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제 아파트는 게임, 윤수일 아파트는 잠실, ‘난쏘공’ 아파트는?
로제와 브루노 마스가 부른 ‘아파트’ 열풍이 가라앉을 줄 모른다. 이번 주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 ‘핫 100’에서 8위까지 올랐는데, 어쩌면 로제는 블랙핑크로도 못 해본 ‘핫 100’ 1위를 차지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나라 여자 가수로는 최초다. 남자 가수로는 방탄소년단(BTS) 정국과 지민이 1위를 차지한 적 있고, 그전에는 싸이의 ‘강남 스타일’ 2위가 최고 기록이었다.
로제의 신축(?) 아파트 덕분에 구축 아파트 주인 윤수일도 재조명받았다. 대략 40대 이상 세대에게는 노래방 애창곡이자 운동회나 야구장 응원가로 모를 수가 없는 이 노래가 젊은 세대들에게도 전파된 셈이다. 윤수일의 ‘아파트’를 처음 들은 사람들의 평이 유튜브 댓글과 에스엔에스(SNS)에 넘쳐나고, 심지어 외국인들까지 이 노래를 듣고 감상을 나누는 진풍경도 벌어지고 있다. 신축·구축 아파트를 섞은 매시업 리믹스도 나왔는데 안 들어보신 분들은 찾아 들어보시길.
이제부터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윤수일은 인터뷰에서 친구의 이별 사연을 듣고 곡을 만들었는데 노래 속 아파트는 잠실 아파트라고 했다. 그렇다면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 부는 갈대숲을 지나’면 등장하는 아파트는 정확히 어떤 단지일까? 이미 ‘엘리트파’(엘스·리센츠·트리지움·파크리오)로 재건축된 곳보다는 아직 구축으로 남아 있는 장미아파트나 잠실 주공 5단지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잠실대교를 건너며 본 아파트가 영감을 주었다고 윤수일이 밝혔는데, 다리 양쪽으로 늘어선 아파트가 이 둘이기 때문이다.
잠실 아파트는 이 노래만큼이나 유명한 소설에도 등장한다.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 일부를 보자. 소설 속 난쟁이 가족의 터전을 헐값으로 사들인 부동산 개발업자에게 막내딸 영희가 몸을 내주는 대목이다.
‘그의 광고도 신문에 날마다 났다. <잠실은 우리 모두의 관심입니다. 잠실 아파트에 대해 상담하실 분들은 지금 곧 전화하세요. 은아는 당신의 성실한 부동산 안내자입니다. 은아 부동산>’
‘난쏘공’에서 잠실 아파트는 ‘그’가 파는 매물이지 ‘그’의 집은 아니다. ‘그’의 아파트는 ‘영동 지역에 있으며 제3한강교를 건너면 보이는 벌판에 서 있다’고 묘사된다. 간단하게 고증해보자. 먼저 영동은 지금의 강남 지역이고, 제3한강교는 한남대교다. 지금 한남대교 양쪽에는 압구정 미성아파트와 잠원동 한강아파트가 서 있다. ‘난쏘공’은 1976년 겨울에 발표됐고, 이 아파트들은 1980년대에 만들어졌으니 탈락.
그렇다면 타임머신을 타고 1976년의 한남대교를 건넌다면 어떤 아파트가 보일까? 후보지는 두 곳으로 좁혀진다. 반포 주공아파트(1973년 준공)와 압구정 현대아파트(1차 2차 1976년 준공). 당시 사진을 보면 두 단지 주변은 허허벌판이거나 공사판으로, 소설 속 묘사와 정확히 일치한다. 반포대교나 동호대교도 아직 없던 시절이다. ‘그’가 그 집에서 꽤 살았다는 설정까지 따져보면, 소설 집필 시기에 막 준공한 압구정 현대보다는 몇년 전에 입주를 마친 반포 주공일 가능성이 더 높다. ‘난쏘공’이 1975년부터 발표한 연작 소설 중 한편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난쏘공’은 당시 우리 사회의 자본주의 계급도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명작이다. 도시가 개발되면서 삶의 터전에서 점점 밀려나는 난쟁이 가족이 최하층에 있고, 그런 도시 빈민들의 입주권을 사들이고 되팔아 부를 축적하는 ‘그’는 최상위층에 있다. ‘그’의 성노리개가 되기를 자처한 막내딸 영희는 ‘모든 면에서 태어날 때부터 극복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고 토로한다.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 사회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강남의, 서울의, 수도권의 높은 집값을 감당하기 힘들어 점점 외곽으로 밀려나는 사람들 이야기는 여전히 경제면 단골 뉴스다. 50년 전 최상위 포식자였던 ‘그’가 살던 반포 주공아파트는 어떻게 되었을까? 한달 전 반포 원베일리 국민평형(전용면적 84㎡)이 60억원에 실거래되어 전국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반포 주공은 2027년 입주 예정인 새 아파트로 재건축 공사 중인데, 이 가격을 가뿐히 넘을 거라고 업계는 전망한다. 1980년대 윤수일의 ‘아파트’와 2024년 로제의 ‘아파트’는 제목 빼고 모든 것이 다른 노래지만, ‘난쏘공’ 속 부동산 계급도는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공고하며 그 격차는 더 아득해졌다.
이런 심각한 이야기로 칼럼을 마칠 순 없지. ‘아파트’가 윤수일의 유일한 히트곡인 줄 오해하는 분들을 위해 몇곡을 추천해본다. 80년대에 나왔다고 믿기 힘든 세련된 시티팝 ‘아름다워’, 제목처럼 황홀한 로큰롤 댄스 ‘황홀한 고백’, 그의 노래 중 가장 강렬한 하드록 ‘토요일 밤’, 연륜이 느껴지는 ‘터미널’…. 참 많은데 그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데뷔 앨범에 수록된 ‘제2의 고향’이다. 이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음악으로 먹고살겠다고 서울에 막 올라온 시골 청년 윤수일이 기타를 메고 저기 걸어가는 것 같다.
에스비에스 라디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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