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로에서] 책이라는 ‘평등’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알려진 이후 뜻밖의 영상 하나가 소환돼 세상에 다시 나왔다.
영상은 그 책 표제에 나오는 지방 도시 여수를 찾아 나선 한강의 여정을 담았다.
그렇게 시대의 격랑과 더불어 성장한 한강은 마침내 아시아 여성 작가 최초로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자리에 올랐다.
스스로 책과 함께 성장했다고 밝힌 한강 작가가 한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어떤 억압 없이 책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고 말한 것처럼 책 읽기에는 어떤 억압도, 방해도 없어야 한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시사저널=김재태 편집위원)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알려진 이후 뜻밖의 영상 하나가 소환돼 세상에 다시 나왔다. 1996년 10월2일 EBS 문학기행 프로그램을 통해 방영된 한강 관련 다큐멘터리다. 방송 내레이터의 표현 그대로 '이름 앞에 소설가라는 직함을 달기엔 아직 앳되어 보이는' 그때의 한강은 2년 전 《여수의 사랑》이라는 첫 번째 소설집을 내고 문단에 막 이름을 알린 신진 작가였다. 영상은 그 책 표제에 나오는 지방 도시 여수를 찾아 나선 한강의 여정을 담았다. 여수를 소설의 배경으로 삼은 이유에 대해 한강은 영상 속에서 "여수가 아름다운 물(麗水)이라는 고장의 이름이기도 하고, 여행자의 우수라는 뜻의 여수(旅愁)가 되기도 하는 중의적인 것 때문"이라고 했다.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서 그 책 《여수의 사랑》을 어렵게 구해 읽었다.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을 '원서'로 접하는 감격은 컸다. 여수를 똑같이 모태처럼 여기는 두 젊은 여성이 등장하는 《여수의 사랑》은 읽는 내내 감정을 무겁게 가라앉혀 체증을 일으키게 할 정도로 우울하게 전개되는 단편소설이다. 책 속의 해설에서 강계숙 문학평론가가 정의한 바대로 "각각의 개인이 치유하기 힘든 마음의 병을 안고 각자의 '여수'를 향해 느릿느릿, 그러나 마치 주어진 운명의 수락을 조용히 거부하는 수난자처럼 자기 몫의 고통을 지고 회귀하는 이야기"다. 여기서의 고통은 극히 개인적이면서도 동시에 사회적인 격동의 상흔이라고 할 수 있다. 한강 소설의 뿌리가 어쩌면 그때 그 모태에서 자라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시대의 격랑과 더불어 성장한 한강은 마침내 아시아 여성 작가 최초로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자리에 올랐다. 지난 주말에 들른 시내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한강의 작품들은 1~7위를 독차지할 만큼 인기를 끌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모두 품절된 상태였다. 이는 비단 그 서점만의 일이 아닌 듯하다. 지방의 크고 작은 서점들 또한 공급이 여의치 않은 탓에 품절 아닌 품절난을 겪어야 했다. 가뜩이나 경영에 어려움을 겪던 터에 불쑥 찾아온 '한강 특수'에 반색했던 그들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풀뿌리 독서문화 플랫폼인 동네책방에 신속한 도서 공급이 이뤄져야 한다"는 전국동네책방 네트워크의 호소에서도 그런 안타까움은 여실히 묻어난다.
좋은 책이 많은 사람에게 읽혀야 그 선한 영향력이 극대화될 수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책에서만큼이라도 서울과 지방, 도농 간의 차이가 사라져야 문화 향유의 격차가 해소될 수 있음도 당연하다. 누구도 인위적으로 그 자연스러운 영향력의 통로를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더는 '블랙리스트' '유해 도서' 같은 방해물을 만들어 훼방해서도 안 된다. 한강 작가의 수상에 반대해 스웨덴 대사관에까지 몰려가 시위를 하는 모습도 바람직하지 않은 역류로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스스로 책과 함께 성장했다고 밝힌 한강 작가가 한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어떤 억압 없이 책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고 말한 것처럼 책 읽기에는 어떤 억압도, 방해도 없어야 한다. 책 속에서 이뤄지는 평등은 가장 보편적이고 중요한 인간 권리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마침 가을, 독서에 안성맞춤인 계절이고 대학수학능력시험일도 얼마 남지 않았다. 더 많은 사람이 책 속의 평등을 마음껏 누리고, 그 평등 속에서 다양한 분야의 좋은 책을 많이 읽은 학생들이 모두 원하는 진학의 꿈을 이룰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참에 우리 시대가 '정치 과잉'이 아닌 '독서 과잉'의 시대로 바뀐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Copyright © 시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