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아내가 문제”…부인 지키다 정치적 동지 모두 떠나보낸 ‘이 남자’ [사색(史色)]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4. 11. 2.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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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82] 계속되는 전투에 그는 넝마가 되어버렸습니다.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쳤고, 입맛은커녕 말 한마디조차 꺼낼 힘이 없습니다. 술도, 산해진미도, 전투에 대한 승리도 그에게 위안이 되지 않았습니다.

신의 가호였던 것일까요. 전장에서 돌아가는 길목, 우연히 한 여자를 마주합니다. 새하얀 얼굴, 윤나는 금발, 붉은 입술. 고상한 말투로 사내에게 다가오는 이 여자. 그의 몸에 어느덧 생기가 다시 돌기 시작합니다.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지긋지긋한 전쟁이군...” 영드 ‘화이트퀸’에서 에드워드4세. [사진출처=imdb]
사내의 사랑은 불에 달궈진 쇠붙이마냥 뜨겁습니다. 그녀는 애딸린 과부였지만 그는 괘념치 않았지요. 그녀는 그를 환하게 비춰주는 유일한 존재. 세상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고 그는 생각합니다. “신께 내 사랑을 맹세하노라” 외친 후, 그는 그녀를 품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에 빠진 대부분의 사내가 그러하듯 그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지요.

어떤 사랑은 국가를 격랑에 빠뜨립니다. 사내의 존재가 범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름은 에드워드4세. 잉글랜드의 왕좌를 둘러싼 ‘장미전쟁’의 한 축인 요크왕조의 수장이었습니다. 국왕의 결혼은 가장 정치적인 행위. 국익보다 사감이 앞선 국왕의 결혼은 국가의 위기를 불렀습니다. 정치가 애먼 이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상황이 이어지면서였습니다. 600년 전 잉글랜드의 이야기입니다.

“사랑도 국가도 모두 가질 테야.” 장미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드 ‘화이트퀸’에서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에드워드4세. [사진출처=imdb]
에드워드4세의 충동적 사랑
“이 부부에게 신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잉글랜드 아주 작은 수도원. 이곳에서 아담한 결혼 예배가 열리고 있습니다. 몇 안 되는 손님, 소박한 분위기의 예배당. 신랑 신부는 더 없이 행복해보이는 모습이었지요. 1464년 9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결혼이었습니다.

“에드워드 전하, 제가 과부라서 싫으신가요. ” 엘리자베스 우드빌을 다룬 영드 ‘화이트퀸’의 한장면. [사진출처=imdb]
국왕의 결혼식이 이토록 수수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에드워드 4세가 몰래 진행한 결혼식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자베스는 이미 한번 결혼해 아이까지 낳은 뒤 사별한 몸. 거기다가 전 남편은 요크왕조의 라이벌 랭커스터 가문을 섬기던 장군 존 그레이. 왕이 ‘적군의 과부’를 새로운 신부감으로 맞아들인 셈이었습니다. 잉글랜드 역사상 왕이 하급 귀족 여성과 결혼한 최초 사례였습니다.

신하들의 분노가 폭발합니다. ‘요크왕조’가 여전히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서 왕이라는 자가 사감을 앞세워 결혼을 진행하다니요. 유럽의 강자 프랑스와 결혼 동맹을 맺어 왕권을 견고히 할 기회를 차버리다니요. 요크왕조 창출의 일등 공신인 ‘킹메이커’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의 분노가 폭발합니다. 왕조의 지분을 적어도 절반은 가진 그에게 아무런 상의도 없이 진행된 일이었습니다.

“에드워드가 별 볼 일 없는 과부와 결혼했다고?” 영드 ‘화이트퀸’에서 킹메이커 리처드 네빌. [사진출처=imdb]
신하들은 왜 에드워드의 결혼에 분노했나
‘장미들의 싸움(Wars of the Roses)’

신하들이 분노한 이유에는 역사적 배경이 자리합니다. 에드워드 4세의 지지 기반이 아직 탄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잠시 요크와 랭커스터의 다툼인 장미전쟁에 대한 설명부터.

에드워드 4세가 즉위하기 약 60년 전. 잉글랜드 통치자는 리처드 2세였습니다. 그는 우리 역사의 연산군과 같은 폭군으로 통했지요. 결국 귀족 세력이 반발해 새로운 주군을 옹립합니다. 리처드 2세의 사촌 동생 헨리 4세였습니다. 랭커스터 왕조의 탄생이었지요.

“헨리4세...그대에게 내 왕관을 넘기노라. ” 리처드 2세의 왕위 이양을 묘사한 그림.
아무리 폭군이더라도 리처드 2세는 로마 교황으로부터 승인받은 정당한 왕이었습니다. 랭커스터 왕조에 대한 반감이 지속해서 누적된 배경이었지요. 헨리 4세의 뒤를 이은 손자 헨리 6세가 정신병을 앓는 틈을 타, 사촌 요크 가문이 왕위를 주장합니다.

반란이 또 다른 반란을 부른 격. 빨간 장미를 상징으로 삼은 랭커스터와 하얀 장미의 요크가 힘 대결에 돌입한 것이었습니다. 장미전쟁이었습니다.

“요크 네 이놈.” 헨리 4세의 초상화. 리처드 2세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그는 수 많은 반란에 직면해야 했다.
요크의 제갈량, ‘킹메이커’ 리처드 네빌
요크 가문에는 지략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 있었습니다. 가장 부유하고 막강한 권력을 보유한 인물. 도버 해협 건너 프랑스에까지 명성이 자자했지요. “그를 가진 자, 잉글랜드의 왕좌에 앉는다”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였지요. ‘킹메이커’라는 말이 처음 쓰인 것도 그로부터였습니다.
리처드 네빌의 미들햄성은 그가 당대 얼마나 실력자였는지를 보여준다. [사진출처=CJW]
네빌은 무능하고 정신적으로 병약한 헨리 6세보다는 사내다운 배포로 무장한 에드워드 4세에 베팅합니다. 1461년 6월 에드워드 4세가 즉위에 성공한 이유였지요. 잉글랜드의 반정(反正)을 지켜본 프랑스의 한 대사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잉글랜드에는 두 명의 통치자가 있다. 한 명은 리처드 네빌이고, 다른 한 명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권력은 탈환보다 수성이 더 어려운 법입니다. 리처드 네빌은 아직 꺼지지 않은 랭커스터의 잔불들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반(反)요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랭커스터 수장 ‘헨리 6세’라는 잔불이 화마가 될 수 있어서였습니다.

“왕은 내 손으로 고른다.” 전투하는 킹메이커 리처드 네빌을 묘사한 후대 18세기 그림.
랭커스터파 신하들의 사면 복권, 프랑스와의 동맹. 네빌은 나라를 안정화하기 위한 구상에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에드워드 4세의 비밀결혼에 배신감을 느낀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조국과 정권의 미래보다 정욕을 앞세운 왕을 향한 실망이기도 했습니다.
네빌에서 떠난 권력 엘리자베스에게
에드워드 4세는 진실로 엘리자베스 우드빌을 사랑했습니다(몇 번 바람은 피웠지만). 두 사람은 자식을 10명이나 낳았을 정도로 금실이 좋았습니다.

‘왕비(Queen Consort)’가 아닌 ‘여왕(Queen Regnant)’으로 즉위한 것도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최초였지요. 단순한 왕의 배우자가 아니라, 공동 통치자로 예우한다는 의미. 권력은 리처드 네빌의 손을 떠나,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손으로 향했습니다.

“나는 왕의 배우자가 아니라, 최고 권력자인 여왕이니라.” 영드 ‘화이트퀸’에서 엘리자베스 우드빌을 연기한 레베카 퍼거슨. [사진출처=imdb]
번개처럼 권력을 쥔 자들에게 통치의 지혜가 있을 리 없다는 건 지고의 진리인가 봅니다. 여왕 우드빌 가문의 국정 장악이 시작됩니다. 리처드 네빌이 첫 표적.

그가 프랑스와 동맹을 추진하자 강력한 반대에 부딪힙니다. 여왕 엘리자베스의 아버지 리처드 우드빌(AKA 왕의 장인)이었습니다. 네빌이 에드워드 4세와 프랑스 왕가와 결혼을 추진한 데 대한 앙금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에드워드 4세 역시 네빌 가문을 점점 요직에서 배제합니다. 왕좌 뒤의 권력은 이제 우드빌 가문의 것이었습니다. 토끼 사냥은 끝났고, 네빌이란 사냥개는 이제 거추장스러운 반대파일 뿐이었습니다.

“네빌 미안하지만 잉글랜드는 우리 우드빌 가문의 것이야.”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초상화.
리처드 네빌이 프랑스로 간 이유
“우린 프랑스로 간다.”

잉글랜드에서 도버 해협을 건너는 사내가 있었습니다. 킹메이커로 불렸던 사내, 이제 권력에서 완전히 배제된 남자, 리처드 네빌이었습니다. 그가 프랑스로 향하는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그곳에 폐위된 왕 헨리 6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잉글랜드의 권력을 탈환하기 위한 사람들이 프랑스에서 다시 뭉칩니다. 엘리자베스 우드빌 가문의 국정농단이 반란에 불쏘시개가 되었던 셈입니다. 1470년 9월 헨리 6세의 깃발을 단 선봉장이 바로 리처드 네빌이었던 배경입니다.

“네빌, 네가 내 상대가 될 거 같으냐.” 영드 ‘화이트퀸’에서 전투를 치르는 에드워드 4세. [사진출처=imdb]
그의 꿈은 그러나 도버해협의 거품만큼이나 덧없이 사라집니다. 후발대로 합류하기로 한 헨리 6세 군대가 악천후로 잉글랜드에 상륙이 지연되면서였습니다. 안개가 자욱한 잉글랜드에서 네빌은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킹메이커는 전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뒤늦게 도착한 헨리 6세의 군대도 에드워드 4세의 상대가 되지 못했지요. 헨리 6세는 에드워드에게 생포돼 탑에 갇혀 죽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에드워드 4세의 권력은 더욱 굳건해집니다. ‘랭커스터’의 핏줄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에드워드, 짐은 정치에 관심 없으니 살려만 주시게.” 정신병을 앓은 헨리 6세는 요크 가문에게 완전히 패배한다. [사진출처=게오르그 폰 에힌겐]
거인 에드워드4세가 쓰러지다
“아우야, 내 아들을 잘 부탁하네.”

무적으로 보였던 에드워드 4세가 쓰러집니다. 1483년, 그가 겨우 불혹에 접어들었을 때였습니다. 과식과 습관적 구토로 인한 식습관이 질병을 불렀습니다. 그의 왕좌를 계승할 아들은 불과 12세. 에드워드 4세는 동생 리처드를 불렀습니다. 자기 아들을 보호해 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내 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국정운영을 부디 잘 도와주게.” 동생은 손을 꼭 맞잡습니다. “걱정하지 마시죠, 전하. 안심하고 편히 잠드소서.” 동생 리처드가 호국경(Lord Protector)에 오른 순간이었습니다.

“에드워드, 이렇게 떠나가면 안 돼...” 영드 ‘화이트퀸’의 한 장면. [사진출처=imdb]
결혼할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에드워드 4세는 사람보는 눈이 흐릿한 인물이었습니다. 동생 리처드가 엄청난 야심가인 걸 몰랐던 탓입니다. 동생 리처드는 형수 우드빌 가문이 불러온 난정(亂政)을 끔찍이도 싫어했습니다.

에드워드 4세가 눈을 감을 때만을 바라면서 그는 자신이 왕이 될 날을 꿈꿨습니다. 오랫동안 바라고 바라던 형의 죽음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지요.

“형수, 난 당신 맘에 안 들어...” ‘화이트퀸’에서 리처드3세. [사진출처=imdb]
영국판 수양대군...리처드 3세
어린왕 ‘에드워드 5세’가 왕좌에 앉았지만 잉글랜드를 움직이는 건 리처드였습니다. 그는 재빠르게 권력 장악에 나섰지요. 요직을 차지한 우드빌 가문의 인사들을 잇달아 잡아들입니다. 체포하거나 처형하거나.
“나의 형 에드워드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결혼은 무효다.” 리처드 3세의 초상화.
왕궁에서 우드빌의 색채는 빠르게 옅어집니다. 이제 리처드의 눈은 다음으로 향합니다. 잉글랜드의 왕이자, 자신의 조카 에드워드 5세의 왕좌였습니다.

자신이 지켜주겠노라 약속한 에드워드 5세를 런던탑으로 데려갑니다. 대관식을 준비할 동안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댔습니다. 어린 왕은 순진하게도 삼촌을 따랐지요. 모든 준비가 끝나자 리처드가 공식 선포합니다.

“에드워드4세는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유효한’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에드워드 5세는 사생아로서 왕이 될 자격이 없다.”

“우리 결혼이 무효라고?” 영드 ‘화이트퀸’에서 엘리자베스 우드빌. [사진출처=imdb]
1483년 6월 22일, 에드워드 5세의 대관식을 며칠 앞둔 날이었습니다. 형인 에드워드가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결혼에 앞서 이미 다른 사람과 공식적으로 결혼한 기록이 존재한다는 충격적 발표.

에드워드 4세와 우드빌의 결혼이 완전한 무효였다는 의미였고, 두 사람 사이의 아이들은 사생아라는 뜻이었지요. 에드워드 5세는 왕이 될 수 없는 신분이라는 선포였습니다. 사실상의 반정이었지요.

‘왕의 동생’ 리처드가 조카를 폐위하고 직접 즉위하면서 그는 이제 리처드 3세로 불립니다. 조카로부터 왕좌를 강탈한 셈. 그를 영국의 수양대군, 에드워드 5세를 영국의 단종이라고 부르는 배경입니다(두 사건의 시차는 불과 30년에 불과합니다).

“삼촌, 여기가 어디예요. 너무 무서워요.” 리처드 3세에 의해 탑에 갇힌 에드워드 5 세와 그의 동생을 묘사한 그림. 탑에서 사라진 소년들은 후대에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그림은 19세기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가 그린 작품.
다시 시작된 우드빌의 역습
“내 아들의 복수를 하겠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 엘리자베스 우드빌. 아들을 잃은 데 대한 애끊는 그리움이었을까요. 권력을 향한 끝없는 야심이었을까요. 우드빌은 한 가문의 남자를 찾아갑니다. ‘헨리 튜더’였습니다.

모계로 왕가 랭커스터의 피가 흐르는 인물, 그래서 절반의 정통성을 인정받은 인물. 그렇습니다.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자기 딸을 이 남자와 혼인시킵니다. 헨리 튜더를 리처드 3세의 대항마로 키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요크와 랭커스터의 결합이었습니다.

“장모님, 제가 복수를 대신하겠습니다.” 헨리 튜더 초상화.
어린 왕을 죽인 리처드 3세를 향한 여론은 곱지 않았습니다. 요크파 역시 지지를 철회합니다. 더욱 많은 귀족들이 헨리 튜더 주위로 몰려듭니다. 과거 요크를 지지했던 사람들도, 랭커스터 옆에 선 사람들도 모두 그의 편이었습니다.

헨리 튜더는 어느덧 통합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보스워스 필드 전투’에서 리처드 3세는 칼에 맞아 죽습니다. 헨리 튜더가 헨리 7세로 즉위하면서 튜더 왕조가 열렸습니다.

“리처드3세가 죽었다.” 전장에서 발견된 리처드 3세를 묘사한 후대의 그림. [사진출처=라이크스 박물관]
튜더왕조는 잉글랜드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30년이 넘는 장미전쟁으로 귀족들이 돈·재산·병력 대부분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귀족들의 권력 약화는 왕권 강화로 이어졌지요.

후임 헨리8세와 엘리자베스1세가 잉글랜드 절대왕정을 이끌 수 있었던 배경입니다. 에드워드4세의 어리석은 결혼은 단기적으로 잉글랜드를 위기에 빠뜨렸지만, 장기적으로는 강국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암군’을 극복하는 과정이 잉글랜드를 역설적으로 강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엉망이라는 생각이 들더라도, 우리가 다시 희망을 꿈꿀 수 있는 이유입니다. 이건 그저 600년 전 잉글랜드의 이야기입니다.

“짐은 국가와 결혼했다.‘ 튜더의 장미무늬 가운을 입고 통치의 위엄을 보이는 엘리자베스1세.
<네줄요약>

ㅇ장미전쟁의 요크파 리더 에드워드 4세는 과부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충동적으로 결혼하면서 프랑스와 동맹할 기회를 놓쳤다.

ㅇ우드빌의 국정농단으로 에드워드 4세의 정치적 동지들이 모두 그를 떠났다.

ㅇ왕의 권력이 약화한 상황에서 에드워드4세가 죽자 아들 에드워드 5세는 삼촌 리처드3세에 의해 쉽게 권력을 빼앗긴다.

ㅇ엘리자베스 우드빌은 헨리 튜더에게 붙어 리처드 3세를 다시 죽음에 빠뜨렸고, 잉글랜드는 절대왕정 국가를 만들었다.

<참고문헌>

ㅇ찰스 오만,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장미전쟁의 킹메이커, 필요한책, 2019년

ㅇ앙드레 모루아, 영국사, 김영사,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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