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적 감시하는 현안, 왜 멀리까지 볼 수 있게 했을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경기일보 2024. 11. 3. 09:0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현안은 원래 성벽 가까이 있는 적을 감시하는 것인데 왜 멀리까지 볼 수 있도록 설계했을까. 이강웅 고건축전문가

 

치나 옹성을 성 밖에서 볼 때 위에서 아래로 길게 파인 홈을 볼 수 있다. 이것을 현안이라 한다. 성 밖 적군의 처지에서 보면 긴 홈의 맨 위에 상대방의 눈이 있으므로 ‘성 위에 매달린(懸) 눈(眼)’에서 ‘현안’이라 이름 지었다.

정약용의 현안도설을 참고하면 “현안이란 적을 감시하기 위해 만든 성의 부속적인 장치”라고 정의하고 있다. 또 “적병이 성벽 밑에 바짝 붙어 괭이를 가지고 구멍을 뚫어 성벽을 헐거나 사다리를 사용해 성을 올라와도 아군은 아래를 내려다보지 못하니 어찌 방어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까닭에서 현안이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라고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이로 미뤄 현안은 성벽 가까이 접근한 적군을 감시하는 장치임이 분명하다. 현안도설에도 ‘적지부성(성에 붙어 있는 적군)’, ‘적도성하(성벽 아래까지 도착한 적군)’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현안은 성벽 가까이 있는 적군을 감시하는 기능이 확실하다. 그런데 현안의 이런 목적과는 달리 실제 보이는 범위가 매우 멀다. 지난편에 시설물 유형별로 하나씩 계산한 결과 최대 가시거리가 5.1m, 8m, 12.3m, 13m, 13.8m, 14.5m로 나왔다. 예상을 뛰어넘는 거리다.

이 결과를 보고 두 가지 의문이 생긴다. 하나는 현안의 목적은 성벽 가까이에 붙은 적을 감시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왜 불필요하게 멀리까지 볼 수 있도록 설계했을까, 다른 하나는 왜 측면은 설치하지 않고 전면에만 설치했을까다. 이런 의문을 풀어보자.

치의 측면은 맞은편 치에서 방어와 공격을 하므로 현안을 설치할 필요가 없다. 이강웅 고건축전문가

먼저 왜 좌우 측면은 설치하지 않았을까에 대해 살펴보자. 현안의 주목적은 감시 사각지대를 관찰하기 위함이다. 거꾸로 말하면 사각지대가 아닌 곳에는 설치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좌우 측면이 이 경우가 된다. 치성의 측면은 감시 체계가 이중으로 갖춰져 있다. 하나는 인접한 원성이 담당한다. 바로 옆의 원성에 있는 타구와 총안을 통해 돌출된 측면에 가까이 붙은 적군을 감시하거나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이웃하는 맞은편 치가 담당한다. 돌출된 맞은편 치에서 감시와 공격을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철성(凸城), 즉 치를 돌출시킨 목적이다. 현안도설에도 “치가 서로 마주 보게 돼 있어 탄환이나 화살이 서로 미칠 수 있으므로 적병이 감히 성벽 밑으로 가까이 접근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또 화성을 건설하기 200년 전에도 류성룡은 ‘일치포루 불수현안’, 즉, 포루가 하나 있으면 현안이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맞은편에 치가 있으면 측면에 현안을 설치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포루의 당시 의미는 돌출된 치성과 그 시설물을 말했다. 따라서 정약용은 최종적으로 ‘전면에만’, ‘각각 몇 개씩’, ‘옹성과 여러 치성’에 현안을 두는 것을 제안한다. 여기서 여러 치성이란 원성에서 돌출된 인공으로 만든 치성을 의미한다.

이제 왜 불필요하게 멀리까지 볼 수 있도록 설계를 했을까에 대해 살펴보자. 만일 현안을 설치하지 않는다면 치, 포루, 적대, 옹성 경우에는 치성 위에 설치된 여장의 타구, 총안이 감시를 담당해야 한다. 공심돈의 경우에는 포혈(공안·空眼)이 맡는다.

서북공심돈의 경우 성에서 11.5m까지는 감시 사각지대가 된다. 그림에 붉은 표시를 한 부분이다. 이강웅 고건축전문가

공심돈의 경우 공안이 어느 정도 감시할 수 있는지를 계산해 봤다. 공심돈 공안의 본래 기능은 포를 쏘는 구멍이다. 하지만 어두운 내부에 빛을 받아들이는 채광창의 기능을 했고 그 구멍으로 공심돈 밖의 적군을 감시하는 기능도 했다.

화성사업소 서북공심돈 실측조사보고서에 실린 ‘공안의 응사각(應射角) 범위도’를 활용했다. 계산해 보면 성벽으로부터 11.5m 지점 바깥이 응사 범위가 된다. 이 말은 11.5m 지점 이내 공간은 응사 범위가 아니라는 의미다. 즉, 치성의 전면 성벽에서 11.5m까지는 포를 쏠 수도, 적을 볼 수도 없다는 말이다. 치성 전면에 11.5m까지 감시 사각지대가 생긴 것이다.

타구, 총안, 공안으로는 치성의 전면에 감시할 수 없는 공간이 발생했다. 감시 사각지대에 대한 대책이 필요했다. 정조는 현안을 눈여겨봤다. 성벽 바로 앞까지 접근한 적군을 감시하던 현안 기능에 먼곳까지 감시하는 역할을 추가한 것이다. 그것도 감시 사각지대인 11.5m까지 볼 수 있도록 현안을 만들었다. 이것이 현안 본래 목적보다 더 멀리 볼 수 있게 설계한 이유다. 서북공심돈은 전면 성벽에서 11.5m까지는 현안이, 11.5m 밖은 공심돈의 공안(포혈)이 감시를 분담하는 체계가 이뤄진 것이다.

멀리 볼 수 있게 설계한 자초지종을 알게 되니 잘못 복원된 점이 더욱 아쉬워진다. 잘못된 작은 부분이 현안의 감시 범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영향을 끼친 게 아니라 존재를 무시한 느낌이다.

현안 구멍이 있는 면과 현안이 시작되는 면 사이가 중요하다. 10cm만 두꺼워져도 가시거리가 엄청나게 줄어든다. 이강웅 고건축전문가

정리하면 치의 측면에 현안을 설치하지 않은 이유는 맞은편 치와 바로 옆의 원성이 감시와 공격을 이중으로 담당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래 목적과 달리 멀리까지 볼 수 있게 한 이유는 감시 사각지대를 현안에 담당시켰기 때문이다.

현안에 대한 필자의 평가는 이렇다. 현안은 돌출된 치의 전면에 설치한 “돌출되지 않은 또 하나의 치와 같다”고 평가한다. 치 한 개와 맞먹는 가치를 지녔다고 본다. 현안의 전면 설치 이유와 역할 추가에 대해 살펴봤다. 감시 사각지대까지 담당할 수 있게 가시권을 확장한 현안을 보면서 류성룡과 정조의 지혜를 엿봤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전문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경기일보 webmaster@kyeonggi.com

Copyright © 경기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