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도 없이 맨날 미안하다는 엄마에게 화가 나요 [ESC]
연민·환멸감 함께 드는 건 당연
“지금은 화날만 한 상황” 알려주고
당사자의 감정표출 권리 보장을
Q. 저는 엄마에게 병주고 약주기를 반복하는 악취미가 있어요. 엄마는 한없이 약한 사람이에요. 그에 비해 오빠는 어려서부터 거칠 것이 없었어요. 친구가 조금만 기분을 상하게 해도 주먹부터 나갔어요. 엄마는 오빠 대신 반성문을 써서 냈고, 아빠는 오빠를 매질로 다스렸어요. 하루는 오빠가 엄마를 위협해서 돈을 빼앗아 피시방에 갔어요. 퇴근해서 그 얘기를 들은 아빠의 눈빛엔 살기가 돌았어요. 오빠를 잡아 끌고 집으로 데려와 죽도록 팼어요. 늘 맞기만 하던 오빠가 그 날 처음으로 아빠를 때렸어요. 그러더니 불똥이 엄마에게로 튀어, 아빠한테 일러바쳐 이렇게 되니 좋냐고 따지더라고요. 모멸감을 느낀 아빠도 엄마에게 퍼부었어요. 엄마가 오빠 버릇을 망쳐놔서 집구석이 콩가루가 됐다고요. 엄마는 미안하다며, 다 자기 탓이라며 울었어요. 엄마가 뭘 그리 잘못을 했길래 맨날 사과하고 비는지 저는 잘 이해가 안 됐어요. 오빠가 어렸을 때 잠시 할머니 집에 맡겨진 적이 있대요. 엄마는 오빠가 비뚤어진 게 그 때 사랑을 못 받아서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오빠를 무한히 감싸고 돌아요. 그럼에도 오빠는 항상 왜 이것밖에 못 주냐고 엄마를 닦달하고, 아빠는 그만 오냐오냐하라며 엄마에게 호통을 쳐요.
저 역시 엄마를 구박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에요. 며칠 전에는 엄마의 하소연을 듣는 게 힘들어서 기분 좋은 얘기 좀 하자고 했더니 엄마가 “너까지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더라고요. 지겹게 들었던 ‘미안하다’는 말이 나오자 어김없이 폭발했어요. 미안하다는 말 좀 하지 말라고, 자존심도 없는 사람처럼 왜 그렇게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사냐고, 그래 봤자 사람들은 엄마를 동정하는 게 아니라 막 대할 뿐이라고 쏘아 붙였어요. 밤새 죄책감에 시달리다 다음날 엄마랑 쇼핑 가고, 전날 제가 다 들어주지 못한 얘기를 들었어요. 하지만 이렇게 다정한 모습은 아마 며칠 못 갈 거예요. 이러다 또 엄마에게 상처 준 적이 많았거든요. 저는 아빠나 오빠에게 한번도 큰 소리 쳐 본 적이 없어요. 엄마를 힘들게 하는 아빠랑 오빠에게는 한마디도 못하면서 엄마에게는 비수를 꽂는 제가 너무 강약약강(강한 상대에게는 약하고 약한 상대에게는 강함) 같아요. 소정인(가명·29)
A. 흔히들 사랑과 미움을 동전의 양면이라고 합니다. 사랑의 뒤에는 반드시 그 크기만한 미움이 있게 마련이지요. 이 진리는 어떠한 예외도 남겨두지 않습니다. 연인, 친구, 하물며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에도 잔인할 만큼 똑같이 적용됩니다. 이를 생각하면 어머니를 안쓰러워하면서도 지겨워하는 정인님의 양가감정 역시 당연합니다. 엄마를 돕고 싶으면서도 밀어내고 싶고, 엄마는 잘못한 게 없다고 편들어주고 싶으면서도 자존심 좀 챙기라고 타박하고 싶은 마음뿐일까요? 우리 마음 속에는 더 극단적인 양가감정도 자리잡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양가감정이 주는 압력을 견디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싫어할 수 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쿨하게 인정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좀처럼 미움을 허용하지 못합니다. 은폐된 미움은 아무도 모르게 관계에 스며 해로운 본성을 드러냅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무심하게 행동한다거나, 미움을 감추기 위해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끝도 없이 들어준다거나, 임계치를 넘어서는 순간 폭발적으로 분출되어 타인을 다치게 하지요.
어머니에게 넋두리 좀 그만하라고 화를 냈다가 다시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어 줄 준비를 하며 분노 폭발을 ‘취소’하는 모습을 보니, 정인님 역시 어머니에 대한 양가감정, 즉 연민과 환멸의 결합을 견디는 것이 어려운 일인가 봅니다. 미움이 들어설 방을 만들어 줄 수 없는 거지요. 어머니와 기분 좋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 뿐인데, 본심과 달리 사람들의 박대를 자초하는 건 엄마 자신이라며 송곳보다 날카로운 진실로 어머니의 폐부를 찌른 것도 비좁은 방에 미움이 차고 넘쳐 흘렀기 때문일 거예요.
어머니 역시 한 줌의 미움도 허용하지 못 합니다. 오빠를 자식이 아니라 원수라고 느낄 법도 한데 어머니는 숭고한 사랑과 헌신에만 마음의 공간을 내주고 있어요. 그만큼 누군가를 향한 화와 적개심을 감당하는 것이 어렵다는 뜻일 거예요. 이럴 때 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그 감정을 자기 마음에서 떼어내 다른 사람에게 던진 후 대신 느끼게 하는 거예요. 아버지는 어머니가 던진 분노의 감정을 마치 자신의 감정처럼 느껴요. 위협 당하고 돈을 빼앗긴 어머니는 정작 화를 내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살기를 띠며 오빠를 때린 걸 보면 알 수 있어요. 어머니가 화를 내야 하는 상황에서 아버지가 더 강하게 화를 내는 것은 어머니로부터 화 낼 권리를 빼앗는 것과 다름 없어요. 이런 상호작용을 거듭하며 어머니에게서는 분노가 증발해버렸을 거예요. 아버지 역시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을 어머니에게 던지고 있어요. 바로 우울이요.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매질로 다스렸으면서 아들의 비행과 심리적 결핍에 대한 성찰은 없어요. 슬픔과 자책, 후회는 모두 어머니의 몫이에요. 그렇게 두 사람이 역할을 분담하여 각각 2인분의 분노, 2인분의 우울을 짊어진 채 삽니다. 물론 이건 의도하지도, 인식하지도 못 한 채 이뤄지는 무의식적 공모예요.
오빠의 비행은 어머니의 진단대로 애정결핍에서 비롯됐을지 몰라요. 그렇다고 해서 오빠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줘야 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오빠는 망아지 같은 자신의 행동에 누군가 고삐를 채워주길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제대로 된 고삐는 양가감정을 잘 견딜 수 있어야 채울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정인님도 양가감정을 잘 다룰 수 있어야 진정으로 어머니를 도울 수 있어요. 어머니를 멀리하고 싶을 때는 떨어져 있어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피학적일 정도로 굴욕적인 어머니의 모습에 화가 날 땐, 어머니에게 “지금은 화가 날 만한 상황이야”라고 살포시 얘기해보세요. 어머니를 비난하며 어머니의 자학에 동조하거나 어머니 대신 화를 내며 어머니의 감정을 도둑질하지 않고, 어머니가 감당하지 못해 주변으로 던져버린, 어머니가 느껴야 하는 감정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거예요. 어머니는 이 상황에 왜 화가 나냐며 어리둥절해 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 단초를 통해 사람들은 보통 이럴 때 화를 낸다는 것, 그게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그렇게 차차 미움을 위한 방도 마련될 겁니다.
박아름 심리상담공간 숨비 대표
※생활에 고민이 있으신가요? ‘마음 돌봄 MZ가 MZ에게’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사연 보내실 곳: esc@hani.co.kr
한겨레 기자로 짧은 기간 일했다. 방황의 시간을 보내며 임상 및 상담심리학을 공부했고, 30대 상담자로서 내담자들의 자기 이해와 발견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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