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가 시흥 즐기며 볕 누린 고을…가보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 [ESC]

한겨레 2024. 11. 2.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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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갑수의 작은 마을 여행 충북 단양
국내 최대 규모 대법당 구인사
도담삼봉 등 ‘단양8경’ 절경들
패러글라이딩 감상 가능 산카페
발밑 풍경 스카이워크·마늘음식도
강 가운데 조각배처럼 떠 있는 3개의 바위 봉우리 ‘도담삼봉’. 단양팔경 중 하나다.

지금까지 한국을 혼자 이곳저곳 여행하며 느낀 건, (어쩌면 당연한 말 같지만) ‘너무 좋다!’라는 것이다. 경주는 경주대로, 전주는 전주대로, 보령은 보령대로 좋다. 영월은 영월이라서 좋고, 강릉은 강릉 같아서 좋고, 봉화는 봉화 같아서 너무 좋다. 제주는 두말할 것 없고. 그리고 봄에는 봄이라서, 가을은 가을이라서 좋다.

예전엔 이걸 왜 몰랐을까. 음, 아마도 젊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나이를 어느 정도 먹은 지금에야 좋은 것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살면서 ‘사는 게 다 나이가 하는 일’이라는 걸 깨달아 가고 있는데, 여행도 마찬가지다. 사는 건 곧 여행이고 여행도 다 나이가 하는 일이니 그땐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좋은 것들이 이제서야 보이는 것이다. 사금파리처럼 반짝이는 그것들을 발견하는 일이 즐겁다.

140개 절 관장, 천태종 총본산

가치가 높거나 규모가 큰 절을 뜻하는 대가람 구인사.

지금은 단양 구인사에 와서 절밥을 먹고 있다. 작은 촬영 의뢰를 받아 단양에 오게 되었는데, 문득 구인사가 궁금했다. 종교가 있는 건 아니지만 요즘 ‘금강경’을 읽고 있다. 모두가 아시다시피 ‘금강경’은 불교의 경전이다. 우연히 접하게 되었는데 몇 장 읽어 보니 종교 서적이라기 보다는 철학 에세이 같아 곁에 두고 틈날 때마다 읽고 있다. ‘금강경’과 구인사 사이에 특별한 연결 고리가 있는 건 아니지만, ‘금강경’을 읽다 보니 절이 떠올랐고, 단양으로 오는 길에 ‘구인사’라고 적힌 도로표지판을 보고서는 시간에 조금 여유가 있어 ‘구인사에나 가볼까?’ 하는 마음으로 오게 된 것이다. 혼자 떠나는 여행은 시간에 여유만 있다면 일정을 내 맘대로 조정할 수 있어 좋다.

구인사는 예전에 한 번 와본 적이 있다. 상당히 큰 절이라고 느꼈다는 것만 어슴푸레하게 기억하고 있다. 실제로 구인사는 큰 절이다. 소백산 연화봉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데, 천태종의 총본산이라고 한다. 전국에 140개나 되는 절을 관장하고 있다니 정말 대단한 규모다. 1945년에 상월(上月) 스님이 손수 칡덩굴을 얽어 삼간초암을 지은 것이 시작이었고 1966년부터 크게 증축했다고 한다. 처음 찾았을 때 3~5층의 현대식 건물의 대가람이 길 양편으로 늘어서 있는 것에 놀랐다. 풍경이 한가롭게 댕강거리는 ‘절집’만 다니다가, ‘와! 절이 이렇게 커도 되는구나’ 하면서 새삼 놀라고 감탄했던 것 같다. 국내 최대 규모인 대법당을 비롯해, 설선당, 인광당, 장문실, 향적당, 도향당 등 50여 동의 건물들이 경내를 꽉 메우고 있다. 1만여 명이 취사할 수 있는 규모라고 한다.

구인사 가는 길.

구인사에 가려면 산 아래에 자리한 주차장에서 노선버스나 셔틀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 물론 걸어가도 된다. 40분 정도 걸린다고 하는데 단풍 든 숲이 좋아 걸어가 보기로 했다. 오르막길을 계속 올라가려면 힘이 들겠지만, ‘지금 아니면 언제 이 단풍 속을 걸어보겠어’ 하는 마음으로 걸었다. 여행을 할 땐 되도록이면 ‘지금 아니면 언제 해보겠어’ 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나이 50이 넘으니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이 ‘시간’이라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시간은 결코 늘어나는 법이 없고 반드시 줄어든다. 한 시간에 꼭 한 시간씩 줄어드는 시간을 가장 잘 사용하는 방법은 몸으로 직접 해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을 때쯤 광명전에 도착했다. 7층짜리 건물이다. 5층에 있는 광명전을 돌아본 후 7층으로 나가면 조사전이다. 조계종 사찰의 경우 부처님의 불상이 있는데, 이곳에는 대조사님의 불상 즉 사람의 불상이 있다. 조사전을 돌아보고 내려오면서 시계를 보니 운이 좋다. 때마침 공양시간이다. 새벽같이 나선다고 아침을 거른 터라 배가 고팠는데 절밥을 얻어 먹을 수 있는 것이다.

공양간으로 가 식판을 들고 줄을 선다. 된장국과 김치, 감자 그리고 고추장 한 숟가락으로 이루어진 단출한 밥이다. 양념 하나 남기지 않고 맛있게 먹었다. 구인사는 장이 좋다. 비탈을 따라 가람 사이를 다니다 보면 곳곳에 장독이 놓여 있는 걸 볼 수 있다. 고추장이며 된장 등을 구인사에서 직접 담근다.

공양간에서 약수터를 지나 조금 더 내려오다 보면 왼편에 기념품을 파는 상점이 있다. 요즘 말로 하면 사찰 굿즈숍 같은 곳이다. 원래 기념품 같은 건 사지 않지만 절밥도 얻어먹어 기분이 좋고 해서 염주 팔찌를 하나 사서 일주문을 지나왔다. 가을은 깊어 은행잎은 노랗게 물들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은행잎이 우수수 허공 중으로 날렸다. 허겁지겁 올라갈 때는 미처 보지 못한 풍경이었는데….

정도전이 머리식힌 도담삼봉

카페산에서는 패러글라이딩을 보며 커피를 마실 수 있다.

허기를 면하고 나니 차 한잔이 생각난다. 단양에 카페산이라는 곳이 유명하다길래 구글맵으로 검색해 보니 가깝다. 패러글라이딩 활동장 옆에 자리하고 있는 카페라서, 수시로 날아오르는 패러글라이더들을 보며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곳이다. 이런 곳에 카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산 위로 구불구불 올라간다. 그리고 나타나는 카페. 생각보다 상당히 넓고 세련된 분위기다. 카페 한 쪽에는 폐낙하산으로 만든 가방과 지갑 등 다양한 제품도 판매하고 있다. 이것저것 살펴보며 모자와 지갑 등 사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참았다. 모자도 이미 여러 개 가지고 있고, 지갑도 지금 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물건을 쌓아 놓고 사용하는 편이 아니다. 여행을 하면 이런 스타일이 여러 모로 편리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스스로 말하기엔 좀 쑥스럽지만, 나는 물욕이 없는 편이다. 갖고 있는 거라곤 2014년식 자동차와 7~8년 전에 산 디지털 카메라, 청바지와 티셔츠 몇 벌이 전부다. ‘기념품 욕심’ 같은 건 아예 없다. 20년 넘게 여행작가를 했지만 집에는 그 흔한 마그넷 하나 없다. 동료 여행작가 중에는 어딘가에 가면 반드시 뭔가를 사야 하는 이가 있는데, 에티오피아 취재 여행에서 조각품을 사서 힘들게 다니는 그를 볼 때마다 나는 참 편한 인간이구나 하는 걸 다행으로 여겼던 것 같다. 아, 그렇다고 그런 이들보다 내가 낫다는 건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길. 기념품을 사는 이들에겐 그들 만의 이유가 있을 테니 말이다.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커다란 낙하산 하나가 훌쩍 날아오른다. 새처럼 허공으로 붕 떠서 점점 멀리 날아가는 그들이 멋지게 보인다. 패러글라이딩. 앞으로 내 인생에 패러글라이딩을 하는 날이 올까? 아마, 그런 날은 절대 오지 않겠지. 날아오르는 패러글라이더를 보며 커피를 마시는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한다.

단양은 한때 우리나라에서 소주가 가장 많이 팔리는 고장이었다고 한다. 제주보다 더 많이 팔렸다는데, 전국에서 몰려든 관광객들로 단양읍내가 북적일 때였다. 그 당시 사람들은 아마도 도담삼봉을 비롯해 ‘단양팔경’이라는 걸 보려고 오지 않았을까 싶다. 카페산에서 나와 도담삼봉을 찾았을 때도 도담삼봉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중년의 관광객들을 볼 수 있었다. 도담삼봉은 강 가운데 조각배처럼 떠 있는 3개의 암봉 중 가운데 봉우리에 정자 하나가 걸터앉아 있는 모습이다. 명산을 축소해 일부러 만들어 놓은 미니어처 같기도 한데, 볼 때마다 느끼는 건 정말 ‘뫼 산山’ 자처럼 생겼다는 것이다.

단양과 도담삼봉을 유난히 좋아했던 이는 퇴계 이황이다. 권세 싸움에서 벗어나 한직에 내려와 있던 그는 단양의 매력에 빠져 시흥을 즐겼다.

“산은 단풍으로 물들고 강은 모래벌로 빛나는데 /삼봉은 석양을 이끌며 저녁노을을 드리우네 /신선은 배를 대고 길게 뻗은 푸른 절벽에 올라 /별빛 달빛으로 너울대는 금빛 물결 보러 기다리네.”

퇴계가 도담삼봉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구인데, 배를 타고 가던 신선이 절벽에 올라 석양에 물드는 금빛 물결을 보러 기다린다니, 정말이지 낭만적이다. 그때 만약 인스타그램이 있었다면 퇴계는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찍어 올리고 이런 시를 썼을까? 내 생각엔 ‘아마 썼을 것이다’에 한 표. 사람은 좋은 풍경 앞에서는 뭐라도 써야 하는 존재니까 말이다. 도담삼봉은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도전과도 인연이 깊은데, 외가가 단양이었던 정도전은 젊은 시절 도담삼봉을 자주 찾아 머리를 식혔고, 그의 호 ‘삼봉’도 도담삼봉에서 따 온 것이라고 한다.

도담삼봉 관광지 왼쪽 편에는 팔각정으로 오르는 길이 있는데 팔각정에서 등산로를 따라 200m 정도를 가면 웅장한 석문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단양팔경 제5경인 사인암도 접근하기가 쉽다. 70m 높이의 깎아지른 듯한 바위가 서 있는데, 조선 최고의 화원으로 불리는 단원 김홍도도 사인암을 화폭에 담으려 붓을 잡았다가 1년여를 고민했다고 한다. 아참, 도담삼봉을 비롯한 ‘단양8경’은 전국의 ‘OO10경 ‘OO8경’ ‘OO10미’하는 것들의 원조 격이 아닐까 싶다.

남한강 배경 시속 50㎞ 짚와이어

바닥이 철제망으로 돼 있는 만천하스카이워크. 발 아래 까마득한 풍경에 심장이 쪼그라드는 느낌이 든다.

단양은 ‘연단조양’(鍊丹調陽)을 줄인 것이다. ‘연단’은 ‘신선이 먹는 환약’을 말하고, ‘조양’은 ‘빛이 골고루 따뜻하게 비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단양은 ‘햇볕이 골고루 비치는 고을에서 신선처럼 무병장수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를 확인하려면 만천하스카이워크에 가보면 된다. 만 개의 골짜기, 천 개의 봉우리라는 뜻의 만학천봉(320m) 위에 세워진 철제 구조물이다. 원형의 전망대를 따라 오르며 소백산과 금수산, 월악산을 동서남북 사면으로 감상하며 걷다 보면 정상에 도착한다. 꼭대기에는 밖으로 돌출된 스카이워크가 모두 3개 있다. 중앙의 가장 긴 것은 바닥이 철제망과 유리 조합으로 되어 있고, 두 개의 작은 스카이워크는 모두 통유리로 만들어졌다.

유리 바닥에 오르면 발아래 까마득한 풍경에 심장이 쪼그라드는 느낌이다. 스릴만큼이나 전망도 좋다. 양방산 전망대와 단양 읍내, 남한강철교, 단양역 등이 선명하게 보인다. 멀리 두산활공장에서 날아오른 패러글라이더도 알록달록한 점처럼 푸른 하늘에 찍혀 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이들에겐 담력 테스트를 해볼 수 기회다. 짚와이어로 산을 내려올 수 있다. 짚와이어는 금수산 지맥과 남한강을 배경으로 980m 구간을 시속 50㎞를 넘나드는 속도로 활강한다. 짚와이어 역시 패러글라이딩처럼 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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