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차 ‘VJ특공대’ PD가 펜과 종이를 들고 전국으로 그림 그리러 다닌 이유 [여책저책]

장주영 매경닷컴 기자(semiangel@mk.co.kr) 2024. 11. 2.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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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떠나 한 곳만 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차라리 그런 사람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간혹 여행지에서조차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는 이가 있으니 말이죠. 일상을 탈출해 새로운 곳에 왔다면 그곳에서의 시간을 충분히 만끽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여행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생각을 열어주기도 하고, 기분을 전환시켜주기도 하니 말이죠.

카메라로 영상을 담는 30년차 PD가 있습니다. 그는 여행을 나서서는 영상보다는 흰 종이와 펜을 선호합니다. 그곳의 풍광을 자신의 그림으로 옮기기 위해서죠. 그런 그가 책이 있는 공간을 찾아 여행을 다니며 쓰고 그린 책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국어 교과서 내지는 문학책에 꼭 등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효석, 이육사, 채만식 등이죠. 그들의 이름 옆에는 태어난 고향 또는 활동했던 본거지가 뒤따르는데요. 이효석은 강원도 봉평, 이육사는 경북 안동, 채만식은 전북 군산이 그렇습니다. 국문학자 강진호는 20년 동안 수많은 문학가들의 이야기를 들으려 전국 방방곡곡에 답사를 다녔는데요. 그 결과물이 최근 출간했습니다.

여책저책은 여행을 그림으로 만난 방송PD와 여행을 문학으로 만난 국문학자의 책을 소개합니다.

책 있는 도시
리피디(이승익) | 블랙잉크
사진 = 블랙잉크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저자 이승익은 우리가 알만한 작품의 방송 연출을 많이 맡았다. kbs ‘VJ 특공대’ ‘현장기록 병원’ ‘생로병사의 비밀’ 등 수많은 다큐멘터리 방송을 통해 29년간 시청자를 만났다. 그런 그가 리피디란 필명으로 제 2의 삶을 시작한 계기는 바로 ‘펜 드로잉’이다. 2019년 어느 날, 잊고 있었던 그림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나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펜과 종이를 잡았다. 취미로 펜을 들었지만 어느새 전문가 수준으로 올라섰다. 수차례 개인전과 단체전 전시도 열고, tvN ‘미래수업’ ‘완치비만’ 등의 책 삽화 작업도 진행했다.
사진 = 블랙잉크
저자는 평소에 도시 곳곳에 숨겨진 책이 있는 공간을 찾아 펜 드로잉을 하는 것을 즐겼다. 시간이 날 때마다 책방과 서점 등을 찾아다니며 책과 사람이 함께 편안히 어우러지는 모습을 쓰고 그리기도 여러 번이다. 책이 있는 공간을 찾다 보니 서울부터 제주까지 전국 곳곳에 멋지고 독특한 책방과 도서관이 너무도 많다는 걸 알게 됐다. 그렇게 저자가 전국의 독특하고 멋진 ‘책이 있는 공간 30곳’을 그리고 쓴 책이 바로 ‘책 있는 도시’다.

이 책은 단순히 책을 더 많이 읽거나 가까이하자는 목적은 전혀 없다. 더구나 특정 장소를 홍보하기 위한 생각은 더더구나 아니다. 대신 우리 주변에 우리를 기다리는 수많은 책과 멋진 공간들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은 목적이 크다. 그 안에서 행복을 느끼려 전국의 여러 책방과 도서관을 책에 담았다.

사진 = 블랙잉크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남녀노소 누구라도 책이 있는 공간에서 편히 쉬며 그곳에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전하고자 했다. 책과 얽힌 저자의 개인적인 경험과 함께 책방 이야기를 연결했다. 현장에서 직접 책방의 모습을 드로잉으로 담아내는 동영상 링크를 QR 코드로 담아 감동과 현장감을 함께 전달한다. 도심 속 케렌시아, 즉 안식처가 돼 줄 책이 있는 공간에서 잠시 일상의 고단함을 잊고 휴식과 행복의 시간을 가져 보길 저자는 간절히 바란다.
여행지에서 만난 한국문학
강진호 | 민음사
사진 = 민음사
​외딴 여행지에 가면 의외의 것들과 조우하는 경우가 많다. 예기치 못한 행운일 때도 있고, 물론 그렇지 못한 적도 부지기수다. 영화로도 나왔던 ‘세렌디피티(serendipity)’가 좋은 예다. 우연한 상황에서 자신의 재치나 뜻밖의 기회를 통해 좋은 결과가 나타나는 상황 말이다.

‘여행지에서 만난 한국문학’의 저자 강진호는 딱 그런 경험을 맞닥뜨린 듯 하다. 문학박사이자 평론가, 국문학과 교수이기도 한 그는 국내 여행을 하면서 의도치 않게 문학의 흔적을 만났다. 자신의 주 전공분야이기도 한 문학을 연구자 시점으로 접하니 새로운 눈이 떠졌다. 대개 국문과 답사 현장으로 전해지는 학습 장소이거나 다른 목적을 위해 찾았다가 우연히 들르게 되는 틈새의 장소였지만 모르고 지나치기에는 아쉽거나 스치듯 둘러보기엔 아까운 곳이 많았다. 저자는 언젠가 문학 여행을 주제로 다시 찾고 싶은 곳이자 교과서에서 배운 작품들을 삶의 언어로 다시 바라볼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를 책에 옮겼다.

서울 성북동 이태준 고택 / 사진 = 성북동 아름다운 사람들
서울 성북동과 강원 철원의 이태준, 대구의 이상화, 안동의 이육사, 부산의 김정한, 충북 옥천의 정지용, 경남 통영의 유치환 등 한국문학사에 족적을 남긴 작가들의 ‘근거지’ 23곳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작가와 작품 세계를 담아냈다. 그래서 이 책은 한국문학 성지들만을 엄선한 문학 여행기이자, 생생한 현장의 언어로 쓰인 비평집이다. 책 속 이야기를 몇 개 끄집어 내 보면 고개가 끄덕여 진다.

​“나에게 인천은 오정희의 소설 ‘중국인 거리’의 창작 무대로 관심을 끈 공간이기도 하다. 그 소설에는 전쟁 직후인 1950년대 인천의 풍경이 그대로 녹아 있다.”

“이태준 고택 마루에 앉아 젊은 시절의 이태준을 떠올려본다. 멀리 성북동 계곡을 따라 황수건이 지나가는 것이 보인다.”

“9월에 와야 장관이지요. 9월에 오시지 그러셨어요.” 내가 봉평에 간 시점은 이제 막 메밀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 8월이었다.

사진 왼쪽부터 강원 봉평 흥정천 섶다리, 봉평 메밀꽃 밭 / 사진 = 매경 DB
저자는 작품 탄생의 배경이 된 곳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이 봤음직한 것들을 보고 들었음직한 것들을 들으려 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주말이 되면 짐을 꾸렸다. 기억이 불분명해지면 갔던 곳을 다시 방문하기도 하고 여행에서 돌아와서는 촬영한 사진과 모은 자료들로 글을 써냈다. 이 책에 수록한 23곳의 문학 여행지는 23곳의 인간 여행지라고 말해도 과장이 아니다. 사람을 이해할 수 없을 때, 사람들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이 책과 함께 여행길에 오르는 것은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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