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열에게 '물방울'만 있는 것 아니다 [아트씽]

아트씽 기자 2024. 11. 3.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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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지연의 MMCA 소장품이야기(7)]
김창열 화백 '물방울' 탄생 이전 작업
'무제'란 이름에 無 아닌 울림 담아
눈물 시절, 고름같은 형상 시기 지나
마침내 도달한 투명한 '물방울'까지
김창열 '무제' 1969경, 캔버스에 유화, 20.5x20.7cm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서울경제]

20세기 중반 추상회화의 유행 아래 한국에서도 많은 작가들이 특정한 의미의 제목을 짓지 않고 해석의 여지를 두기 위해 ‘무제’라는 제목을 자주 사용했다. 특별한 의미를 지니거나 이미지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관람객들에게 해석의 권한을 최대한 누리도록 한 의도도 있었다. 김창열의 1969년 전후로 제작된 ‘무제’ 작품들은 작가의 회고에 따르면 “그 세대 딴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하면서도 뭔가 울림이 있을 것 같은 그런 제목으로서 무제를 달았다”라고 말한 바 있다. 작가는 무제라는 것을 주제로 내세운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어색하며 특정한 의미를 담은 것은 아니라고 말하며 작품을 보는 관람객이 편하게 느끼면 된다고 설명했다. 이 작품들은 작가가 김환기의 주선으로 록펠러 재단 지원금을 받아 1966년부터 1968년까지 뉴욕 아트스튜던트 리그(Art Students League)에서 판화를 공부할 시기 제작된 것들이다.

김창열 '무제' 1969경, 패널에 혼합재료, 38x38cm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작가는 당시 기하학적 도형을 화면 중심부에 구성적으로 배치하면서 서로 다른 재료들을 실험함과 동시에 원 형태는 입체적으로 보이게끔 하는 옵 아트(Op Art)의 영향을 받은 경향을 추구했다. 원형 군집을 둘러싼 여러 겹의 색선과 주변 처리는 색면추상의 영향도 보여주고 있다. 크기가 각각 다른 여러 원은 음영이 있어 마치 작은 구슬처럼 보이는데 그러한 무기질의 매끈한 알 혹은 핵 같은 형상 주변으로 붓질이 느껴지는 굴곡진 선들이 둘러져 있다. 유기적인 곡선 부분은 채도가 높은 색부터 무채색까지 색상변화를 보임으로써 내외부의 질감, 형태, 색상의 차이는 끊임없이 분열하는 세포와 같은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 이때 재료와 제작 방식은 단순히 캔버스에 유화물감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합판, 유리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했고 부업으로 일하던 넥타이 공장에서 배운 스프레이 기법 등을 사용했다.

당시 뉴욕은 팝아트, 미니멀리즘, 추상표현주의, 네오다다 등 세계 현대미술사의 주요한 경향들이 들끓던 시기였다. 1961년 제2회 파리 비엔날레,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출품하면서 작가는 새로운 미술을 갈망했고 세계 미술계를 직접 경험해보고자 했다. 김창열은 뉴욕에서 생활하면서 예술혼을 불태울 수 있는 기회로 삼았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일들을 해야 했다. 치열했던 내적 고뇌와 예술적 실험을 바탕으로 한 그의 작품은 이전 시기 보여주었던 슬픔과 상처의 절규와 같은 화폭에서 벗어나 냉정하고 차가운 화면을 만들게 됐다. 작가는 생전 이 시기 작품에 대해 ”나름으로 드라이해져 가는 시대 작품이에요. 나프탈렌처럼. 나 혼자 울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자괴심 같은 것을 느꼈을 때예요“라고 언급했다.

김창열 '무제' 1969경, 캔버스에 유화, 21x21cm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69년 김창열은 백남준의 도움으로 제7회 전위예술축제(Avant Garde Festival)에 참가했다. 전위예술의 본고장에서 백남준, 존 케이지, 오노 요코, 요르그 임멘도르프 등과 함께 자신의 최신 작품을 선보일 수 있게 됐다. 이 전시에 작가는 투명한 플렉시 글라스로 만든 조각작품 ‘무제’를 출품했는데 길쭉한 형상이 땅에서 구부러진 채 솟아오르는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그동안 갈고 닦았던 자신만의 작품세계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으며 이후 파리로 활동 거점을 옮겼다.

물방울 화가로 잘 알려진 김창열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일제강점기 때와 한국전쟁의 처절했던 상흔을 화폭에 담아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물방울은 고름인지 무엇인지 모르는 고형의 액체가 흘러내리는 듯이 보이는 형상에서 출발해 1970년 파리로 이주한 시기 이후 투명한 물방울 형상으로 변한 것이다. 상처 어린 기억과 현재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예술작품으로 끝없이 풀어내려는 작가의 노력이 말과 그림으로도 다 담아낼 수 없기에 오히려 이 시기 ‘무제’라는 제목의 작품들은 더 많은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담아내고 있는 듯 하다. 평소 말을 잃어버린 듯 말수가 적었던 작가였기에 이 작품들은 작가의 고요하고 고독한 내면 세계에서 소리없는 외침같은 의미를 지닌 듯 다가온다.

김창열의 ‘무제’는 국립현대미술관 청주에서 개최 중인 ‘이름의 기술’ 전시에 출품되었다. 전시는 내년 2월 23일까지.

김창열' 무제' 1969년, 캔버스에 유화물감, 25.7x25.5cm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김창열: 1929년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나서 조부에게 붓글씨를 배웠고, 광성고보 시절 외삼촌에게 데생을 배워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16세 때 월남하여 이쾌대의 성북회화연구소에 다녔다. 1948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했으나 6·25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했고 경찰학교에 지원해 1955년까지 경찰로 활동했다. 1955년 고등학교 교사 자격 검정시험에 합격한 이후 서울과 수도권에서 미술교사로도 일했다. 1957년 장성순, 하인두, 김서봉 등과 ‘한국현대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미국공보원에서 첫 동인전을 개최했으며 1958년까지 지속했다. 1961년 제2회 파리 비엔날레에 참가했고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출품작가로 선정됐다. 1965년 록펠러 재단 후원으로 뉴욕 아트스튜던트 리그에서 수학했다. 1969년 전위예술 축제에 참가한 이후 1972년 파리의 살롱 드 메(Salon de Mai)에서 물방울 그림 ‘Event of Night’(1972)를 출품했다. 이후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활동했고 2004년 프랑스 국립 쥬드폼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2009년 부산시립미술관, 2014년 광주시립미술관에서 회고전을 개최했다. 2016년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을 개관해 작품을 대량으로 기증했고 2021년 작고했다.

▶▶필자 류지연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품수장센터운영과장이다. 1996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입사해 전시기획, 미술관교육, 소장품연구, 레지던시, 서울관·청주관 건립TF 등 미술관에 관한 거의 모든 분야를 섭렵하며 29년째 미술관을 지키고 있다. 영남대 미학·미술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영국 에식스대학교(Essex University)에서 미술관학(Gallery Studies)을 공부했으며, 서울대에서 미술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화여대 겸임교수(2022~2023)를 비롯해 인천시립미술관·대구미술관 자문위원, 서울문화재단 전시 자문위원, 예술경영지원센터 원로작가 디지털 아카이브 자문위원, 성북문화원·대안공간 공간291 자문위원, 증도 태평염전 아티스트 레지던시 심사위원 등을 맡았다.

아트씽 기자 artseei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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