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 야구의 시대…야구 없는 겨울 어찌 버티나
그날은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에서 2024시즌 마지막 경기가 열린 날(10월25일)이었다. 한국시리즈 4차전. 삼성 라이온즈는 이날 기아(KIA) 타이거즈에 2-9로 졌다. 전날(24일) 열린 3차전에서 1승을 거뒀지만 4차전에서는 포스트시즌 출전 30경기 동안 단 한 개의 홈런도 없던 기아 김태군에게 프로 데뷔 첫 만루홈런을 얻어맞는 등 대패했다. 어느덧 라이온즈의 심장이 된 선발투수 원태인도 어깨 부상으로 3회를 채우지 못하고 내려갔다. 가슴 아픈 시즌 피날레였다.
패배의 순간에도 울려 퍼진 응원가
하지만 라이온즈파크에 모인 삼성 팬들은 ‘패자’의 모습을 하지 않았다. 경기가 끝난 뒤 한참 동안 3루석을 중심으로 모여 “최강 삼성 승리하리라~ 오오오 오오오오오오”로 이어지는 응원가 ‘엘도라도’를 불렀다. ‘엘도라도’는 저작인격권 문제로 한동안 야구장에서 불리지 않다가 이종열 신임 단장 부임 뒤 백방으로 수소문해 이 문제를 해결하면서 올 시즌부터 다시 울려 퍼지게 됐다.
이날 라이온즈파크에는 삼성 팬들만 남아 있던 게 아니다. 12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에 단 1승만 남겨놓은 기아 팬들은 1루석과 외야에 포진해 “승리하라 최강 기아, 열광하라 타이거즈 우리들의 함성을 모아서 외쳐라 워어워”로 이어지는 기아 팀 응원가를 불렀다. 카드섹션을 방불케 하는 구단 머플러 응원전도 펼쳤다. 적진 한복판에서 ‘우리’ 선수들이 절대 주눅 들지 않고 마음껏 기량을 펼칠 수 있게 더 큰 목소리로 외치고 노래를 불렀다.
비단 라이온즈파크에서만이 아니었다. 광주 챔피언스필드에는 1만1467명의 팬이 모여 전광판으로 중계되는 대구 경기를 보면서 응원했다. 전날에도 챔피언스필드에는 1만1616명의 팬이 야구장을 찾아 “최강 기아!”를 외쳤다. 경기 현장인 대구에는 닿지 않겠으나 다 함께 단 한 곳만을 바라보며 ‘우리 팀’을 응원했다. 야구로 얻는 물질적 이득은 하나도 없건만 팬들은 가을의 끝자락에서 선수들의 몸짓 하나하나에 그렇게 울고 웃고 있었다.
2024년 야구장에는 사람이 넘쳐났다. “야구 표 구하기가 힘들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프로야구 관중은 2023년 800만 관중(810만326명)을 회복하더니 2024년에는 1982년 출범 뒤 사상 처음으로 1천만 관중을 돌파(최종 1088만7705명·평균 관중 1만5122명)했다. 10개 구단 중 6개 구단이 홈 100만 관중을 넘어섰다. 총 관중 수입은 1531억원에 이른다. 20년 전인 2004년 8개 구단 관중 총수입이 87억원(233만 명)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전벽해 수준이다. 2024년 관중 수입이 가장 많은 엘지(LG) 트윈스는 홈 73경기 동안 208억원을 벌었다.
표 구하기가 가장 어려웠던 한 해
포스트시즌 티켓 가격은 정규리그 때보다 2~3배 비쌌는데도 16경기 전부 매진됐다. 역대 두 번째 일이다. 포스트시즌 수입은 기아와 삼성의 31년 만의 한국시리즈가 열리기도 전에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2024년 포스트시즌에는 총 35만3550명이 입장했고, 최종 입장 수입은 약 146억원을 기록했다.
비수도권 구단인 기아와 삼성의 관중 증가는 괄목할 만했다. 특히 삼성은 대구 홈 73경기 동안 134만7022명의 관중이 찾아 엘지(139만7499명) 다음으로 많은 관중 기록을 썼다. 서울 구단인 두산 베어스(130만1768명)도 제쳤다.(비록 두산은 삼성보다 홈 2경기가 적었지만) 삼성이 홈 100만 관중을 넘어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시즌 전 하위권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성적(정규리그 2위)이 좋았을 뿐만 아니라 세대교체가 이뤄지면서 젊고 활기찬 야구를 한 것이 대구 팬들을 사로잡았다. 삼성 라이온즈 구단 관계자는 “야구장을 찾는 팬층을 보면 2030세대도 늘었지만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가족 단위 팬이 많아졌다. 이게 더 고무적”이라고 했다.
2024년에는 순위가 얼추 정해진 9, 10월에도 관중이 줄지 않았다. 순위에 실망했어도 선수들에 대한 응원을 멈추지 않았다. 주말뿐만 아니라 주중에도 평균 1만3천 명에 가까운 팬들이 야구장을 찾기도 했다. 야구장이 비단 야구만 보는 곳이 아니라 경기 그 자체를 즐기는 엠제트(MZ)세대의 놀이터가 됐다. 광주에서 만난 한 택시 기사는 “야구장을 처음 찾은 20대 여성 손님들이 ‘너무 재밌다. 다음에 또 오자’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들었다”고 했다.
이번 포스트시즌 특징 중 하나는 유니폼을 입은 팬들이 야구장마다 넘쳐났다는 것이다. 야구장을 찾은 80% 이상의 팬들이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야구장으로 가는 버스, 지하철, 기차역에는 응원 팀의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제는 응원 팀의 구분을 색깔로 할 수 있을 정도로 야구장이 유니폼 색깔로 쪼개진다.
한국시리즈에서는 검빨색(검은색/빨간색)의 타이거즈 팬과 파란색/흰색의 라이온즈 팬들이 야구장을 한가득 채웠다. 한 구단 관계자는 “포스트시즌만 보면 국내 팬들이 오히려 메이저리그(MLB)보다 더 유니폼을 입고 응원하는 것 같다”며 “요즘 팬들이 자신의 응원 팀 정체성을 보여주는 데 거리낌이 없다”고 했다. 유니폼의 경우 마킹지(번호·이름 새김 용지)까지 포함해서 금액이 15만원 상당에 이르지만 종종 품절돼 구하기 힘들 때가 많다고 한다.
하긴 그렇다. 야구장은 혼자 가더라도 옆 사람들과 금방 동화될 수 있다. 같은 팀 유니폼을 입고 있으면 친근감이 배가된다.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팀, 선수를 응원하면서 같이 열광하고 같이 좌절한다. 오늘 져도 괜찮다고 느낀다. 내일은 이길 수 있다는 희망만 있다면. 그러한 감정을 함께 나누면 기쁨은 두 배가 되고 절망은 반으로 줄어든다.
함께 열광하고 좌절하며 ‘우리'라서 즐거웠다
어쩌면 연대감이겠다. 코로나19 시절 모두가 직간접적으로 강요된 외로움을 겪었다. 공공장소에서는 제한된 인원만 만날 수 있었고, 서로 간 2m 거리를 둬야만 했다. 목소리는 낮춰야 했고, 때로는 침묵을 권고받기도 했다. 하지만 고약한 바이러스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무엇이든 함께하는 게 가능해졌다. 서로 어깨가 닿아도 상관없고 목청껏 노래를 부를 수도 있다. 게다가 목표는 오로지 하나(승리)다. 프로축구 케이(K)리그에 올 시즌 초반 관중이 몰렸다가 점점 줄어든 것과 비교될 만하다. 프로야구는 프로축구와 달리 1주일에 하루만 빼고 매일 한다.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팀(기아), 준우승팀(삼성) 모두 같은 말을 했다. “올 시즌 우리 팬분들 덕에 너무 행복했다”고. ‘우리 팀’ ‘우리 선수’ 그리고 ‘우리 팬’으로 충만했던 낭만 야구의 시대였다. 생각을 멈추고 그냥 즐기면 됐던. 야구가 없는 이번 겨울은 꽤 길 것도 같다.
김양희 한겨레 문화부 스포츠팀장 whizzer4@hani.co.kr
* 오랫동안 야구를 취재하며 야구인생을 살아온 김양희 기자가 야구에서 인생을 읽는 칼럼입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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