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가 백악관에 둔 ‘그 그림’…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 닥치자 [0.1초 그 사이]
단순한 구도·세련된 색감…가장 미국적인 작가
시장 거래 거의 없어 경매만 나오면 ‘경합’
‘찹 수이’ 1040억 역대 최고가 거래
[0.1초 그 사이]는 역대급 몸값을 자랑하는 작품의 면면을 들여다보는 코너입니다.
한 작품이 명성을 얻게 되는 데는 작품성을 넘어선 그 ‘어떤 것’이 필요합니다. 안목이 뛰어난 컬렉터나 큐레이터의 손을 거치는 것은 물론 스캔들, 법적 분쟁, 도난 사건, 심지어 예술계를 뒤흔든 저항까지…. 작품의 명성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이처럼 다양합니다.
그리고 평판 높은 이런 미술품들은 단 0.1초 차이로 행방이 갈라지게 되죠. ‘찰나의 순간’으로 승부가 나뉘는 치열한 미술시장에서 선택받은 그림들, 그 안에 얽힌 속사정을 들려드립니다.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알프레드 히치콕을 스릴러 거장으로 자리매김하게 한 ‘이창’(1954), 20세기 SF(Science Fiction) 영화의 전설 그 자체인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1982), 멜로 드라마의 고전적 품격을 지닌 토드 헤인즈의 ‘캐롤’(2015), 그리고 올해 베니스 국제영화제 최고의 영예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현재 국내 극장 상영 중인)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룸 넥스트 도어’(2024)까지.
20세기와 21세기를 넘나드는 대가들의 영화에 절대적인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인간 내면의 고독을 그린 사실주의 화가, 바로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1882~1967)의 감성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죠. 스콧 감독은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1942) 그림 복사본을 제작팀 코앞에 끊임없이 흔들었을 정도고, 알모도바르 감독은 영화의 핵심 장면 이미지를 호퍼의 ‘일광욕하는 사람들’(1960)에서 따와 특유의 짙은 여운을 남겼습니다.
호퍼 작품이 뭐 그리 특별하기에 내로라하는 영화계 거장들이 주저 없이 그 이미지를 가져왔을까요. 그럼에도 명성에 비해 미술시장에서는 그의 작품을 찾아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시장에서 작품을 사기가 어려운 것은 호퍼가 1967년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내가 2500여점에 이르는 대부분의 작품을 미국 뉴욕 휘트니미술관에 기증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호퍼가 일생 동안 그린 유화는 360여점에 불과한데요. (파블로 피카소나 클로드 모네가 1800~2000여점의 유화를 남긴 것과 비교하면 적은 수입니다.) 그래서 이따금씩 호퍼의 개인 소장 유화 작품이 경매에 나오기만 하면 굉장히 높은 거래가에 판매되곤 합니다. 시장에서는 개별 작품의 가치보다 작가의 명성에 더 크게 반응하고, 여러 작품이 거래되는 작가보단 거래 건수 자체가 적은 작가 작품에 가치를 더 매기거든요.
이는 지난해 5월 뉴욕에서 열린 소더비 경매에 출품된 호퍼의 풍경화 ‘사우스 트루로의 코브의 헛간’(1930-1933)이 치열한 경합 끝에 약 97억원에 판매된 게 그리 놀라운 사실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오히려 미술계에서는 낮은 추정가에 해당하는 금액에 거래됐다고 보고 있고요.) 2018년 이후 처음으로 휘트니미술관이 소장품을 처분하는 굉장히 이례적인 사례였으니, 당시 경매는 호퍼의 작품을 구매할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같은 기회처럼 여겨졌습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미국 권력의 핵심인 백악관에 ‘사우스 트루로의 건장한 코브의 집’(1930-1933)과 함께 걸린 두 점의 호퍼 그림 중 하나였습니다. 지난 2014년 2월 당시 대통령이었던 버락 오바마가 휘트니미술관에서 대여한 이 작품을 감상하는 사진이 언론에 공개됐는데요. 대통령 집무실에 호퍼의 그림 두 점이 걸렸다는 사실만으로도, 호퍼의 작품이 미국인들 사이에서 얼마나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지 엿볼 수 있죠.
그럼 백악관에 걸렸던 그 그림을 들여다볼까요. 캔버스 위에는 미국 매사추세츠 트루로 지역의 고요하고 평온한 시골 풍경이 펼쳐져 있습니다. 붉은 갈색이 감도는 오래된 오래된 헛간들이 자리하고, 넓게 트인 벌판이 한적함을 더합니다. 맑고 파란 하늘 아래 따스한 햇살이 스며들어 전반적으로 잔잔한 고요를 머금은 장면이 그려집니다. 호퍼 특유의 강렬한 빛과 짙은 그림자는 더욱 또렷이 드러나고요. 미술 전문가들이 이 작품을 두고 “전통적이고 소박한 아름다움이 담긴, 미국적 정서가 상기된다”라고 평가하는 데는, 이 모든 요소가 어우러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바마가 이 그림을 집무실에 걸어둔 이유를 특별히 밝히진 않았는데요. 어쩌면 이 작품이 선사하는 고요와 사색의 분위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분주하고 복잡한 정치의 중심에서, 오바마는 이 작품을 보며 내면의 평온을 되찾고자 했던 것만 같거든요.
1882년 뉴욕에서 태어난 호퍼는 처음부터 순수미술로 공부를 시작하진 않았습니다. 당초 그의 부모님은 “화가로 밥벌이하기는 어렵다”며 상업 삽화가의 길을 권했고, 호퍼는 그 조언을 따라 일찌감치 현실적인 직업으로 삽화가를 선택했죠. 그렇지만 순수미술에 대한 열정은 늘 그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틈틈이 개인 작업을 이어가며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해 나갔습니다. 삽화가로서 경험은 그의 작품에 독특한 구도 감각과 이야기를 담는 힘을 더해주기도 했지만, 호퍼는 점차 이를 뒤로하고 순수미술에 몰두했고요.
특히 예술적 영감을 넓히기 위해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났는데요. 당시 미술계를 주도한 입체주의 같은 전위미술의 영향에 쉽게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자기만의 색채와 방식으로 고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호퍼의 우직한 예술가적 태도가 돋보이는 순간이죠.
이 시기 호퍼는 에두아르 마네와 에드가 드가의 화풍에 매료돼 그들의 작품을 깊이 탐구했습니다. 그는 이들 그림 속에서 빛과 그림자가 춤추듯 얽히는 방식과,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강렬한 분위기를 빚어내는 기법을 배웠습니다. 실제로 마네와 드가의 흔적은 호퍼의 작품 곳곳에 은은하게 스며 있는데요. 고요 속에 서린 서정적인 긴장감과 강렬한 빛이 깊게 드리우는 그림자가 바로 그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호퍼의 작품에는 현대 사회에서 느끼는 고독과 고립감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특히 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개 창문을 통해 밖을 응시하거나 혼자만의 세계에 몰입한 모습을 보입니다. 이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마치 그들의 일상을 몰래 엿보는 듯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요.
또 호퍼의 작품은 간결한 구도와 색채, 강렬한 빛과 그림자 효과를 통해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데요. 이 때문에 특별한 예술적 배경지식이 없어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의 인물들은 대화를 나누거나 활발히 움직이는 대신, 정지된 순간 속에서 깊은 사색에 잠긴 듯 묘사돼 있죠. 특히 외딴 주유소나 인적이 드문 거리, 비어 있는 호텔 방 등 현대 문명 속 익숙하지만 소외된 공간들이 배경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이는 인간 존재에 대한 보편적이고도 강렬한 정서적 울림을 전달하는 지점이고요.
“만약 당신이 그것을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림을 그릴 필요가 없다.” 이처럼 호퍼는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과 순간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고독과 고요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려운 감정을 시각적으로 풀어낸 결과인 겁니다.
이 즈음에서 60여년에 걸친 그의 예술세계를 단 하나의 작품으로 응축해 본다면 반드시 언급해야 할 그림이 있습니다. 바로 미국의 아트 인스티튜트 오브 시카고가 소장하고 있는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1942)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폭격을 당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도 호퍼가 그저 캔버스 앞에서 작업에만 몰두했던 바로 그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배경이 된 길모퉁이의 레스토랑은 호퍼가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의 작은 식당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세 명의 손님과 직원, 그림에는 네 명의 고독한 인물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불안한 장면 속 인물들은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단절돼 있는 모습입니다. 여자는 샌드위치를, 남자는 담배를 손에 쥐고 있네요. 다른 손님은 등 돌린 채 앉아 있고요. 직원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마다 각자의 내면에만 몰두해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출입문이 존재하지 않죠. (이 작품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그래서 인물들이 공간에 갇힌 듯한 느낌이 듭니다. 마치 수족관 속 물고기를 보는 것만 같기도 하고요.
늦은 밤 도시의 삭막한 풍경과 도시인의 쓸쓸한 정서를 호퍼는 단 세 가지 색조로 드러냈습니다. 건물의 창과 거리를 채운 차가운 초록색은 고립감을, 여자의 원피스와 장식적 요소에 사용된 붉은빛 갈색은 긴장감을, 인물을 감싸는 레스토랑 조명인 부드러운 노란색은 따뜻함과 고독감을 동시에 드러냅니다. 이런 색 배치는 익명성이 지배하는 도시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인물간 심리적 거리와 공간의 정서를 강렬하게 부각시킵니다. 그림 속 쓸쓸하고 고요한 밤의 정취가 한층 더해지고요.
살아생전 호퍼의 명성은 국내외에서 모두 확고했습니다. 특히 그는 미국 미술계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1933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 최초의 미국인 화가 중 한 명이었고요. 이어 그는 미국 미술협회와 휘트니미술관 등 여러 저명한 기관에서 각종 수상과 영예를 안았습니다.
그리고 1952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미국 대표로 선정된 점은 호퍼가 사실주의 화가로서 미국 미술의 상징적인 존재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계기였습니다. 당시 추상표현주의가 주류로 떠오르며 전통적 화풍은 다소 주목받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호퍼는 자신의 사실주의적 스타일을 고수하며 자신의 길을 걸었거든요. 이를 제대로 인정받은 건데요.
“세상의 진짜 모습과 그 속의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고 싶었다.” 호퍼의 철학을 단번에 알 수 있는 말처럼, 시대가 변해도 감정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호퍼의 일상 속 장면은 ‘돈의 가치’로도 유효했습니다. 기록적인 신화를 써 내려간 그의 작품값이 이를 말해주죠.
영화 ‘캐롤’(2015)의 영화적 배경이 된 호퍼의 작품 ‘찹 수이’는 지난 2018년 경매에서 무려 약 1040억원에 판매됐습니다. 뉴욕의 한 중국 음식점에서 두 여성이 마주 앉아 대화하는 모습이 담긴 이 작품은 호퍼의 그림들 가운데 가장 비싸게 거래된 작품입니다. 이어 지난 2013년 미국 펜실베니아 순수예술 아카데미가 내놓은 호퍼의 그림 ‘동풍이 부는 위호켄’(1934)은 약 520억원에 판매됐고요.
그전인 2006년 경매에 나온 호퍼의 작품 ‘호텔 창문’(1955)은 약 350억원에 거래됐습니다. 호퍼의 예술적 지위가 확고하던 1950년대 중반에 완성된 작품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리 놀랍지 않은 가격입니다. 특히 이 작품은 소유 이력 면면도 화려합니다. 방대한 컬렉션을 갖춘 스페인의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 포브스 등을 발행하는 미국의 언론 재벌 말콤 포브스, 영화배우 스티브 마틴 등이 같은 작품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가장 미국적인 화가로 인식되는 명성, 미국 현대미술에서 시대의 아이콘 위치를 차지하는 화가, 백악관이라는 특수한 장소에 그림이 걸린 이력에 영화 감독 마틴 스코세지, 작가 노먼 메일러 등 유명인들이 작품을 소장한 기록까지 갖추고 있으니, 호퍼의 그림을 구매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한 건 당연한 일입니다. 무엇보다 호퍼의 작품이 시장에 드물게 나오는 만큼 희소성까지 높으니, 세계적인 미술관과 개인 컬렉터 간의 치열한 경쟁이 언제나 예고되는 거죠.
그런데 재밌는 건 “당신의 그림이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것 같나요”라고 질문에 대한 호퍼의 답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왜 내 그림을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다”며 자신의 인기에 담담한 태도를 가졌음을 보여줬거든요. 독자 여러분들은 호퍼의 작품에서서 무엇을 느끼셨을까요, 오늘날에도 그의 그림이 왜 이토록 사랑받는다고 생각하실까요. 기자는 그저 호퍼의 그림을 골똘히 보며 제대로된 고독을 곱씹어볼뿐입니다. 더 깊은 내면으로 침잠하는 시간이 이상하리만큼 쓸쓸하지만은 않은 것 같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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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A Chance to Walk Into Edward Hopper’s World, James Barron, The New York Times.
Edward Hopper’s ‘Nighthawks’ Captures the Isolation of American Modernity. Here Are 3 Things You Might Not Know About It, Bobby McGee, Artnet News.
dsu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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