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달란 적도 없었는데?" 중국은 왜 한국에 비자면제를 던졌나
김대기 신임 대사 부임 계기로 한중관계 개선 전망 나와
밀착 김정은·푸틴 관계에 한중관계 개선으로 견제구
중국 정부의 전격적인 한국인 15일 비자 면제 결정은 미국 대선이 끝나기 전에 미국은 물론 북한에게도 광범위한 외교적 메시지를 던지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새 미국 대통령이 대 중국 외교 전략을 구체화하기 전에 관계개선의 여지를 마련하고 명분상 우위에 서겠다는 의도도 읽힌다.
온갖 정보와 구비서류를 요구하는데다 발급비용도 비싸기로 악명 높은게 중국 비자다. 중국 외교부는 그런 비자에 대해 지난 1일 저녁, 관광 등으로 중국에 오는 한국 여권 소지자의 경우 오는 8일부터 2025년 12월31일까지 한시적으로 총 15일간 면제한다고 밝혔다. 중국 비자신청을 한 번이라도 직접 해 본 사람이라면 이 조치가 중국 방문 문턱을 얼마나 낮추는지 알 수 있다.
한중관계가 특히 가까웠던 역대 정부에서도 없었던게 중국 입국 무비자 조치다. 중국은 그간 한국인에 대해 동남부 휴양지인 하이난도(해남도)에 대한 30일 무비자, 제3국으로 향하는 경유에 대해 본토 최대 144시간 무비자 등의 혜택을 준 적이 있다. 그러나 본토를 방문하는 한국 여권 소지자 전원에 대한 비자 면제는 이전의 것들과는 유가 다른 전향적 조치다.
그런데 이번 비자면제 조치에 대해서는 전혀 사전교감 정황이 포착되지 않았다. 중국 정부의 발표 형태도 던졌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중국은 자국 기자와 린젠 외교부 대변인 문답 말미에 "중국인과 외국인 인적왕래를 위해..(중략)..아이슬란드, 안도라, 모나코, 리히텐슈타인과 한국에 대한 비자면제 정책을 시행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정치외교적으로 중국에 별다른 변수가 될 수 없고, 한국과도 지리·경제적 카테고리로 전혀 묶이지 않는 8개 나라를 나열하더니 아홉번째로 슬그머니 한국을 끼워넣었다.
중국 입국 비자 불편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가 공식적으로 중국에 비자면제를 요청한 적은 없다. 경제단체들이 중국 경제단체와 교류하면서 양해각서에 희망 항목으로 끼워넣는 정도였다. 한 현지 관료는 이에 대해 "외교의 상호주의 때문인데,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줘야한다"며 "출입국 인원만 놓고 볼 때 만약 상호 비자면제가 된다면 우리나라에 남는 장사라고 보긴 어렵다"고 설명했다.
올해 기준 한국에 거주하는 중국 교민은 약 94만명, 한국을 일시 방문한 중국인의 수는 지난해 하반기만 220만명에 달했다. 반면 중국 거주 한국 교민은 지난해 집계를 기준으로 약 21만6000명 정도이며, 올해는 더 적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을 일시적으로 오가는 한국인 수도 중국인 입국자에 비해 매우 적다. 상호비자면제가 된다면 중국 혜택이 더 크다. 한중 경찰 교류에서 매번 상호 운전면허 인정 안건이 논의되지만 성사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다. 혜택을 입는 중국인이 한국인에 비해 훨씬 많기 때문이다.
또 반중감정이 고조되는 한국에서 중국인들이 일단 입국했다가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남아있을 수 있다는 우려가 조성된다면 정부에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이 가운데 상호 비자면제가 아닌 일방적 해금은 중국 측의 일정 양보로밖엔 해석하기 어렵다. 중국이 한국에 외교적 카드를 던졌다는 거다.
한 중국 내 외교소식통은 "사실 한국에 대한 중국의 일관된 입장은 '우린 할 만큼 했으니 너희도 성의를 보이라'는 거였다"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우리 정부가 중국 쪽의 화해의 제스쳐를 수차례 무시했다는게 중국의 주장이다. 중국과 거리를 유지하는 외교전략이 유효한 시점이라면 나쁠게 없지만 문제는 미국 대선을 계기로 동북아 정세가 빠르게 변화할 가능성이 있다는 거다.
만약 도널드 트럼프가 다시 미국 대통령이 된다면 중국과 관계개선, 내지는 북한을 이용한 중국 압박 카드가 다시 유효해질 수 있다. 중국으로서는 그전에 동북아 한중일 정세를 지금의 국면보다는 유연하게 만들어 둘 필요가 있다. 우리 입장도 마찬가지다. 지금처럼 중국을 백안시하다가 미중관계가 빠르게 개선된다면, 우리만 외교적으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수 있다.
우리 정부가 최근 새 주중대사로 윤석열 대통령 최측근인 김대기 전 대통령 비서실장을 낙점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중국의 15일 비자면제는 중량급 주중대사 인선에서 어떤 메시지를 읽고 이뤄진 조치다. 가뜩이나 중국이 한국인 반도체 기술자를 역대 최초로 반간첩법 혐의로 구속한 상황이다. 양국 감정이 갈등 일변도로 치닫는다면 아예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공석인 싱하이밍 전 주한중국대사 후임 임명도 예상보다 빠른 시점에, 일정 수준 이상의 인사로 이뤄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양국 관계가 점진적으로 개선된다면 내년 11월 우리나라 경주에서 열릴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참석, 한미 정상회담이나 한중 정상회담이 열릴 가능성도 한 층 높아질 전망이다. 외교가에선 이미 시 주석이 불참할 명분이 없는 만큼 11월 APEC이 한미중 관계 개선의 변곡점이 될 수 있다는 해석이 나오던 터였다.
이미 다 지어진 신압록강대교 개통이 뚜렷한 이유도 없이 미뤄지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사적 물품까지 밀수품이라며 중국 정부에 압수되는 등 북중관계 악화를 의미하는 최근 사례는 차고 넘친다. 북한으로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파병 등으로 러시아와 밀착하며 생존전략을 찾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다. 중국은 그런 북한을 길들이고싶다.
특히 미국 대선을 계기로 북한이 개별적으로 미국과 접촉을 재개할 가능성도 높게 점쳐진다. 데니스 로드먼이 다시 북한을 방문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중국이 한국과 관계개선을 통해 분위기를 바꾸려는 의도로 움직일 수 있다는 거다.
정치외교적 이유는 차치하고, 경제적 측면만 봐도 한중관계는 개선이 필요하다. 지난해 한중 교역규모는 2615억달러(약 353조원)로 여전히 가장 많았다. 1869억달러(약 252조원)인 미국과도 비교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그러나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중국 개혁개방 이후 가장 어려운 상황을 겪고 있다. 실적 급감에 조직규모를 줄이는 기업이 적잖다. 이 결과물이 약 17억달러에 달하는 지난해 한국의 대 중국 무역적자다. 한국의 대중 무역적자는 92년 한중수교 이후 작년이 처음이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교민사회는 일제 환영의 뜻을 밝혔다. 한 현지진출 한국기업 법인장은 "9월말 우리 대사관 행사에서 우리측 인삿말에 '양국은 이웃이며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것을 듣고 양국관계에 뭔가 변화가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15일 비자면제는) 굉장히 긍정적인 소식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베이징(중국)=우경희 특파원 cheerup@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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