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철학으로 신봉한 나림…타 종교에도 남다른 조예
- 소설 ‘정몽주’에서 주장하기를
- 예교는 서민이 아닌 군자 학문
- 불설만이 화합으로 평천하 견인
- ‘백로 선생’ 속 주인공 백광욱은
- 내무장관까지 지낸 대재 백성욱
- 빛나는 성취로 ‘활불’ 추앙받아
- 나림도 불심으로 감옥살이 견뎌
- 부인 세례 받아도 개의치 않고
- 동학·기독교 등도 작품서 다뤄
- 열린 마음과 본질 꿰뚫는 통찰
나림 이병주는 “언젠가 짬이 있으면 장자와 도스토옙스키 마르크스 사르트르를 한자리에 청해 놓고 플라톤의 ‘향연’ 같은 향연을 베풀어 볼 작정이다”고 호언했다. 배포나 역량으로 그런 향연을 베풀 수 있는 작가는 나림밖에 없다. 그리고 부분적이나마 그런 맥락의 작업을 꾸준히 했다. 중편소설 ‘백로 선생’도 그 일환이다. ‘백로 선생’엔 도스토옙스키와 마르크스가 등장하고, 폴 발레리와 앙드레 지드도 언급된다. 거기에 더해 불교 이야기가 이어진다.
나림의 불교 이야기는 역사소설에서 상세하다. ‘정몽주’에서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 정몽주는 유불(儒佛)을 이렇게 해설한다. “예교는 삼강오륜을 밝혀 수신제가하고 치국하는 이법을 가르칠 뿐 생로병사하는 인생의 허망함을 위무하는 법은 아니다. 예교는 분별하는 지견(知見)으로 군자의 학문이지 서민의 학문이 아니다. 불설은 사해동포를 설하며, 분별보다 화합을 염원한다. 화합 없이 어찌 평천하가 이루어지겠는가. 윤리로선 예교를 지키고, 운명 속에 있는 사람으로선 불설을 숭상한다.
맹렬한 척불을 주장하는 제자들에게 포은은 꼭 외유내불(外儒內佛)이 아니더라도 스스로 자기 길을 좁히려 들지 말고 길을 넓혀 대도를 활달하게 걸으라고 조언한다. 조정에서 훼불(毁佛) 논의가 엄중해 절에도 못 갈까 염려하는 노파에게 포은은 불도의 묘미는 “만상견불(萬象見佛), 도처위사(到處爲寺), 화아성불(化我成佛)”이라고도 한다. 어디서든 부처를 만날 수 있고, 곳곳이 절이니, 성불은 공간이 아닌 마음에 달렸다는 뜻이다.
▮양주 어느 산사에서
나림의 불가와 얽힌 일화는 많다. ‘8월의 사상’의 에피소드가 특히 재미있다. 나림은 여러 차례 ‘단연코’ 술을 끊기로 결심했다. 1년 365일 불무주일(不無酒日) 습관을 정리하려 양주의 어느 산사를 찾았다. 주지가 나림을 알아보고 계곡으로 청하여 곡차라며 술을 권했다. 눈물을 글썽이며 들려주는 중국에서의 고난과 감격 체험담에 공감을 느끼며 나림은 주지에게 곡차를 권하고 주지는 나림에게 술을 권했다. 이튿날 숙취의 고통을 호소했더니 주지의 대답이 과연 법문 이상이었다.
숙취를 낫게 하려면 어제 마셨던 주량의 배를 마신다는 것이다. “그 다음은?” 하고 물었더니 또 그 배 이상을 마신다는 것이다. 그다음 숙취는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 “사람의 몸은 견디는 한도가 있으니 걱정말라”는 답이다. “불가의 말로는 열반이라고 하지요”하는 대목에서 아연하여 스님은 숙취로 고생하신 일 없느냐고 하니 곡차는 마셔도 술은 마시지 않으니 괜찮다고 한다. 그런 문답을 주고받는 동안 이상하게 숙취가 사그라들었다는 나림의 경험담이다.
백로 선생은 신통력을 지닌 승려다. ‘금강산 지장암 스님’으로 이름이 난 그는 원주 치악산 상원사에 머물며 경찰에 쫓기는 청년들을 숨겨준다. 특히 한 동굴에 세 젊은이를 함께 살린다. 지나치게 독실한 크리스천, 경직된 마르크시스트, 오직 자기 앞날과 문학에만 몰두하는 학병 거부자가 각자의 세계에 빠져 동굴 생활을 한다. 그 동굴은 여말선초(麗末鮮初) 은사(隱士) 운곡 원천석이 기거하던 곳이다. 이방원이 소싯적 가르침을 받았던 스승을 찾아 임금이 된 뒤 출사를 권유하러 직접 왔으나 원천석은 아예 만남을 사절하고 숨었다.
산은 소극적으로는 사회적 관계에서 벗어나는 곳이지만 적극적으론 저항의 거점이 되기도 하다. 산은 크게 육산(肉山)과 골산(骨山)으로 나눌 수 있다. 지리산이 대표적인 육산 즉 흙이 많은 산이고, 금강산이 대표적인 골산 즉 바위산이다. 지리산은 3개 도에 걸친 제주도만 한 크기의 거산이다. 지리산 빨치산의 활동이 정점이던 시절엔 쫓고 쫓기는 빨치산과 군경 5만 명이 하룻밤에 이 산등성이 저 골짜기를 숨바꼭질하며 뛰어다닐 만큼 큰 산이다.
▮실명 백성욱, 백로선생은 실제인물
골산은 골산대로 은신할 곳이 많다. 바위산 또는 바위 동굴은 불을 뜻한다. 뜨겁고 무섭다. 어지간한 사람은 바위 근처에 가면 그 기운에 눌려 다치기 쉽다. 수행자나 일부러 바위에 집을 짓고 애써 담금질한다. 기세가 강한 뜨거운 사람만이 견디는 게 바위 동굴이다. 원천석만큼의 자질과 기세가 없는 청년들이 거기서 합거하니 수양 정진은 없고 그저 허구한 날 다툼뿐이다. 백로 선생은 자기 세계에만 갇혀 앙앙불락하는 덜 떨어진 청년들에게 눈높이 훈도를 한다.
불세출의 도인 백로 선생은 소설 속에선 백광욱, 실명 백성욱(1897-1981)이다. 유불선에 두루 통하고, 동서고금 문사철을 망라한 대재다. 13세에 출가해 불교중앙학림에서 수학하고, 3·1 운동 후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했다. 프랑스·독일에 유학해 한국 최초 독일 철학박사가 됐다. 제자 500명과 금강산에서 8년 회중 수도했다. 내무장관을 잠시 한 후 동국대 총장을 지냈다.
이판과 사판 모두에서 빛나는 성취로 활불(活佛)로 추앙받았다. ‘백로 선생’은 백성욱의 한 일화다. 나림은 당대 백성욱과 쌍벽을 이루던 김법린, 그리고 승려 제헌의원 최범술과도 인연이 깊다. 나림은 불교도다. 나림은 감옥살이를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를 외우며 견뎠다.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의 끝 대목이다. 만사 순환하고 생사 윤회한다는 불교사상이 응축된 시다. 나림은 만해의 불교적 변증법에 의지하고 거기에 유폐된 황제의 환각을 더해 영어(囹圄)의 고통을 감내했다. 출옥 후 선덕화(善德華)란 법명의 모친을 전국 명산 고찰에 모시고 다녔고, 칠순 팔순 잔치도 대찰에서 성대하게 열어 드렸다. ‘나의 문학과 불교’란 주제의 강의도 했다
▮기독교 동학 등에도 정통
나림의 불교 강연은 “불교는 종교 이전에 철학이다. 기독교는 신앙이 핵심이지만 불교는 대오일번(大悟一番) 즉 깨달음을 위한 수도 수행이 핵심이다. 성불은 깨달은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로 시작하여, 불교 경전을 문학 텍스트로 파악해 본다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팔만대장경은 최고의 문학이지만 문학이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는 워낙 큰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다만 부처의 큰 가르침 반야지(般若智)와 문학 세간지(世間智)는 상호작용을 한다. 나림의 결론은 불교의 견지로 작금의 철학과 과학을 비판하고 반사(反思 rethinking))해 보는 것이다.
나림은 종교에 열려있었다. 평생 시모를 따라 불교를 신봉했던 부인이 세례명 테레사를 얻어도 개의하지 않았다. 외우(畏友) 박희영을 통해 카톨릭에 관심 갖기 시작해 ‘소설 김대건’을 쓰기도 했다. 박희영의 기구한 사연과 천주교인이 되어 동료 신도들 염(殮)하는 봉사로 길지 않은 후반생을 지낸 이야기는 단편 ‘중랑교’에 절절하다. 모쪼록 사람은 무언가를 믿어야 한다는 신념이 뚜렷했다. “절처불능시(絶處不能詩)”다. 애상과 원한이 극에 달한 절처, 언어도(言語道)가 단(斷)한 대목에선 필설이 아닌 위안과 의지처가 필요한 것이다.
나림은 여러 종교에 조예가 깊었다. ‘소설 이용구’와 ‘바람과 구름과 비’에는 나림의 동학 관심과 이해가 깊다. ‘행복어 사전’엔 섭리의 본체로 옥황상제를 신앙하는 상제교를 등장시킨다. 섭리라도 믿지 않으면 원한은 어떻게 풀며 삶의 허망함은 또 어떻게 감당하느냐는 교주의 진심을 나림은 긍정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들’ 해설은 나림이 기독교에 얼마나 정통한 지를 보여준다. 특히 ‘대심문관’ 대목의 해설은 기독교 사상과 교회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나림은 불제자가 되려고 해인사로 출가한 적이 있다. 경허와 만공을 잇는 고승 고봉을 만나 배웠다. 고봉은 허망과 통분에 찬 나림의 머리 깎기를 유예했다. 독자로선 천만다행이다. 나림이 서른에 출가했더라면 스승과 백로 선생을 능가하는 학승이 되고, 활불로 존숭 받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가지 않은 길’이다. 하마터면 대문호의 걸작들을 읽지 못 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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