1994년생)의 ‘무모 연작’ 중의 하나이다. 작가가 장면을 연출하여 배우 역할까지 맡고, 타이머 카메라로 촬영한 것이다. 조그만 체구의 젊은 여성이 두 팔을 벌려 건물을 감싸 안고 있다. 사람 하나가 따스한 가슴을 갖고 있다 한들, 자기 체온을 다 바쳐 온기를 전하고자 한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것은 물론이고, 본성부터 차가운 콘크리트 벽도 데워질 리 만무다. 그러니 무모하다.

‘무모 연작’은 영어로 ‘시시포스 시리즈’(Sisyphos Series)로 번역되어 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시시포스는 보상 없는 헛된 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무거운 바위를 산 정상까지 끙끙대며 밀고 가지만, 정상에 올리자마자 바위는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보람도 없고 성과도 없는 현실의 직시가 더 고통스럽다. 끝이 나지 않을 이 일을 평생 무의미하게 반복하도록 벌을 받은 것이다.

이예은 작가는 사진 작업을 하면서 생활비 마련을 위해 온갖 아르바이트를 병행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일과 노동에 대해 진지한 깨달음을 얻게 됐다. 때로 인간에게 일은 출구가 되기도 하고, 감옥이 되기도 한다. 출구란 인생의 매 순간 크고 작은 문을 열어주어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해주는 일을 뜻한다. 반면, 아무리 뛰어도 족쇄를 찬 듯 제자리일 뿐인 노동은 감옥생활과 다름없다. 불확실한 미래를 준비하는 청년들은 지금의 노동 자체가 힘든 것은 아닐 거다. 평생 출구를 찾지 못한 채, 무의미의 감옥에 갇혀 살까 봐 불안한 것이다.

알베르 카뮈는 저서 ‘시시포스 신화’에서 시시포스의 노동을 의미를 찾기 어려운 삶에 빗대면서, 무의미의 넝쿨 속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찾으라고 제안한다. 그것이 삶을 이끌어가는 한 가닥 희망이란다. 이예은 작가는 자신이 찍은 사진들을 작게 프린트해서 집 여기저기 붙여놓는데, 어느 날 ‘실내 온도 높이기’가 시선에 잡혔다고 한다. 그 순간 머리를 스쳐 지나간 것은 ‘어리석다’가 아니라, ‘누군가 나와 같이 벽을 안아주면 좋을 텐데’라는 바람이었다고 한다. 희미하고 빈약하지만 희망을 발견한 것일까.

예이츠의 시 ‘버드나무 정원’에 ‘젊고 어리석은(young and foolish)’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현명한 중년의 내가 젊은 시절의 나에게 삶을 느긋하게 보라고 조언하는 내용의 시 같다. 현명함은 지난날의 무모했던 추억을 전제로 한다. 얍삽하게 발을 담갔다 뺐다만 했더라면, 현명한 중년이 아닌, 비겁한 중년이 되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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