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를 감싸도는 최고의 질감”…집안 기둥 뿌리 뽑지 않고 즐기는 작은 사치 [전형민의 와인프릭]

전형민 기자(bromin@mk.co.kr) 2024. 11. 2.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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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 부르고뉴 피노누아 이야기 후편 입니다. 전편에 이어서 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부르고뉴 피노누아는 많은 와인 애호가들에게 종착지로 불리곤 합니다. 맑고 일견 투명하기까지 한 붉은색, 장미향과 코를 간지럽히는 다양한 향신료의 내음, 입 속에서 느껴지는 상큼한 붉은 과실류의 풍미와 부드럽게 혀를 감싸는 질감까지…

부르고뉴 피노누아는 누구라도 좋아할 수밖에 없고 확실하게 구분되는 캐릭터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대로된 부르고뉴 피노누아를 접해본 애호가들 중 상당수는 부르고뉴 피노누아를 접한 뒤 와인 분류의 기준 자체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부르고뉴 피노누아냐, 아니냐로요.

이 때문일까요? 덕분에 최근 20여년 간 부르고뉴 피노누아의 가격은 놀라운 수준으로 상승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엔트리급들의 경우 2배 가까이 상승했고, 최고급 품질의 경우 안그래도 비싼 녀석이 병당 수십만 수백만원이라는 가격을 붙여도 날개 돋힌듯 팔려나갑니다. 오죽하면 부르고뉴 피노누아에 빠지면 집안 기둥 뿌리 뽑는다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까요.

실제로 대형 마트 와인 코너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부르고뉴 AOC 엔트리급 루이 자도 부르고뉴 피노누아(Louis Jadot Bourgogne Pinot Noir)나 조셉 드루앵 부르고뉴 피노누아(Joseph Drouhin Bourgogne Pinot Noir)의 경우, 2000년 초반 병당 2만원 내외였던 것이 최근에는 4만~5만원대(정상가 기준)에 팔립니다.

20년이라는 기간 동안 화폐가치의 하락과 물가 상승 등 영향이 있었겠지만, 그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엔트리급(기본급) 와인 1병을 5만원을 주고 사서 마실만한 대담한 와린이는 많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부르고뉴 피노누아의 진정한 매력은 엔트리급보다는 빌라쥬(Village)나 프리미에크뤼(Premier Cru)급으로 급을 올릴수록 더 매력적인 것을 감안한다면, 단순히 5만원 투자로 끝나는 경우는 찾기 힘듭니다. 점점 더 고급을 찾게되는거죠. 그래서 부르고뉴 피노누아가 애호가들에게 종착지라고 불립니다. 한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개미지옥 같은 매력입니다.

다행히 최근 부르고뉴 피노누아와 견줘서 전혀 뒤지지 않는, 가성비면에서는 오히려 부르고뉴 피노누아를 압도하기까지도 하는 타 지역 피노누아들이 속속들이 양조되고 있습니다. 이번 와인프릭에서는 가성비의 민족인 우리의 입맛을 만족시켜줄 부르고뉴 외 지역의 피노누아들을 소개합니다.

피노누아 과실의 모습.
양조자들에게도 기회의 땅? 미국
가장 먼저 와인 애호가들에게 거론되는 지역은 미국입니다. 미국은 이미 50여년 전 파리의 심판이라는 와인 산업을 뒤흔든 세기의 사건을 통해 떼루아와 가능성에 대해 세계적인 인정을 받았죠. 당시 사건이 궁금하시다면 와인프릭 <“애송이에게 우리의 자존심을!?”…와인 한 잔에 매국노가 된 사연>편을 읽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파리의 심판에 출품해 프랑스 와인들을 꺾은 와인들이 재배·양조된 지역은 서부 캘리포니아의 내파 밸리(Napa Valley)였습니다만, 피노누아는 좀 더 북쪽인 오레곤(Oregon)에서 두각을 나타냅니다.

오레곤은 오늘날 전체 와인 생산량의 60% 이상을 피노누아로 생산할 정도로 프랑스 부르고뉴를 제외하면 대표적인 피노누아 산지가 됐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부르고뉴와 무척이나 비슷한 기후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오레곤, 특히 윌라맷밸리(Willamette Valley)는 부르고뉴와 유사한 서늘한 기후와 강수량, 일조량 등을 갖추고 있습니다. 천천히 익으면서 복합적인 향과 산미를 유지하는 게 핵심인 피노누아를 재배하기에 최적의 조건이죠.

덕분에 일찌감치 부르고뉴를 떠나 새로운 포도밭을 찾던 양조자들에게 이주 1옵션으로 평가받아왔습니다. 미국 피노누아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이비드 렛 (David Lett)이 1960년대 오레곤에 터를 잡은 이후 부르고뉴 유명 와이너리인 조셉 드루앵(Joseph Drouhin) 가문의 일원인 베로니크 드루앵(Veronique Drouhin)이 1980년대 조셉 드루앵 오레곤을 설립하기도 하는 등 명실상부 부르고뉴를 대체할 지역으로 인정 받고 있습니다.

게다가 오레곤의 토양은 부르고뉴와 비슷하게 석회질이 풍부합니다. 화산성 토양과 해양 퇴적물까지 풍부하게 퍼져있기 때문에, 포도에 독특한 미네랄리티와 복합적인 풍미를 부여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발현되는 복합성은 시장이 오레곤 피노누아를 단순한 피노누아가 아닌 고급으로 인식하도록 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합니다.

미국 오레곤주(州) 윌라맷벨리의 AVA 지도
와인 업계의 링구아 프랑카는 부르고뉴 스타일?
링구아 프랑카(Lingua Franca)라는 단어를 들어보셨나요? 서로 다른 모국어를 사용해 상호 소통이 불가한 화자들이 의사소통을 위해 사용하는 공통어를 일컫는 말이죠. 국가나 단체에서 공식적으로 정한 언어를 뜻하는 공용어와 다른 개념입니다. 일종의 다른 언어 사이 가교 기능을 수행하는 언어를 통칭합니다. 중세 즈음 아랍권에서 서유럽인 전반을 ‘프랑크(Frank)’라고 불렀는데, 모국어가 서로 다른 상인들이 지중해를 무대로 만나 교역하며 쓰던 혼합어를 링구아 프랑카라 부른 것에서 시작했다고 합니다. 현재의 링구아 프랑카는 영어겠죠.

오레곤 윌라맷 밸리에서는 이런 의미를 가진 단어, 링구아 프랑카를 이름으로 쓰는 와인이 2015년부터 생산됩니다. 설립자이자 미국인 최초의 프랑스 국제 소믈리에 대회 우승자, 마스터소믈리에 래리 스톤(Larry Stone)과 프랑스 출신의 와인메이커 토마스 사브르(Thomas Savre), 그리고 부르고뉴의 거장 도미니크 라퐁(Dominique Lafon)이 와인을 링구아 프랑카로 협업한 결과입니다.

와인의 이름으로 사용된 링구아 프랑카의 어원만 생각해봐도 이들의 양조 철학이 무엇인지는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부르고뉴 피노누아 스타일을 접목했지만, 오레곤의 캐릭터를 가진 고품질 와인을 만들겠다는 것. 그리고 그 와인이 가진 맛과 향을 링구아 프랑카로 삼아, 전세계 와인 애호가들에게 어필할 것이라는 믿음 입니다.

링구아 프랑카는 피노누아 뿐만 아니라 샤도네 역시 철저하게 부르고뉴 스타일로 만들고 있는데요. 재밌는 것은 지난해 4월, 당시 일본 총리였던 기시다 후미오와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백악관 만찬주로 쓰였다는 점 입니다. 와인 업계에서는 미국과 일본이 전혀 다른 문화와 언어를 가지고 있음에도 국제사회에서 같은 지향점을 가진 전통의 우방국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과 동시에, 일본이 사랑하는 부르고뉴 스타일을 품은 미국 와인이라는 점이 주효하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내놓고 있습니다.

링구아 프랑카 와이너리와 마운틴 후드의 산꼭대기.
천혜의 자연환경을 무기로…뉴질랜드
판매가 기준 1만~3만원대 비교적 부담이 덜한 가격대로 만날 수 있는 가성비 소비뇽 블랑으로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뉴질랜드도 최근 고품질 피노누아 생산국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습니다. 주요 산지는 남섬의 센트럴 오타고(Central Otago), 북섬의 마틴버러(Martinborough) 등 입니다. 뉴질랜드 피노누아의 특징은 산지별로 캐릭터가 뚜렷하게 구분된다는 점입니다.

뉴질랜드는 지구 저편, 남반구에 위치하기 때문에 북반구인 우리와 달리 남쪽으로 갈수록 추워지는데요. 남쪽 끄트머리 남동부에 위치한 센트럴 오타고는 가장 추운 지역에 속하게 되는 셈이죠. 기온만 놓고보면 부르고뉴와 비슷하지만 센트럴 오타고의 피노누아는 부르고뉴 스타일과는 차이가 있는 편입니다.

일조량이 워낙 풍부한 덕분에 포도가 잘 익어, 블랙체리, 블랙베리, 블랙플럼 같은 농축된 과일 향과 함께 깊이 있는 색감을 가진 피노누아가 생산됩니다. 와인 애호가들이 흔히 말하는 과실미가 풍부한 신대륙 피노누아에 가까운 캐릭터입니다.

반면 북섬에 위치한 마틴버러는 뉴질랜드에서 피노누아가 가장 먼저 재배된 지역 중 하나로 꼽힙니다. 무엇인가 새로운 장소에서 기존과 비슷한 시도를 하게 될 때는 처음엔 당연히 원래 하던 것과 비슷한 컨디션을 따라가려고 하죠. 마틴버러 역시 뉴질랜드에서 부르고뉴와 가장 비슷한 기후와 토양을 가졌다고 평가 받습니다. 다만 부르고뉴 스타일로 양조하더라도 뉴질랜드 와인들에서 발현되는 특유의 캐릭터인 향신료와 허브, 풀 등 미묘한 풍미가 더해져 와인을 즐기는 재미를 더합니다.

뉴질랜드 와인 산지 지도. 마틴버러는 북섬의 최남단인 와이라라파 지역에 위치한다.
제임스 서클링이 반해 사들인 포도밭
대표적인 마틴버러 와이너리로는 이미 국내에 잘 알려진 아타 랑기(Ata Rangi)가 있습니다만, 와인 애호가라면 에스카프먼트(Escarpment) 와이너리의 피노누아에 도전해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영어로 급경사면이라는 뜻을 가진 에스카프먼트 와이너리는 실제로 마틴버러에서 가장 깊고 가파른 경사 옆에 위치하고 있는데요. 이곳의 지명인 테 무나 로드(Te Muna Road)는 마오리족 언어로 ‘특별한 장소’를 뜻하기도 합니다.

에스카프먼트는 뉴질랜드 와인 업계에서 피노 왕자(The Prince of Pinot)로 불리는 래리 맥키나(Larry McKenna)에 의해 1989년에 설립된 와이너리 입니다. 맥키나는 뉴질랜드에서 피노누아가 생소하던 시절, 피노누아를 보급한 인물로 역사에 남았습니다. 현재는 은퇴했고, 그의 팀이 그의 철학을 계승하면서 고품질의 부르고뉴 스타일 피노누아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에스카프먼트 와인의 특징은 부르고뉴 스타일의 정교함과 마틴버러 지역의 독특한 떼루아가 결합된 것에 있습니다. 특히 피노누아는 붉은 과일과 허브의 아로마, 미묘한 흙향을 가지고 있으며, 산미와 탄닌이 균형 잡혀 우아하고 복합적인 맛을 냅니다. 밭을 여러 개로 세분화해 각 밭의 특성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점도 부르고뉴 스타일을 빼닮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참고로 에스카프먼트의 피노누아는 그 품질을 인정받아 제임스 서클링이 주최하는 ‘그레이트와인스 인 서울 2024’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여러 곳의 밭 중 키와(Kiwa)는, 밭의 가능성에 매료된 제임스 서클링이 2020년 사들이면서 가치를 증명하기도 했습니다. 에스카프먼트 와이너리는 다른 지역의 밭을 사들여 다시 키와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제임스 서클링은 사들인 밭에서 판매용이 아닌 개인적인 목적의 와인을 생산한다고 합니다.

뉴질랜드 마틴버러 에스카프먼트 와이너리 모습
부르고뉴 스타일로 양조된 와인을 즐긴다면
소개해드린 두 개 와이너리의 와인들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부르고뉴 스타일을 가졌지만, 자기 태생 지역의 떼루아를 적절하게 잘 반영했다는 점입니다. 원조를 모방만 해서는 절대 원조를 넘어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두 와이너리에서 생산하는 와인의 가격은 결코 저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와인을 특히 부르고뉴 스타일 와인을 즐기는 애호가들이라면 한번쯤 경험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와인입니다.

한편 오레곤과 마틴버러 외에도 독일 바덴(Baden)과 팔츠(Pfalz)에서 재배·양조하는 슈페트부르군더(Spatburgunder·피노누아의 독일 명칭)도 부르고뉴 스타일의 고급 피노누아로 손꼽힙니다. 이들은 섬세한 구조감과 풍부한 아로마를 지니고 있어 부르고뉴 스타일과 유사하게 평가되죠.

균형잡힌 맛과 향으로 국내 피노누아 마니아들 사이에서 이미 인기를 끌고 있는 호주 야라 밸리(Yarra Valley)와 최근 국내 시작에서 조금씩 인지도를 넓히고 있는 남아프리아공화국의 헴엘 언 아르드(Hemel-en-Aarde) 피노누아 역시 피노누아에 관심을 가진다면 한번쯤은 도전해볼만한 지역입니다.

마지막으로 캘리포니아 소노마(Sonoma) 지역 러시안리버밸리(Russian River Valley)의 피노누아도 각광 받고 있습니다. 풍부한 캘리포니아의 일조량 덕분에 부르고뉴 피노누아에 비해 조금 더 풍부한 과실미를 보이고, 점토와 모래가 혼합된 토양의 영향으로 흙내음과 버섯, 허브 등 깊이있는 풍미를 발현합니다. 부르고뉴 피노누아보다 미묘하게 좀 더 농축되고 풍부한 스타일 덕분에 애호가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모든 와인이 그렇습니다만, 피노누아를 추천하고 설명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특히 더 섬세하고 복합적인 풍미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마다 취향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품종이기도 합니다.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것은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피노누아를, 특히 고품질의 피노누아를 꼭 즐겨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와인 생활에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될 겁니다.

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와인의 역사도 시작됐습니다. 그만큼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데요.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국제공인레벨을 보유한 기자가 재미있고 맛있는 와인 이야기를 풀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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