뱅쇼, 손은 ‘따뜻’ 속은 ‘뜨끈’… 얼죽아는 잠시 안녕![정연주의 캠핑카에서 아침을]
와인에 과일·향신료 넣고 끓인 음료
약불에 데워 머그잔에 마시면 손난로
면역력 향상 ‘감기·오한’ 예방 효과
무슨 일이 있어도, 곧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정체성은 버릴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물론 지금도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한 어떤 계절에도 카페에 들어가 아이스 아메리카노, 아이스 드립 커피를 기본으로 주문한다. 받자마자 한 모금 쭉 들이켜면 느껴지는 시원한 해갈, 바로 흡수되는 듯한 카페인의 짜릿함, 직전까지 무엇을 먹었든 ‘싹 내려간다’는 기분은 아이스 커피가 아니면 느끼기 어려운 조합이다. 가끔 음료는 따뜻하게 마셔야 몸에 좋다는 잔소리가 들어오면 서로에게 느슨한 연대감을 느끼는 인터넷 ‘얼죽아’협회의 존재를 아느냐며 농담처럼 받아치는 것도 재미다.
하지만 이제는 특정한 어떤 순간에는 따뜻한 음료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최소한 목 관리를 위해서는 차가운 음료가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 이제 몸으로 체감된다. 아무리 차가운 물을 많이 마셔도 말을 많이 하고 나면 목이 칼칼하게 붓기 시작하는 것이다.
같은 원리로 목감기에 걸려서 목을 따뜻하게 쓸고 내려가는 마사지와 같은 기운이 필요할 때면 이제 생강과 레몬을 송송 썰어서 냄비에 넣고 차를 끓인다. 어린 시절에는 어머니가 안 그래도 감기로 아픈 목을 맵게 만드는 생강차를 끓여 주는 것이 그렇게 싫었는데, 이제는 마치 모기에게 물린 곳을 벅벅 긁는 듯한 시원함을 바라는 마음으로 물만큼 생강을 넣어 거의 ‘엑기스’에 가까운 생강차를 끓인다. 고속으로 증상이 완화되기를 바라는 조급한 마음이다.
그리고 따뜻한 음료가 필요한 가장 중요한 순간이 있으니, 너무 당연하게도 추울 때다. 사실 ‘얼죽아 회원’이라며 지금도 차가운 커피를 고집하며 생활할 수 있는 것은 내 직업이 컴퓨터 앞에서 글을 다듬는 것을 주로 삼는 덕분이다. 기온의 변화에 따라 출근하는 나의 옷차림은 바뀌지만 기본적으로 바람은 차단되고, 에어컨과 히터로 온도가 적절히 유지되며, 실내라 습도가 들쭉날쭉할 일이 없다. 오히려 냉난방 시설이 중앙에서 컨트롤하는 방식이면 애매하게 온도가 내려가는 환절기에는 두껍게 바뀐 옷차림에 비해 난방이 강하거나 냉방이 약해서 개인이 음료의 차가움으로 체내 온도를 조절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말하자면 한겨울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문화는 사계절이 흐르는 동안에도 크게 변화를 느끼기 힘든 실내에서 주로 생활하는 도시인을 위한 것이다.
배안에 어떤 온도를 집어넣는지가 방한에 지대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체감한 것은 캠핑을 시작한 이후다. 그전까지 나약한 실내형 도시인으로만 살아오며 겨울에도 길어봐야 러닝이나 산책 정도로만 실외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겨울 카페에 가도 잠시 이동하는 순간에나 춥지, 니트와 패딩을 잔뜩 껴입고 난방이 잘되는 카페에 있으면 슬슬 땀이 나는 것도 흔한 일이기 때문에 차가운 음료를 주문하는 것이 습관이었다.
하지만 똑같이 옷을 껴입어도 잠시 외부 활동을 하는 것과 내내 외부에 머물러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아주 다르다. 아무리 따뜻한 옷이나 침낭이라 하더라도 핫팩이나 전기장판을 동원하지 않는 이상 그걸 데우는 유일한 발열원은 내 몸인 것이다! 몸을 녹이고 찬 기운을 내보낼 틈이 없는 야영장에서 자칫 차가운 물이라도 벌컥벌컥 마셨다가는 안에서부터 차오르는 한기에 치아가 딱딱 부딪치게 될 수 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저녁 추위가 닥칠 때 체온을 지키고 손끝까지 따뜻하게 데우며 면역력까지 길러준다는 핑계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어른을 위한 추위 퇴치 음료, 뱅쇼다.
뱅쇼, 뮬드 와인, 글뤼바인, 글록
프랑스어로 뱅쇼(Vin Chaud), 영어로는 뮬드 와인(Mulled Wine), 독일어로는 글뤼바인(Gluhwein), 스칸디나비아에서는 글록(Glogg). 와인에 과일과 향신료를 넣고 따뜻하게 데워서 마시는 뱅쇼는 특히 유럽의 크리스마스 마켓에 반드시 등장하는 음료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캐럴>에서 스크루지가 마음을 고쳐먹은 후 마치 온기를 나누듯이 직원에게 권한 따뜻한 포도주 음료 또한 뱅쇼다.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그리스에 닿는데, 마시고 남은 와인 혹은 양조량이 많아 남은 와인에 향신료를 넣고 데워 마셨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와인에 향신료와 꿀을 넣고 데워서 마시는 방법이 처음 기록에 남은 것은 로마 제국이고, 이후 유럽 전역에 퍼져 나갔으니 추운 날씨에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뱅쇼가 유럽 크리스마스 마켓의 단골 음료가 된 것도 당연하다. 찬 바람을 맞으며 거니는 시간을 덜덜 떨지 않고 보낼 수 있게 해주는 가장 간단한 해결책인 덕분이다.
도시보다 일찍 추위가 찾아오는 캠핑장에 도착하면 화목난로를 설치한다. 한참 장작을 때면 연통이 빨갛게 달궈지는 모습이 인상적인 화목난로는 일부러 윗면이 편편해서 옛날 양은 주전자에 보리차를 끓이는 것처럼 난방과 더불어 그 열기로 가볍게 음식을 할 수 있는 것으로 골랐다. 벽난로가 있는 전원주택을 꿈꿨던 시절처럼 다들 난롯가에 둘러앉아 따뜻한 차를 나누어 마시며, 일 년 내내 쾌적한 집처럼 각자 개인 행동을 하지 않고 담소를 나누는 순간을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들 시나몬 스틱을 휘휘 저으며 뱅쇼를 마시는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무언가 기시감이 느껴진다. 한겨울에 귤을 까먹은 후 귤 껍질을 말려서 차를 우려 마시는 모습, 배와 꿀을 달여서 감기에 지친 몸을 달래는 배숙차를 만드는 모습과 어딘가 맞닿은 부분이 있다. 기본적으로 과일을 양조하여 만든 술에 추가적으로 과일 재료와 몸을 보하는 향신료를 넣어서 겨울철에 떨어지는 면역력을 강화한다는 바람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다들 추위에 손이 곱지 않기를, 가슴속이 따뜻하게 데워지기를, 그리고 이왕이면 이 시간 이후로도 감기며 오한에 시달리지 않게 튼튼한 면역력을 가져와 주기를 바라는 음료다.
뱅쇼는 단연코 캠핑 머그잔
뱅쇼를 만드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우선 와인을 고른다. 주로 레드 와인이지만 화이트 와인으로 만들어도 무방하다. 어차피 가열하면서 섬세한 향이 날아가는 것은 감수해야 하므로 너무 고가의 와인을 살 필요는 없다. 저렴하고 과일 향이 나는 와인을 골랐다면 다음은 과일과 향신료를 마련할 차례다. 서양에서는 말린 오렌지 껍질이나 신선한 오렌지를 주로 넣는데,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귤이 있다. 귤, 귤 껍질, 사과, 크랜베리 등 넣고 싶은 과일이나 가지고 있는 과일을 넣는 것으로 충분하다.
뱅쇼를 즐겨 마신다면 향신료는 따로 마련하는 것이 좋다. 주로 들어가는 것은 시나몬 스틱과 팔각, 정향, 코리앤더 씨 등으로 가루보다는 통째로 넣어야 뱅쇼가 탁해지지 않고 마실 때 목에 깔깔하게 걸리는 일이 없다. 짐이 많다면 1회 분량씩 면포에 싸서 지퍼백에 넣어 두면 주전자 하나에 한 주머니씩 넣어 쓰기 용이하다. 여기에 포트 와인이나 보드카, 코냑, 셰리 등을 살짝 가미해서 독특한 향을 더하기도 한다.
주전자에 와인을 콸콸 붓고 과일과 향신료, 설탕 적당량을 넣은 다음 화목난로나 은은한 약불에 올려서 10~20분 정도 뭉근하게 데우면 뱅쇼가 완성된다. 팔팔 끓이면 와인의 향이 많이 사라지니 주의하자. 만일 술을 마시지 않거나 아이가 있는 집이라면 도수가 낮은 맥주나 사과주를 사용하기도 하고 사과 주스나 진저에일 등으로 무알코올 버전을 만들 수도 있다. 우리나라 입맛에 딱 맞춘다면 수정과나 쌍화탕으로 만들어도 좋다. 중요한 것은 과일과 향신료 풍미가 배어든 따뜻한 음료로 추위를 함께 극복하는 것이니까.
■정연주
캠핑 다니는 푸드 에디터, 요리 전문 번역가. 르 꼬르동 블루에서 프랑스 요리를 공부하고 요리 잡지에서 일했다. 주말이면 캠핑카를 타고 떠나는 맛캠퍼로 ‘캠핑차캉스 푸드 라이프’ 뉴스레터를 발행한다.
정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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