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아내가 문제”…부인 지키다 정치적 동지 모두 떠나보낸 ‘이 남자’ [사색(史色)]
[사색-82] 계속되는 전투에 그는 넝마가 되어버렸습니다.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쳤고, 입맛은커녕 말 한마디조차 꺼낼 힘이 없습니다. 술도, 산해진미도, 전투에 대한 승리도 그에게 위안이 되지 않았습니다.
신의 가호였던 것일까요. 전장에서 돌아가는 길목, 우연히 한 여자를 마주합니다. 새하얀 얼굴, 윤나는 금발, 붉은 입술. 고상한 말투로 사내에게 다가오는 이 여자. 그의 몸에 어느덧 생기가 다시 돌기 시작합니다.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어떤 사랑은 국가를 격랑에 빠뜨립니다. 사내의 존재가 범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름은 에드워드4세. 잉글랜드의 왕좌를 둘러싼 ‘장미전쟁’의 한 축인 요크왕조의 수장이었습니다. 국왕의 결혼은 가장 정치적인 행위. 국익보다 사감이 앞선 국왕의 결혼은 국가의 위기를 불렀습니다. 정치가 애먼 이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상황이 이어지면서였습니다. 600년 전 잉글랜드의 이야기입니다.
잉글랜드 아주 작은 수도원. 이곳에서 아담한 결혼 예배가 열리고 있습니다. 몇 안 되는 손님, 소박한 분위기의 예배당. 신랑 신부는 더 없이 행복해보이는 모습이었지요. 1464년 9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결혼이었습니다.
신하들의 분노가 폭발합니다. ‘요크왕조’가 여전히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서 왕이라는 자가 사감을 앞세워 결혼을 진행하다니요. 유럽의 강자 프랑스와 결혼 동맹을 맺어 왕권을 견고히 할 기회를 차버리다니요. 요크왕조 창출의 일등 공신인 ‘킹메이커’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의 분노가 폭발합니다. 왕조의 지분을 적어도 절반은 가진 그에게 아무런 상의도 없이 진행된 일이었습니다.
신하들이 분노한 이유에는 역사적 배경이 자리합니다. 에드워드 4세의 지지 기반이 아직 탄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잠시 요크와 랭커스터의 다툼인 장미전쟁에 대한 설명부터.
에드워드 4세가 즉위하기 약 60년 전. 잉글랜드 통치자는 리처드 2세였습니다. 그는 우리 역사의 연산군과 같은 폭군으로 통했지요. 결국 귀족 세력이 반발해 새로운 주군을 옹립합니다. 리처드 2세의 사촌 동생 헨리 4세였습니다. 랭커스터 왕조의 탄생이었지요.
반란이 또 다른 반란을 부른 격. 빨간 장미를 상징으로 삼은 랭커스터와 하얀 장미의 요크가 힘 대결에 돌입한 것이었습니다. 장미전쟁이었습니다.
권력은 탈환보다 수성이 더 어려운 법입니다. 리처드 네빌은 아직 꺼지지 않은 랭커스터의 잔불들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반(反)요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랭커스터 수장 ‘헨리 6세’라는 잔불이 화마가 될 수 있어서였습니다.
‘왕비(Queen Consort)’가 아닌 ‘여왕(Queen Regnant)’으로 즉위한 것도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최초였지요. 단순한 왕의 배우자가 아니라, 공동 통치자로 예우한다는 의미. 권력은 리처드 네빌의 손을 떠나,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손으로 향했습니다.
그가 프랑스와 동맹을 추진하자 강력한 반대에 부딪힙니다. 여왕 엘리자베스의 아버지 리처드 우드빌(AKA 왕의 장인)이었습니다. 네빌이 에드워드 4세와 프랑스 왕가와 결혼을 추진한 데 대한 앙금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에드워드 4세 역시 네빌 가문을 점점 요직에서 배제합니다. 왕좌 뒤의 권력은 이제 우드빌 가문의 것이었습니다. 토끼 사냥은 끝났고, 네빌이란 사냥개는 이제 거추장스러운 반대파일 뿐이었습니다.
잉글랜드에서 도버 해협을 건너는 사내가 있었습니다. 킹메이커로 불렸던 사내, 이제 권력에서 완전히 배제된 남자, 리처드 네빌이었습니다. 그가 프랑스로 향하는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그곳에 폐위된 왕 헨리 6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잉글랜드의 권력을 탈환하기 위한 사람들이 프랑스에서 다시 뭉칩니다. 엘리자베스 우드빌 가문의 국정농단이 반란에 불쏘시개가 되었던 셈입니다. 1470년 9월 헨리 6세의 깃발을 단 선봉장이 바로 리처드 네빌이었던 배경입니다.
킹메이커는 전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뒤늦게 도착한 헨리 6세의 군대도 에드워드 4세의 상대가 되지 못했지요. 헨리 6세는 에드워드에게 생포돼 탑에 갇혀 죽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에드워드 4세의 권력은 더욱 굳건해집니다. ‘랭커스터’의 핏줄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무적으로 보였던 에드워드 4세가 쓰러집니다. 1483년, 그가 겨우 불혹에 접어들었을 때였습니다. 과식과 습관적 구토로 인한 식습관이 질병을 불렀습니다. 그의 왕좌를 계승할 아들은 불과 12세. 에드워드 4세는 동생 리처드를 불렀습니다. 자기 아들을 보호해 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내 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국정운영을 부디 잘 도와주게.” 동생은 손을 꼭 맞잡습니다. “걱정하지 마시죠, 전하. 안심하고 편히 잠드소서.” 동생 리처드가 호국경(Lord Protector)에 오른 순간이었습니다.
에드워드 4세가 눈을 감을 때만을 바라면서 그는 자신이 왕이 될 날을 꿈꿨습니다. 오랫동안 바라고 바라던 형의 죽음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지요.
자신이 지켜주겠노라 약속한 에드워드 5세를 런던탑으로 데려갑니다. 대관식을 준비할 동안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댔습니다. 어린 왕은 순진하게도 삼촌을 따랐지요. 모든 준비가 끝나자 리처드가 공식 선포합니다.
“에드워드4세는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유효한’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에드워드 5세는 사생아로서 왕이 될 자격이 없다.”
에드워드 4세와 우드빌의 결혼이 완전한 무효였다는 의미였고, 두 사람 사이의 아이들은 사생아라는 뜻이었지요. 에드워드 5세는 왕이 될 수 없는 신분이라는 선포였습니다. 사실상의 반정이었지요.
‘왕의 동생’ 리처드가 조카를 폐위하고 직접 즉위하면서 그는 이제 리처드 3세로 불립니다. 조카로부터 왕좌를 강탈한 셈. 그를 영국의 수양대군, 에드워드 5세를 영국의 단종이라고 부르는 배경입니다(두 사건의 시차는 불과 30년에 불과합니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 엘리자베스 우드빌. 아들을 잃은 데 대한 애끊는 그리움이었을까요. 권력을 향한 끝없는 야심이었을까요. 우드빌은 한 가문의 남자를 찾아갑니다. ‘헨리 튜더’였습니다.
모계로 왕가 랭커스터의 피가 흐르는 인물, 그래서 절반의 정통성을 인정받은 인물. 그렇습니다.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자기 딸을 이 남자와 혼인시킵니다. 헨리 튜더를 리처드 3세의 대항마로 키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요크와 랭커스터의 결합이었습니다.
헨리 튜더는 어느덧 통합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보스워스 필드 전투’에서 리처드 3세는 칼에 맞아 죽습니다. 헨리 튜더가 헨리 7세로 즉위하면서 튜더 왕조가 열렸습니다.
후임 헨리8세와 엘리자베스1세가 잉글랜드 절대왕정을 이끌 수 있었던 배경입니다. 에드워드4세의 어리석은 결혼은 단기적으로 잉글랜드를 위기에 빠뜨렸지만, 장기적으로는 강국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암군’을 극복하는 과정이 잉글랜드를 역설적으로 강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엉망이라는 생각이 들더라도, 우리가 다시 희망을 꿈꿀 수 있는 이유입니다. 600년 전 잉글랜드가 전해주는 메세지입니다.
ㅇ장미전쟁의 요크파 리더 에드워드 4세는 과부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충동적으로 결혼하면서 프랑스와 동맹할 기회를 놓쳤다.
ㅇ우드빌의 국정농단으로 에드워드 4세의 정치적 동지들이 모두 그를 떠났다.
ㅇ왕의 권력이 약화한 상황에서 에드워드4세가 죽자 아들 에드워드 5세는 삼촌 리처드3세에 의해 쉽게 권력을 빼앗긴다.
ㅇ엘리자베스 우드빌은 헨리 튜더에게 붙어 리처드 3세를 다시 죽음에 빠뜨렸고, 잉글랜드는 절대왕정 국가를 만들었다.
<참고문헌>
ㅇ찰스 오만,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장미전쟁의 킹메이커, 필요한책, 2019년
ㅇ앙드레 모루아, 영국사, 김영사,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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