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룩백〉, 참담함과 무력감 뒤의 일상 [콘텐츠의 순간들]

조경숙 2024. 11. 3.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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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백〉은 동일본 대지진과 교토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방화 사건을 떠올리며 그린 만화다. 성취의 기쁨과 속수무책의 고통까지 여러 감정을 통렬하게 일깨운다.
애니메이션 영화 <룩백>은 동명의 만화책을 원작으로 한다. 초등학생 시절 학보에 만화를 연재하면서 알게 된 친구 사이의 이야기를 담았다.

아직 한 해가 넘어가려면 얼마간의 시간이 남았지만, 그래도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니 지나온 시간을 되짚게 된다. 늘 그렇듯 아쉬운 점도, 기뻤던 순간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올해는 특히나 어려움이 더 많았다. 게다가 가을이 되자마자 예기치 못한 부고들이 날아들었다. 절친한 이가 아니었는데도 심리적 충격이 컸다. 하루는 갑작스럽게 집안 곳곳을 박박 청소했다가, 다음 날엔 풀 죽어 온종일 누워만 있었다. 뒤죽박죽 엉킨 머릿속으로 때로는 우울감이, 대개는 질문들이 차올랐다. 다른 사람들과 기분 좋게 웃고 떠들다가도 돌아서면 마음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그런 시간을 보내다가 영화관에 갔다. 러닝타임이 1시간 남짓인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다는 〈룩백〉을 보기 위해서였다. 실은 작품에 대한 기대감보다도 만화 평론가로서 세간에 유명한 작품을 봐야 한다는 의무감이 더 큰 상태였다. 담담한 표정으로 스크린을 마주하고 있었는데, 이게 웬걸.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눈물이 뚝뚝 떨어지더니 나중엔 얼굴이 눈물로 온통 뒤덮였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감정이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영화를 본 지인들에게 물어보니 다들 나와 마찬가지로 눈물범벅이었다고 했다. 우리는 이 영화에 등장하는 감정을 낱낱이 알고 있었다. 좋아하는 일을 어떻게든 잘해내고 싶어서 최선을 기울이던 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순간, 친구와 함께 나누던 성취의 기쁨, 소중한 이를 잃은 후 찾아오는 속수무책의 고통까지도. 이런 마음들을 그저 비스듬하게 그려낼 수도 있지만, 이 만화는 통렬하게 감각하도록 한다. 우리가 잊고 있던, 혹은 빠르게 소화해버리려던 감정의 페이지를 기어코 마지막 문장까지 읽게 하려는 듯이.

개봉한 〈룩백〉은 동명의 만화책을 원작으로 한다(이 글에 스포일러가 있음을 미리 밝힌다). 원작 만화는 〈체인소맨〉으로 유명한 작가 후지모토 다쓰키가 그렸다. 〈룩백〉의 주인공은 후지노와 쿄모토로, 이 둘은 초등학생 시절 학보에 4컷 만화를 나란히 연재하며 서로를 알게 됐다. 다만 쿄모토는 일명 ‘히키코모리’로, 집 밖으로 나오지 않으며 등교를 거부하고 있어 둘이 만날 일은 없었다. 후지노는 유쾌하고 재치 있는 스토리텔링으로 4컷 만화를 그려내는 반면, 쿄모토는 풍경 위주의 아름다운 그림들로 칸을 채운다. 쿄모토의 그림을 보고 충격받은 후지노는 서점으로 달려가 만화 작법 책을 사고, 노트를 인체 드로잉으로 수북이 채워가며 만화 그리기에 매진한다. 날씨가 맑아도, 흐려도, 비가 와도, 계절이 몇 번이나 흘러가도 여전히 책상에 앉아 연필을 바쁘게 움직인다.

좋아하는 것을 잘해내고 싶은 그 열망을 누군들 모르겠는가. 심지어 그것이 꺾이는 마음마저도 우리는 안다. 후지노가 수년간 노력을 기울여 그린 만화 옆에 그사이 눈에 띄게 성장한 쿄모토의 작화가 나란히 놓이자, 무언가 툭 끊어진 듯 후지노는 만화를 그만두고야 만다. 그러나 얄궂게도, 후지노가 다시 만화를 시작하게 된 것도 쿄모토 때문이다. 선생님에게 등 떠밀려 쿄모토의 집으로 졸업장을 건네주러 간 날, 생각없이 그린 4컷 만화가 쿄모토의 방 문틈으로 날아들어가며 쿄모토와 후지노가 드디어 대면하게 된 것이다. 이길 수 없는 라이벌이라 생각했던 쿄모토가 후지노에게 팬이라며 다가서자 후지노는 다시 펜을 잡게 된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 쿄모토와 함께. 쿄모토가 배경을 담당하고 후지노가 서사와 캐릭터를 그리며 1년여간 매진한 끝에 이들은 공모전에 당선된다. 그리고 ‘후지노 쿄’라는, 둘의 이름을 섞어 만든 이름으로 데뷔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뿐이다. 수년간 공동 작업을 해왔지만, 쿄모토가 불현듯 다른 길을 가고 싶다고 선언한다. 후지노와 함께 만화를 연재하지 않고 그림을 더 배워보겠다고 말이다. 장기 연재를 제안받고 꿈이 이뤄졌다고 여긴 기쁨의 순간, 불현듯 날아든 쿄모토의 선언에 후지노는 날 선 말을 쏟아내고 만다. 결국 둘은 갈라선다. 후지노는 홀로 연재를 시작하고, 쿄모토는 미대에 진학한다. 그러던 어느 날, 후지노는 한 뉴스를 접한다. 뉴스에선 믿을 수 없는 소식이 쏟아진다. 미대에 한 괴한이 난입했으며, 학생들을 향해 흉기를 휘둘렀다고. 학생이 열 명 넘게 사망했다는데, 쿄모토도 그중 하나였다.

돌아서서 뒤를 보는 시간

쿄모토를 떠나보낸 후지노는 그의 방문 앞에 서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그러다가 우연히, 쿄모토를 처음 만났을 때 그린 4컷 만화를 다시 마주하게 된다. 쿄모토를 밖으로 나오게 했던 그 한 장의 4컷 만화가 결국 쿄모토를 사망에 이르게 한 것이라는 자책으로 이어진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안다. 그러나 불현듯 사고를 마주하면 누구라도 탓하게 되지 않는가. 그중에서도 가장 쉬운 타깃은 언제나 나 자신이니까. 그때 절망에 빠져 있던 후지노 앞에 기적같이 또 다른 4컷 만화 한 편이 도착한다. 만화를 집어 든 후지노는 비로소 닫혀 있던 쿄모토의 방문을 연다. 그곳에는 후지노가 연재하던 작품의 포스터와 만화책이 잔뜩 쌓여 있다. 눈물을 삼키며, 후지노는 다시 방문을 나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향한다. 쿄모토와 후지노가 함께 만화를 그려내던, 바로 그 책상 앞으로. 그러곤 다시 머리를 질끈 묶은 채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작가는 동일본 대지진과 교토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방화 사건을 떠올리며 이 만화를 그렸다고 한다. 피해 현장을 목도하며 느낀 참담함,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만화로 옮겨내는 동안 만화와 함께하며 즐거웠던 새로운 것들이 떠올랐다고도 한다. 물론 그 많은 감정이 지나간 뒤에도 이전처럼 똑같이 책상에 앉아 그림을 그릴 뿐이지만 일상을 이어가는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떠나보낸 이들을 추모할 수 있다. 일상은 잊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기억하기 위한 것이다. 다만 여기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이전 단계들을 충실히 지나야 한다. 슬픔과 고통, 절망, 그리고 이 모든 길 끝에 기적처럼 찾아오는 한 줌의 용기마저도. 그때그때 찾아오는 감정들을 성실하게 씹어 넘기고 나서야 우리는 다시, 그러나 새로운 원점 앞에 설 수 있다.

그러니 지금 슬픔에 빠져 있다면, 애써 눈물을 거두지 말고 끝까지 울자. 〈룩백(Look Back)〉이라는 제목처럼, 돌아서서 뒤를 보는 시간은 모두에게 필요하다. 나도 올해의 남은 시간은 슬피 울며 지내려 한다. 애써 괜찮아지지 않는 대신, 지금까지처럼 계속 글을 쓸 생각이다. 맑아도, 흐려도, 비가 와도 계속 이 자리에서.

조경숙 (만화 평론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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