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끊고 이동하는 회전초···넘어지는 존재들의 ‘슬픔의 공동체’[미술관 옆 식물원]
바람이 불면 뿌리 끊고 이동하는 회전초
‘뿌리’는 인종·젠더 등 ‘나답지 못하게 하는 것’
트라우마 시달리는 미군 참전 용사와
광산개발에 맞서 땅 지키는 원주민 이야기
미술관에는 수많은 식물들과, 그에 얽힌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미술관에서 만난 식물들에게 한 발짝 다가가 자세히 들여다보는 ‘미술관 옆 식물원’ 코너입니다. 그림 속 식물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는 것도 미술을 즐기는 또다른 기쁨이 될 것입니다. 인간보다 훨씬 오래 전 지구에서 살기 시작한 식물에겐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바람이 불면 거칠고 둥근 몸을 굴려 이동하는 회전초.
발이 없는 식물이라지만, 회전초는 가지를 바싹 말려 뿌리로부터 몸을 끊어내 바람을 타고 이동한다. 생명의 기운이라곤 없어 보이는 마른 가지에 씨앗을 가득 품고, 굴러가며 씨앗을 퍼뜨린다. 미국 서부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회전초는 미국과 호주의 사막 같은 건조한 지역에서 사는 한해살이 식물이다.
최찬숙 작가는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에서 처음 회전초를 보았다. 세계에서 가장 건조한 사막이자, 세계 구리의 3분의 1이 매장된 이곳에서 광산 개발을 둘러싼 갈등을 통해 토지 소유권과 가상화폐 채굴권의 문제를 다룬 ‘큐빗 투 아담’을 만들던 때였다. 최찬숙은 ‘큐빗 투 아담’으로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황량한 사막에서 무리지어 굴러다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굉장히 촘촘하면서도 힘 있는 모습이었죠. 회전초가 국경 지역 철조망이나 담장에 걸려있곤 했는데 접경 지역 이주민들은 자신의 모습이랑 비슷하다고 느꼈을 것 같아요.”
지난해 초 미국 애리조나에서 한달 간 회전초를 카메라에 담았다. 회전초를 좇는 여정은 회전초의 이동모습과 비슷했다. 특정한 목적지 없이 이동하며 다른 가지들과 뭉쳐져 거대한 덩어리를 이루기도 하는 회전초처럼 이야기는 예상경로를 벗어나 거침없이 불어났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에 시달리는 미군 참전 용사와 미국 아파치족 선주민, 대규모 구리 광산 개발을 두고 벌어지는 갈등에 관한 이야기로. 회전초의 모습을 담은 ‘더 텀블’과 참전 군인과 아파치족의 이야기를 다룬 ‘더 텀블 올 댓 폴’을 선보였다. 경기도 용인시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리는 기획전 ‘숨결 노래’에서 두 작품을 볼 수 있다. 지난달 28일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최찬숙을 만났다.
#스스로 뿌리를 끊고 이동하는 회전초
“세상에 정착하지 않는 삶을 사는 사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잖아요. 물리적·정신적으로 온전히 정착한 삶을 산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회전초는 뿌리를 스스로 끊어내고 자신의 힘이 아닌 바람에 의해 움직여요. 바람에 의지해 가는 삶, 혼자가 아니라 씨를 뿌리면서 같이 이동하는 회전초의 모습에 동경을 느꼈던 것 같아요.”
최찬숙은 회전초에게서 자신과 동시대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다. 2001년 독일로 이주한 뒤 한국과 독일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최찬숙은 한국과 독일 어느 한 곳에 속하지 않는 이방인의 정체성을 갖고 이주와 이동에 관한 작품들을 선보여왔다.
‘더 텀블’은 회전초의 삶의 방식과 바람을 타고 이동하는 나선운동에 주목해 만든 영상 작품이다. 바람을 타고 역동적으로 날아가는 회전초의 모습을 기대했지만, 실제 만나긴 힘들었다. 대신 바람을 타고 창고로 밀려들어왔다가 빠져나가지 못해 내려앉은 거대한 회전초 무리를 만났다. 드론으로 촬영한 회전초 영상과 함께 회전초의 운동을 3D 애니메이션으로 생동감 있게 구현한 영상을 함께 볼 수 있다.
“Cut the Roots···흩어지는 몸들,/ 거기에 엉겨 붙는 다른 몸들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로운 이주의 공동체를 이룬다는 걸”
최찬숙은 회전초가 스스로 뿌리를 끊어낸다는 점에 주목했다. “뿌리라고 하면 전통이나 가족을 떠올리지만 ‘나를 나답지 못하게 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문화, 언어, 인종, 젠더 등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PTSD 앓는 참전용사와 선주민···‘슬픔의 공동체’가 만든 겹의 이야기
회전초를 좇는 여정은 이동의 연속이었다. 회전초가 나타났다는 제보를 받으면 차를 타고 달려갔다. 드넓은 미국 서부를 달리는 차를 운전해준 이는 PTSD를 앓고 있는 이라크 참전용사였다. 참전용사의 친구가 아파치족이었고, 그곳에서 벌어지는 광산개발을 둘러싼 갈등에 대해 듣게 된다.
회전초의 이동처럼, 이야기가 이야기를 만나 스스로 굴러갔다. ‘더 텀블 올 댓 폴’은 전쟁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참전용사, 땅과의 관계를 중요시 여기는 아파치족 선주민, 아파치 족이 신성하게 여기는 산을 폭파해 구리광산을 개발하려는 기업과 정부 등의 이야기가 만나 여러 겹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흥미로운 것은 참전용사들의 단체인 ‘커먼 디펜스(Common Defence)’가 아파치족의 싸움을 돕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참전용사와 선주민의 이질적인 조합을 하나로 묶는 공통분모는 ‘슬픔의 공통체’다. 최찬숙은 “군인들이 전쟁에서 겪은 트라우마가 미국 선주민이 겪어온 역사적 트라우마와 만나 밀접한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라며 “선주민 출신 참전용사들도 많았다. 선주민보호구역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경제적 해결책인 면도 있다”고 말했다.
“굉장히 많은 젊은이들이 파병을 나갔다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었어요. 그들이 제일 자괴감을 느끼는 부분은 애국심과 같은 대의를 위해 파병을 자원했는데, 사실은 자원 개발이나 국가·기업의 이익을 위한 일들을 하다가 돌아오게 된다는 점이었습니다.”
‘더 텀블 올 댓 폴’은 아파치족 부족장, 이라크전 참전 용사, 아파치족 참전 용사 세 사람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세 명의 역할을 맡은 배우들은 전쟁포로와 같이 맨 바닥에 앉거나 기대어 이야기를 이어간다. 실제 전쟁포로들이 수용소에서 지내는 모습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최찬숙은 “그들을 엮는 가장 강력한 유대감이 ‘우리는 아직 전쟁에서 벗어나지 못한 포로’라는 거였다”고 말했다.
하나로 엮기 어려운 복잡한 이야기가 담담하면서도 시적인 대사로 관람객들에게 전달되며 울림을 준다. 트라우마를 얻기 전과 후를 뱀이 허물을 벗기 전과 후에 비유해 “이전의 몸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하거나, 아파치족이 광산개발 반대를 위해 ‘신성한 땅’의 산 정상까지 달리면서 “꾹꾹 눌러 담는 호흡이고 땅을 패여 내는 기도”라고 말하는 장면 등이다.
회전초를 좇는 여정이 어쩌면 너무 멀리까지 간 것일 수도 있다. 아파치족 선주민들의 이야기와 애리조나 광산개발의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작가 자신에게도 거리가 멀다. 최찬숙은 “‘당사자성’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다. 얼마나 많이 참여하고 관여되어야 ‘이야기할 자격’이 주어질까”라며 “젊은 학생이나 예술가들이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 다루는 것을 굉장히 조심스러워하는 경향이 있어서 이런 질문을 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멀지만 가까운 이야기이기도 하다. 전쟁과 이주, 개발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진다. 회전초에서 출발한 ‘텀블’ 시리즈는 3부작으로 제작 예정이다. 최찬숙은 마지막 3부에서 ‘온도’에 초점을 맞출 계획이다. “광산 개발로 지반을 파괴하면 지하수의 유출로 지열이 2~3도 상승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어요. 온도의 변화에 대해 관람객이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작업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백남준아트센터의 기획전 ‘숨결 노래’에선 앤 덕희 조던이 인공 어리석음을 주제로 백남준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선보인 신작, 에글레 부드비티테의 퍼포먼스, 우메다 테츠야의 미술관 공간을 탐구하는 투어 퍼포먼스 등도 함께 볼 수 있다. 전시는 12월15일까지.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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