칵테일마저 '달과 6펜스'…"이런 풍경 처음 봐" 텍스트힙에 빠진 2030

정세진 기자 2024. 11. 3.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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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 마련된 서울야외도서관 광화문책마당에서 시민들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를 읽고 있다./사진=뉴스1


# 20대 직장인 구모씨는 요즘 서점 풍경이 생소하다. 소설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대형 서점 문학 코너에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 시민이 몰려있는 풍경이 구씨에겐 신기하다. 책을 좋아해 서점을 자주 찾았지만 한강이 노벨상을 받기 전엔 문학 분야 베스트셀러 중에서 품절된 작품을 본 적이 없었다. 한강이 노벨상을 수상한 지 3주가 지났지만 한강의 일부 작품은 여전히 '일시품절' 상태다. 구씨는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직장이나 돈을 자랑하는 것보단 훨씬 좋은 현상인 것 같다"고 말했다.

2030 세대를 중심으로 '텍스트힙' 문화가 뜨겁다. 텍스트힙은 글을 뜻하는 영어 단어 '텍스트(Text)'와 멋지다 또는 유행에 밝다는 뜻의 '힙(Hip)'의 합성어다. SNS를 중심으로 서서히 달아오르던 텍스트힙 문화 확산에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불을 붙였다는 분석이다.

3일 오후 찾은 서울 종로구 광화문 교보문고에는 한강의 작품이 성인 허리 높이까지 쌓여 있었다. 서점 입구의 매대에 놓인 한강의 작품이 바닥을 보인다 싶으면 여지없이 직원들이 수레를 끌고와 한강의 작품을 새롭게 올려놨다. 곳곳에 마련된 한강의 작품 매대 상황도 비슷했다. '소년이 온다', '희랍어 시간', '여수의 사랑', '채식주의자', '작별하지 않는다' 등 한강의 작품을 한아름씩 품에 앉고 계산대로 향하는 시민도 볼 수 있었다.

교보문고 광화문점 관계자는 "한강 작가의 책은 입고되는대로 바로바로 나간다"며 "수천부가 입고돼도 재고가 거의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날 서점을 찾은 직장인 박모씨는 "한동안 서점에서 아예 구할 수 없다고 해서 구매 열기가 잦아들때까지 기다렸다"며 "아직도 '흰'이나 '희랍어 시간'은 구하기 힘들다고 들었는데 마침 매대에서 찾을 수 있어서 좋았다"고 말했다.

한강 작품의 인기와 함께 다른 문학 작품도 덩달아 인기를 끄는 분위기다. 온라인 서점 예스24 관계자는 "한강 수상 직후부터 시집과 소설책 판매가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양귀자 작가의 소설 '모순'은 한강의 노벨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 지난달 10일 이후 6일 동안 판매량이 예스24 기준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21.1% 늘어난 것으로 집계된다. 이 작품은 한강 작가의 책을 주문하면서 함께 구매한 소설 1위로 꼽혔다.

3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교보문고 입구 근처 매대에서 시민들이 한강 작가의 책을 고르고 있다. /사진=정세진 기자


같은 기간 황석영 작가의 '철도원 삼대'와 김주혜 작가의 '작은 땅의 야수들'도 판매량이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각각 257배, 117배나 늘었다. '작은 땅의 야수들'은 2024 톨스토이 문학상을 수상했고 '철도원 삼대'는 2024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로 뽑혔던 작품이다. 예스24 관계자는 "한강 작가의 책을 사면서 다른 책은 뭐가 있을까 찾는 독자들이 기존 문학 베스트셀러와 수상작을 찾아본 효과"라고 분석했다.

독서 문화가 다른 여가 문화에 영향을 주는 징후도 보인다. 서울 마포구 성수동이나 홍대 등에선 책을 판매하면서 읽을 수 있는 공간까지 제공하는 북카페가 인기다. 달과 6펜스', '이방인' 등 유명한 작품의 이름이 딴 칵테일이나 와인을 파는 북카페도 있다.

20대 직장인 장모씨는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이후로 주말이면 친구들과 북카페를 찾는다"며 "독서가 자극적인 숏폼 콘텐츠를 보며 쌓인 피로를 푸는 돌파구가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SNS를 중심으로 유명인들의 독서 인증도 텍스트힙 문화 확산을 부채질하는 모양새다. 아이돌 그룹 아이즈의 멤버 장원영이 한 인터뷰에서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책과 논어를 읽는다고 밝힌 뒤 쇼펜하우어의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걸그룹 멤버 르세라핌의 허윤진이 읽는 모습이 공개됐던 책 '다른 방식으로 보기'도 서점가에서 인기를 끌었다.

3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매대. 한강 작가의 작품 '흰'이 일시 품절됐다. /사진=정세진 기자


유명인 외에도 SNS에선 책 1권을 읽고 완독을 인증하거나 좋은 문장을 공유하는 등 후기를 올리는 계정도 인기를 끈다. 영화 리뷰 유튜브를 주로 보던 직장인 김모씨는 최근 신작 도서를 '언박싱'해주는 도서 리뷰 유튜브 채널을 챙겨 본다. 김씨는 "완독하기 어려울 때 미리 내용을 들어보고 마음이 끌리는 책을 선택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예스24 관계자는 "올초부터 책을 읽고 필사를 하는 게시물이나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시를 SNS에 올리는 문화가 알려지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인천 지역 고등학교 교사 범모씨는 "학생들의 도서관 방문도 늘었다"며 "한강 작품을 못 빌릴 땐 다른 책을 빌려 읽으면서 독서에 입문하는 학생들이 많다"고 말했다. 범씨는 "수행평가를 위해 강제로 읽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관심에서 시작해 SNS에 독서 후기를 인증하는 행동은 매우 바람직하다고 본다"고 밝혔다.

독서률이 낮은 한국에서 텍스트힙 문화가 확산하는 것은 긍정적이란 분석이 나온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그동안 독서률이 떨어지면서 문해력 논란이 계속됐는데 텍스트힙 유행으로 책을 가까이하면 깊이 있는 독서로 이어지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며 "과시용 독서라는 지적도 있지만 이렇게라도 책을 읽는 건 좋은 현상"이라고 말했다.

정세진 기자 seji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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