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에 걸친 북한 군부 쿠데타 기도…결말은 ‘참혹’ [정락인의 사건 속으로]

정락인 객원기자 2024. 11. 3.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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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판 ‘하나회’, 1992년 체제 전복 시도하다 실패 
1995년엔 군단장 암살 후 기밀 새나가 대거 총살당하기도

(시사저널=정락인 객원기자)

북한이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 러시아에 대규모 특수부대를 파병했다. 북한군이 창설된 후 해외 파병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 세계가 북한군 파병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지만 북한 내부도 심상치 않다. 국가정보원은 파병 소식이 전해지면서 북한 주민과 군인들이 동요하고 있다고 전했다. 북한 당국은 군대 비밀 누설을 이유로 장교에게 휴대전화 사용을 금지하고 차출부대 소속 병사들에게 입단속을 하고 있지만 '왜 남의 나라를 위해 희생하느냐'며 강제 차출을 걱정하는 군인들이 동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또 파병 군인 가족들에게는 '훈련하러 간다'고 거짓말하고, 동요를 막기 위해 지속적으로 이주 및 격리 조치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암살 가능성을 의식해 경호 수위를 격상한 데서도 내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근 김정은이 특수부대 훈련을 참관할 때 그의 주변은 완전무장한 경호원들이 둘러싸고, 즉시 사격이 가능하도록 방아쇠에 손가락까지 걸고 있었던 것도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전 세계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주목할 때 북한 내부에서 급변 사태 등 돌발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김정일, 김정은, 김일성(왼쪽부터) ⓒ연합뉴스

성공 가능성 높았지만 허무하게 끝나 

지금까지 북한에서는 두 번의 쿠데타 시도가 있었다. 1992년 프론제 군사대학 출신 장교 쿠데타 모의사건과 1995년 제6군단 쿠데타 모의사건이 대표적이다. 구(舊) 소련 시절인 1918년 군인이자 혁명가인 미하일 바실레예비치 프룬제의 이름을 딴 '미하일 프룬제 군사대학'이 설립된다. 여기에는 동유럽 공산국가들의 장교들이 유학했고, 북한도 항일투사 자녀 등 출신성분이 좋은 엘리트 장교들을 선별해 보냈다.  

북한 유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소련을 비롯한 공산국가에서 온 유학생들과 사회주의에 대해 토론할 기회가 많았다. 처음에는 북한 사회주의 우월성에 대해 자랑삼아 얘기했으나 '우상화와 개인숭배에 기반을 둔 독재국가'라는 비판을 받는다. 이들은 또 동독·헝가리·불가리아 등 동유럽 공산국가들의 붕괴 과정을 지켜보며 '김일성식 사회주의'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한다. 1991년 김일성이 김정일을 최고사령관에 추대하자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냈다. 봉건시대처럼 자식에게 권력이 세습되는 것에 반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프룬제 유학생들은 북한으로 돌아온 후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었다. 정기적인 만남을 가지면서 '이너서클'을 형성하고 세력화한다. 그러면서 남한의 하나회 같은 군내 비밀 사조직이 된다. 유학생 신분 때 받았던 특혜가 사라지면서 처우에 대한 불만도 싹텄다. 급기야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이 붕괴하자 김일성을 일본 천황과 같은 상징적 인물로 세우고 강력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기로 뜻을 모은다. 자본주의에 맞서려면 강력한 군대를 육성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를 바탕으로 제2의 한국전쟁을 일으켜 남한을 적화시키려고 했다. 

거사는 프룬제 출신인 인민군 부총참모장(상장)인 홍계성이 주도했다. 그는 현재 북한의 2인자로 자리매김한 최룡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매부였다. 김일성의 외가 친척으로 인민무력부 작전국 부국장을 맡고 있던 강영환, 인민무력부 작전부처장 겸 전투훈련국장인 안종호, 평양방어사령부 땅크(탱크)사단장 김일훈 소장도 동참한다. 프룬제 출신의 사단장 5명도 이름을 올렸다. 

이들은 인민군 창군 60주년 행사가 열리는 1992년 4월25일을 디데이로 정했다. 열병식에 동원된 탱크로 주석단에 있는 김일성과 김정일을 제압한 후 쿠데타군이 군과 노동당 등 권력기관을 장악한다는 계획이었다. 거사는 착착 진행되는 듯했으나 돌발 변수가 생긴다. 열병식 행사계획을 살펴보던 김일성의 고종사촌이자 인민무력부 국장이었던 박기서가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는 인민무력부 행사에 평양방어사령부 탱크가 동원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며 반대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지면서 1차 쿠데타 시도는 허무하게 실패로 돌아간다. 프룬제 유학생들은 땅을 쳤고, 계획의 전면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이들은 2차 거사를 위해 기회를 엿봤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기밀이 새어나갔고, 결국 김정일의 귀에까지 들어간다. 김정일은 대노하면서 군내 방첩기관인 인민군 보위국을 통해 반동분자들의 색출을 명령했다. 보위국장인 원응희(중장)는 쿠데타 주동자들을 한곳으로 모이도록 작전을 짠다. 1993년 2월8일 주모자인 홍계성 등에게 인민무력부 8호동 회의실로 모이라는 인민군 총참모장 명의의 지시가 하달된다. 겉으로는 중대 회의를 한다고 했지만 원응희가 판 함정이었다. 

회의가 시작되자 완전무장한 보위국 대원들이 회의장으로 들어왔다. 원응희는 참석자 중 쿠데타 모의에 참여한 간부들의 이름을 한 명씩 호명했다. 이걸 신호로 보위국 대원들이 다가와 훈장과 견장 등을 떼고 수갑을 채워 끌고 나갔다. 

이날 쿠데타 주모자 등 70여 명의 지휘관이 체포됐다. 김정일의 '발본색원' 명령에 따라 군부뿐 아니라 권력기관, 행정기관, 모스크바 내 북한대사관 등 프룬제 유학생 출신은 모두 조사를 받았다. 1985년까지 5년간 조사를 거치는 동안 지휘관이나 군관 등 200여 명이 총살됐다. 이 사건 이후 지금까지 북한은 해외에 군사 유학생을 보내지 않고 있다. 

북한군 열병식 ⓒ연합뉴스

여성 정보원에 발각돼 가담자들 처형 

1994년 7월9일 김일성이 급사한 후 장남인 김정일이 권력을 승계한다. 프론제 사건 수사가 완전히 끝나기도 전인 1995년 김정일 지도체제에 불만을 품은 군부에서 쿠데타를 계획한다. 이번에는 함경북도를 방어하는 제6군단이다. 청진시 라남구역에 사령부가 있는 6군단은 예하에 보병 3개 사단, 포병 1개 사단, 방사포 4개 여단을 전투부대로 거느렸다. 병력의 절반은 군단 직할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지방군으로 충원하게 돼있었다. 

북한 군부는 최상층에서 말단까지 군 책임자, 정치위원, 보위국이 서로 견제하는 3중 감시망 체제를 갖추고 있다. 군단 지휘체계도 마찬가지다. 무력 통솔권을 장악한 군단장, 정치 책임자인 정치위원, 군단을 감시하는 보위부장이 있다. 이들은 3권 분립이 철저하게 돼있어 군단을 움직이려면 3명이 뜻을 모아야 한다. 탈북자 출신의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가 쓴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 등을 참고하면 익명의 6군단 정치위원(중장)이 김정일 체제에 반기를 들고 체제 전복을 위한 쿠데타를 시도한다. 정치위원은 보위부장을 포섭하는 데 성공하지만 군단장이 동의할지는 확신이 안 섰다. 정치위원과 보위부장은 1995년 설날 명절을 맞아 군단장을 찾아간다. 

2024년 3월 김정은이 방문 지도했다는 서부지구 북한군의 작전훈련 모습 ⓒ연합뉴스

이들은 군단장에게 조심스럽게 쿠데타 계획을 밝히고 동참을 요구했다. 군단장이 거절하자 미리 준비한 독을 술에 넣어 암살한다. 북한 노동신문에는 '6군단장이 오랜 지병으로 사망했다'는 부음기사가 떴다. 이런 움직임은 이미 북한 정보 당국에 포착된 상태였다. 라남구역 라성동을 담당하는 국가안전보위부(현 국가보위성)는 한 여성 정보원으로부터 '6군단 쿠데타 음모설'을 입수한다. 보고를 받은 라남구역 보위부장은 이 사실을 상급기관인 함경북도 보위부장에게 보고했고, 반탐처장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그는 "6군단 정치부 군관이 취중에 말한 내용을 보고한 것"이라는 말을 듣고 신빙성에 의문을 품는다. 군단 보위부가 쿠데타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한 것도 이런 의문을 뒷받침했다. 반탐처장은 "정보가 신빙성이 없다"는 취지로 보고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데도 자신이 보고한 것에 대한 조치가 없자 여성 정보원은 평양의 보위국을 직접 찾아갔다. 이런 상황에서 6군단장이 급작스럽게 사망하자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보위국장 원응희는 상부에 직접 보고한다. 

김정일은 6군단장 대리로 군수총국장이던 김영춘 대장을 파견한다. 김영춘은 원응희와 함께 내사에 들어갔고 쿠데타 음모가 실제 있었다는 것도 밝혀낸다. 여기에는 정치위원을 중심으로 예하 부대 대대급 지휘관까지 참여하고, 함경북도 군당 책임비서, 행정일꾼, 국가안전보위부, 사회안전부(인민보안성) 부부장 이상 간부급이 대거 가담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때부터 은밀한 체포작전에 돌입한다. 원응희는 프룬제 사건 때처럼 회의를 구실로 정치위원 등 주모자들을 함남 리원 비행장에 모이게 한 후 무장군인들이 달려들어 체포한다. 약 10개월에 걸친 내사 끝에 핵심 가담자뿐 아니라 단순 가담자, 이들과 가깝게 지냈던 행정간부들까지 모두 체포된다. 적극 가담자들은 가혹한 고문 후에 처형당하고 가족들은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졌다. 이후 김정일은 6군단을 북한군 편제에서 영구 삭제하고 '9군단'으로 명칭을 바꿨다. 이 쿠데타 모의사건을 진압한 김영춘은 후에 총참모장으로 진급했다. 프룬제와 6군단 사건 수사를 맡았던 보위국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인민군 보위사령부로 승격되고, 원응희는 초대 보위사령관을 맡아 상장을 건너뛰고 대장으로 승진했다.

이처럼 북한에서 있었던 두 번의 쿠데타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며 주동자들은 총살이라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다만 두 사건의 정확한 진위가 확인된 적은 없다. 북한 전문가나 탈북자들 사이에서도 보는 시각과 내용이 각각 다른 것으로 알려졌다. 분명한 것은 북한 군부에 김씨 체제와 세습에 반감을 품은 세력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이다.

■북한에서 쿠데타가 성공할 가능성은?

친위부대 반란으로 김정은 신병 확보해야 완료

북한에서 쿠데타가 성공할 확률은 아주 낮다. 우선 군을 움직이려면 해당 부대의 지휘관과 정치위원, 보위부장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서로 견제하고 감시하는 이들이 뜻을 모은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설사 의기투합한다고 치더라도 평양으로 진격해 쿠데타를 성공시킬 가능성도 희박하다. 

북한의 군 지휘체계는 전쟁이 아닌 체제 수호에 맞춰져 있다. 최고사령관인 김정은 밑에 지휘부인 총참모부가 있지만 지휘체계는 각각 다르다. 평양시 외곽을 지키는 제91수도방어군단(12개 여단 약 6만 명)은 김정은 직속부대인 호위사령부가 지휘한다. 평양 시내는 호위사령부 병력 9만 명이 지키고 있다. 기갑부대와 대공포 부대 등 최정예로 구성돼 있다. 장비와 무장 상태도 뛰어나다. 이뿐만이 아니다. 국가보위성, 인민보안성, 노동적위대 등의 부대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렇다고 평양이 철옹성은 아니다. 평양 내부에서 무너뜨리는 방법도 있다. 친위부대인 호위사령부 등이 반란을 일으켜 김정은을 비롯한 북한 정권 수뇌부들의 신병을 확보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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